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대의 여행법과 연결감
지금 당신의 창 밖으로 무엇이 보이나요? 저는 인도의 노이다에 위치한 어느 저택의 창문 밖 풍경을 보고 있습니다. 창문이라기보다는 정원과 집을 분리하는 파티오도어에 더 가깝겠네요. 중간문을 활짝 여니 푸른 잔디와 벽을 타고 자란 담쟁이와 그 뒤로 울창하게 뻗은 수목들이 펼쳐져 있습니다. 마침 비도 내리고 있어서 차분한 빗소리와 먹구름이 몰려오는 소리가 섞여서 더할 나위 없이 운치가 좋네요. 60년대 미국영화에나 나올 것 같은 목재로 만든 덧문은 우아한 디자인이고,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언뜻 보이는 커튼이 기분 좋게 찰랑거립니다. 계속 내리는 비 덕분에 정원수와 잔디가 시원하게 물을 머금어 여름이 더 짙어지고 있고요.
답답한 코로나 시대에 해외 여행 중인 걸 자랑하냐고요? 아니요, 사실 제가 보고 있는 창문은 우리 집 창문이 아닙니다. 남의 집 창문을 모니터에 띄워놓고 저는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아마 아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window-swap라는 사이트에 접속하면 24시간 이렇게 예쁜 남의 집 창밖 풍경을 볼 수 있답니다. 비록 우리 집은 창을 열어도 앞 뒤 빌라 벽돌로 꽉 막혀 조막만한 하늘도 볼 수 없지만, 고도화된 현대 사회에서는 이렇게 남의 집 창문을 구경할 수 있습니다. 인도 창문이 지겨우니 다음 창문으로 넘겨야겠습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어느 집에는 창문 앞에 개가 늘어져 있습니다. 커다란 통창 앞에 침대가 놓여 있고 셰퍼트종으로 보이는 큰 개가 침대에 누워 하품을 하고 있습니다. 클릭해서 보니 이 창문은 ‘로렌’의 집이라고 하네요. 창문 앞에 가로수가 드리워져 햇빛과 초록색이 어우러진 집에 사는 로렌은 어떤 사람일까요. 비록 서울의 저는 밤 10시에 원고를 쓰고 있지만, 모니터 속 샌프란시스코는 대낮이고 이름을 알 수 없는 큰 개가 침대에 누워있으며, 그 집에 사는 누군가가 샤워 중입니다. 녹화 영상인데도 동 시간에 로렌과 공간을 공유하고 있는 기분이 듭니다.
창문 밖 풍경, 조망권을 가질 능력
코로나로 인해 사회적 거리두기가 2.5단계까지 올라가자 강제적으로 집에 봉인될 수 밖에 없었던 대다수의 시민들은 좁은 집 안에서 이렇게 나름의 탈출구를 찾아야 했다.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들은 레크레이션 강사가 되어 각종 놀이를 개발했고, 작은 집에 홀로 사는 1인 가구인 나의 경우에는 남의 창밖 풍경을 찾아보고, 유튜브에서 외국 유학생들의 브이로그를 틀어놓거나 과거 여행 갔을 때 들었던 음악들을 크게 틀어놓고 시간을 보냈다. 특히 앞서 소개했던 창문 채널은 <Open a new window somewhere in the world>라고 적힌 화살표를 클릭하면 전 세계의 다양한 창문들과 그 공간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재택근무시에 훌륭한 백색소음 역할을 한다.
어느 날은 창밖에 닭장이 보이는 미국 펜실베니아의 집 창문을 켜놨다가 '꼬꼬댁~'하고 닭이 울어서 화들짝 놀란 적도 있다. 도대체 집이 뭘 하는 곳이기에 저런 풍경이 가능한지, 창 밖 정원 잔디에 사슴이 스무 마리 정도 돌아다니는 풍경도 있었는데 모니터 위에 표기된 집 주인의 이름은 ‘레이첼’이다. 미국에 사는 레이첼씨는 도대체 어떤 집에 살고 있기에 멀쩡한 정원에 사슴 가족이 돌아다니는 것일까. 일을 하다 말고 멍하니 남의 집 창밖을 보다가 상상력을 한껏 펼쳐보기도 한다.
