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조이'하지 못한 이야기

by 김송희


Inked캡처_LI.jpg



최근 인터뷰한 여자 연예인의 소속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인터뷰 발언 중 “n번방에 들어갔던 26만명”이라는 말에서 26만이라는 숫자를 빼달라는 요청이었다. 26만명이라는 확실치 않은 숫자를 말했다가 문제가 될 것 같다는 것이 이유였다. n번방 범인을 처벌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발언은 괜찮지만, 26만명이라는 숫자는 곤란하다? 나는 다시 한 번 이 사건을 둘러싼 여러 갈래의 논의와 사건의 본질을 흐리는 공방전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그 방에 들어간 인원이 진짜 26만명인가 아닌가, 그것이 왜 중요하단 말인가. 26만명이네 아니네로 본질을 흐리는 선동은 왜 벌어지는가. 사실 그 숫자가 불편한 사람들은 잠재적 범죄자 취급이 싫은 것이다. 경찰이 현재 시점까지 조사결과 추정하는 주동 가해자는 3만 명 내외인데 26만명으로 지칭하는 순간 지나치게 광범위한 숫자가 되어버리고 이는 관련 없는 남자들까지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받을 수 있다 주장하는 것이다.


지난 3월 20일 청와대 국민청원에 올라온 ‘텔레그램 n번방 가입자 전원의 신상 공개를 원합니다’에 동의하는 인원이 일주일 만에 2백만 명을 훌쩍 넘겼다. 이 청원에서 눈여겨볼 점은 청원인이 ‘가해자가 처벌받지 않을 것’이라 믿고 있다는 점이다.


청원자의 글에는 “그 방에 가입한 구매자 26만 명이 아무 처벌도 받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 추악한 범죄는 반드시 대한민국에서 재발할 것”이라며 “나라가 아이들을 성범죄자들로부터 지켜주지 않을 거라면 알아서 피할 수 있게 n번방 가입자 전원의 신상을 낱낱이 공개해달라”고 쓰여 있다. 청원자는 성범죄자의 처벌 수위가 낮은 한국 법에 대해 좌절한 상태에서 글을 쓴 것이다. 이는 지난 세월 동안 죄질에 비해 지나치게 가벼운 형량을 받은 성범죄자들과 바로 얼마 전 ‘버닝썬 사건’이 쉽게 묻힌 것을 본 사람들이 가질 수밖에 없는 무력감에서 비롯했다. 어차피 제대로 처벌하지 못할 것이 뻔하니 신상을 공개해 피해갈 수 있게라도 해달라. 이 얼마나 참혹한 현실 인식인가. n번방 중 ‘박사방’의 운영자 조주빈이 검거된 이후 강훈(부따), 이원호(이기야) 등 공범들의 신상이 줄줄이 공개된 후 4월 29일 ‘n번방 방지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개정안에 따르면 불법 성적 촬영물을 소지한 것만으로도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하고 타인이 만든 성착취물을 공유만 해도 처벌할 수 있다.


여기까지 오는 길이 절대 쉽지 않았다. 디지털 성범죄를 추적하는 ‘추적단 불꽃’에서 n번방 증거를 수집하고 기자들과 폭로하는 활동을 해서 겨우 사건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프로젝트 리셋’에서는 성착취 비디오를 유포하는 텔레그램 채널을 신고하고 그 기록을 모아 n번방 보고서를 만들었다. 이 보고서가 n번방 사건 법무부 TF의 서지현 검사를 거쳐 추미애 법무부 장관에게 전달되고, 사건의 위중함이 법무부 장관의 입을 통해 ‘n번방 이후는 달라져야 한다’고 구체적으로 거론된다.


우리 사회는 더 나아지고 있는가. 아니, 아직 낙관하기는 이르다. n번방 사건 최초 보도 후 두 달 사이에 보도된 성범죄만 해도 셀 수 없을 정도다. 그 사이에 n번방 운영자 중 1명인 켈리는 겨우 징역 1년형이 확정됐고, 부산 시장이 성폭력 고발로 인해 사퇴했으며,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은 국가대표 유도 은메달리스트가 미성년자 성폭행 혐의로 구속됐다. 보도되지 않은 성범죄 사건은 또 얼마나 많은가. 지긋지긋하다 못해 환멸이 난다. 가해자는 인지조차 못하는 추행과 희롱 역시 무수하다. 성범죄를 경시하고 농담처럼 가볍게 여기도록 일조해온 미디어도 바뀐 게 전혀 없다.


미취학 아동에게도 ‘엄마 닮아 쭉 뻗은 각선미’ 따위를 기사 제목으로 달며 조회 수 장사를 해온 연예 뉴스, 여자 아이돌이 출연하면 다짜고짜 섹시 댄스부터 시키는 프로그램은 여전히 성업 중이다. ‘저녁 뉴스’에서는 아동을 협박하고 성 착취한 사건이 보도되지만, 뉴스가 끝나고 방영되는 방송의 성 인지 감수성은 꾸준히 퇴보 중이다. 주말 드라마에서는 유흥업소에서 일하던 여성들이 김밥집을 개업해 미니스커트 차림으로 교복 입은 남자 청소년에게 레몬사이다를 말아주고, 코미디 프로그램에서는 여자들이 무대 위에서 야한 포즈를 취할수록 객석에서 코인을 던져주는 코너를 진행한다. 새로 공개된 넷플릭스 드라마의 주인공은 온라인으로 조건 만남을 중계하는 성매매 포주인데, 겨우 고등학교 2학년이다. 이들은 현실을 반영한 방송을 만들고 있는가, 아니면 시청률 좀 얻겠다고 미래를 짓뭉개고 있는가.


*나일론 5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작가의 이전글먹는 게 제일 좋아, 특이한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