순정만화는 나를 키웠고...

by 김송희

루이자 메이 올컷이 <작은 아씨들>을 출간한 것은 무려 1860년대, 152년 전이다. 지난 2월 개봉한 그레타 거윅의 <작은 아씨들>은 이 소설로 만든 무려 여덟 번째 영화다. <작은 아씨들>이 이처럼 자주 각색되는 데는 이 고전이 시대에 따라 달리 해석될 원전이며, 여기에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넉넉지 못한 형편 속에서 서로를 응원하고 보듬으며 꿈을 향해 나아한다. 그레타 거윅 역시 자신은 이 책과 함께 자랐다며, 언젠가 이것을 영화를 만드는 게 꿈이었다고 언급했다. <작은 아씨들>을 읽으며 성장한 다수가 그런 꿈을 꿨을 것이다. “나도 조처럼 언젠가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겠어.”

아르미안의 네 딸들

어릴 때 <작은 아씨들>만 마르고 닳도록 읽던 소녀들은 몇 천원의 용돈이 주어지는 순간부터 대여점으로 모여들었다. 이미라의 <인어공주를 위하여>를 보며 내가 이슬비라면 늘푸르매과 서지원 중 누구를 선택할 것인지 참으로 쓰잘데기 없는 고민을 했고, <아르미안의 네 딸들>에서 비극적인 사랑을 하는 둘째 스와르다에 푹 빠져서 그녀의 적은 분량에 홀로 가슴앓이를 하기도 했다. 그뿐인가. 타케우치 아사미의 <수다쟁이 아마데우스>을 읽고는 부모님을 졸라 바이올린 학원도 등록했으며, 유시진의 <쿨핫>을 보고 독서 토론 동아리에 가입했고, 이은혜의 <블루>에 감동받아 작가님에게 문하생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편지를 써 보내기도 했다. 열거하고 보니 그 시기의 내 인생은 만화책에게 조종당했나 싶을 정도로 모든 선택에 영향을 받았다.



안타깝게도 그간 한국에서 순정만화라는 말은 그 폄훼의 뉘앙스로 활용되었다. 순정만화란 그저 <꽃보다 남자>의 구준표의 “너 내 여자가 돼라”라는 벽쿵(벽으로 여주인공을 밀며 벽을 손으로 쿵 내리치는)설정 정도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얼마 전 SNS에서는 과거의 순정만화들이 지나치게 연애 중심이고, 현대의 여성이 보기에 불편한 설정이 많아 안 팔리는 콘텐츠가 되어 계보가 끊긴 거라는 비판 글이 돌았다. 물론 그 글 아래에는 ‘순정만화를 보고 자란 세대’들의 반박으로 열띤 토론의 장이 열렸다. 순정만화를 ‘순수한 애정을 내용으로 하는 만화’라고 분류한 것 역시 구시대적 발상이며, 과거의 여성향 만화들은 단순 연애 만화가 아니라는 반박들이었다. 그 사례로 언급되는 만화들이 신일숙의 <아르미안의 내 딸들>과 <리니지>, 강경옥의 <별빛 속에>, 김혜린의 <북해의 별>과 <불의 검>, 김진의 <바람의 나라> 등이었다. 거대한 세계관 속에서 계급 사회, 소수자와 고대사의 이야기까지 아우르는 걸작들이 ‘90년대 순정만화는 연애에 목숨 거는 이야기’라는 폄훼에 반론의 예시로 제시된 것이다.

바이올린이...바이올린이 하고 싶어요....


물론 고전이라고 하여 현재의 시점으로 해석했을 때 문제가 되는 성인지 감수성이나 폭력성, 구시대적 감수성을 모두 용인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옛날엔 다 그랬어.’라고 용서하기 시작하는 순간 세상은 개선되지 않는다. 작가가 과거의 작품을 현재의 독자들에게 다시 대놓으며 수정이 어려울 때에는 해당 작품의 문제점을 창작자 스스로 고지하기도 한다. 천계영 작가는 최근 다음 웹툰 사이트에 과거작 <하이힐을 신은 소녀>를 업로드하면서 반성의 공지를 올렸다. “이 만화에는 폭력적인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중략) 폭력을 행사한 가해자에게 너무 쉽게 면죄부를 주는 잘못된 서사라는 걸 이제는 알게 되었습니다. 2007년 연재판 그대로 내보내며 작가의 무지했던 과거를 스스로 비판하고 반성합니다.” 강한 여주인공 캐릭터가 악역 남성을 무찌르며 성장한다는 이 작품의 서사는 지금 봐도 크게 뒤처지지 않는다. 그러나 폭력성이 강하며, 가해자에게 쉽게 면죄부를 주는 지점을 작가 스스로 반성한 공지는 2020년의 독자들이 과거의 작품을 제대로 독해하게 돕는다.


이은혜 '블루'....승표야 행보카니............

고전은 태생적으로 과거에 창작된 것들이다. 당연히 창작 당시의 시대성을 담고 있을 수 밖에 없으며, 그럼에도 그 시대의 관습을 이겨내려 몸부림친 흔적이 있는 것만이 살아남아 ‘고전’의 칭호를 얻는다. 그것이 어떤 함의를 담고 있든지 다음 세대의 아이들은 어차피 각자에게 필요한 부분만을 발췌해 공감하며 재해석하고 자기 삶에 대입한다. 앞서 언급한 천계영 작가처럼 창작자가 반성하며 현재까지 유의미한 작품을 계속 생산해내고 있다면 더욱 훌륭하고.



순정만화를 여성만화라는 이름으로 새로이 명할 수도 있으며 <불의 검>과 <리니지>, <바람의 나라>와 같은 드넓은 세계관을 가진 만화를 한국 순정만화 계보의 앞에 두고 자랑스러워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의 10대 시절 무수한 선택들에 영향을 줬던 만화들은 사실 여성이 싸워 이겨 영웅이 되는 서사가 아니었다. 그 시절의 나는 배경이 무엇이 되었든 순정만화 코너에 있는 만화는 닥치듯 다 읽었고 그 무수한 이야기 속에서 감동과 눈물도 내 기준으로 선별됐다. 연애가 주요 플롯이어도 내가 푹 빠진 것은 주인공이 밤새 바이올린을 연습하다 손가락에 피를 흘리는 장면이었고, 뒤에서 와락 주인공을 껴안던 남자의 모습은 별 영향을 주지 못했다. 바이올린은 나도 배울 수 있었지만, 현실에서 ‘순정만화를 찢고 나온 남자’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어서 영향을 받을 래야 받을 수가 없었다. 내게 만화 속 로맨스는 그저 서브플롯에 불과했고, 대신 여자 주인공들이 어려움 속에서도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은 늘 나를 움직이게 했다. 그러니까 나는 순정만화 속 주인공과 나를 동기화하며 성장했다. 연애만 빼고.


'나일론' 5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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