이 창문 사이트는 싱가포르의 소날리 부부가 만들었는데, 이들은 멋진 집에 살고 있는 어떤 사람이 ‘우리 집 창문 밖 풍경이 마음에 안든다’며 올린 사진을 보고 아이디어를 떠올렸다고 한다. 이 사람이 올린 그 집 창문 밖 풍경 사진은 이 부부가 보기에 충분히 아름다웠는데도 매일 보다보니 집 주인에게는 무감해진 것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 속에 살아도 매일 보다 보면 질리게 되고, 그래서 사람들은 낯선 풍경을 찾아 여행을 다닌다. 여행을 할 수 없는 이 시대에 이 부부는 전 세계 사람들의 창문 밖 영상을 공유받아 홈페이지에 올리고 있다.
비행기를 타면 언제든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갈 수 있었던 과거에는 이런 이국적인 풍경을 보면 ‘가보고 싶다’라고 생각 했지만 지금은 남의 집 창문 영상들을 돌려보거나 구글 어스로 해외 관광지를 돌려보며 대리 만족을 할 수 밖에 없다. 게다가 인구가 수도권에 과밀되어 있는 한국에서 ‘조망권’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 권력이다. ‘뷰’가 훌륭한 아파트 고층은 아무나 점거할 수 없다. 높은 곳에 살며 넓은 창으로 하늘과 한강, 산을 내다볼 수 있는 시선의 권력은 서울에서 서민에게는 감히 꿈꿔볼 수 없는 것이다. 아마도 나는 평생 저런 창문 밖 풍경을 가져볼 수 없을 것이다. 풍경을 가지는 것은 자본가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사치이다. 실물로는 영접할 수 없는 풍경을, 나는 모니터 너머로 바라보며 잠시 그것을 ‘공유’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같이 한다는 ‘연결감’
공원 시험을 준비하는 내 친구는 밤마다 영국에 있는 한국 유학생과 공부를 한다. 진짜 친구가 아니라 유학생 유튜버가 라이브를 켜면 접속해 같이 공부를 하는 것이다. 인기 유튜버 중에는 해외 유학생들이 많은데, 그들은 평소에는 외국의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을 담은 일상 브이로그를 하다가 시험 기간에는 공부 유튜브를 한다. 영상에는 책상 위 책이나 손만 나온다. 찾아보니 지금은 프랑스의 한 유학생이 유튜브에서 공부 라이브 중이다. 책상에 카메라를 설치한 것 같은데 한 번도 카메라를 보지 않고 공부에만 열중한다. 책상 옆 활짝 열어젖힌 창문 밖에는 예쁜 프랑스 건물과 파란 하늘이 펼쳐져 있다. 공부법을 알려주거나 혼잣말을 하는 라이브도 아니다. 정말 3시간 넘게 아무 말도 없이 열심히 필기 중이고 동시 접속자는 천 명이 넘는다.
독서실에 친구랑 손잡고 가서 쉬는 시간에 ‘컵라면’이나 먹는 게 ‘같이 공부하는 것’인 줄 알았던 구세대로썬 왜 남의 공부하는 영상을 켜놓고 공부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친구에게 ‘남의 공부 영상은 왜 보는거냐’고 물었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안 봐. 나도 공부해야지. 그냥 틀어놓고 공부하는 소리 ASMR로 듣거나, 분위기 조성하려고 켜는 거야. 혼자 적막하게 하면 집중도 안 되고 외롭잖아.”
외로울 땐 진짜 친구인 나한테 전활 해...라고 하려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샌프란시스코에 살지도 않는 내가 그 집 창문을 모니터에 띄워놓고 잡다한 소음을 들으며 재택근무를 하듯이, 친구는 얼굴도 모르는 프랑스 유학생의 라이브를 켜놓고 함께 공부를 하는 것이다. 단순하게 우리 집 창문에는 풍경이 없고, 외로워서가 아니라 단절되고 싶지 않아서다. 랜선으로 세상과 연결되어 있고는 싶지만, 나를 아는 실존 인물과 전화통화는 하고 싶지 않아, 뭐 그런 기분으로 말이다.
**이 글은 문화+서울 11월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