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린이에서 자덕이 된 사람의 일대기.
자전거 한 번 타 볼래?
2019년 9월 말. 하늘이 아주 푸르렀던 가을에 들었던 말이었습니다.
당시에 저는 직장 일도 힘들었고, 다른 여러 가지 안 좋은 일들도 겹쳐 많이 힘들어하고 있었습니다. 상황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고, 탈출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지요. 이 때 친한 직장 선배님께서 한 마디 툭 던지셨습니다.
"자전거 한 번 같이 타 볼래?"
예전에 자전거를 꽤 많이 타셨었고, 우울증 극복에는 자전거가 제격이라면서 추천해 주셨습니다. 싸고 좋은 자전거를 추천해 줄 테니 같이 자전거나 타면서 운동이나 하자며 저를 설득하셨죠. 딱히 할 일도 별로 없고, 방 안에만 틀어박혀 유튜브, 핸드폰이나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보내느니 운동이나 해 보자는 생각이 들어 그 길로 자전거 샵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별 고민 없이 35만원짜리 하이브리드 자전거를 하나 사게 되었습니다.
여의도 한강공원으로
자전거를 산 날 부터 직장 선배님과 저는 퇴근 후에 여의도 한강공원을 찍고 돌아오는게 일상이 되었습니다. 직장이 고척동에 있었으므로 고척동에서 출발하여 여의도 한강공원을 찍고 구로동 저희 집으로 돌아오면 약 30km정도의 거리가 나왔지요. 일주일에 세 번 이상은 그렇게 다녀왔던 것 같습니다. 저는 안양천과 한강에 자전거길이 그렇게 잘 되어 있는 줄도 몰랐던 터라 무조건 선배님 뒤만 졸졸 따라다녔죠. 안양천과 한강이 합쳐지는 부분을 '안양천 합수부'라고 부르는데 직장에서 여기까지 가는데도 너무 힘들어서 여기서 한 번 쉬고 갔었습니다. 밟아도 밟아도 나가지 않는 자전거가 그 때는 어찌나 그렇게 무겁게 느껴졌던지... 그래도 가을에 보는 한강의 풍경은 턱 밑까지 차오른 숨과 터질 것 같이 뛰는 심장을 일순간에 잊을 만큼 아름다웠습니다.
안양천 합수부에서 한숨 돌리고 나서는 다시 여의도 한강공원으로 출발했습니다. 그 전에 한창 서울 자전거 '따릉이'가 유행할 때도 자전거에 관심도 없던 터라 이런 예쁜 길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이 억울할 정도로 좋았습니다. 눈을 돌리면 돌리는 대로 온통 신기한 풍경과 경험으로 가득 차 있었지요. 여의도 공원에 도착할 때 즈음이면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지요. 해가 지는 풍경을 보며 여의도 한강공원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먹고 있으면 그 순간만큼은 그 동안 하고 있었던 걱정을 모두 잊을 정도로 행복했습니다.
이런 멋진 풍경을 경험하고 나니 자전거는 이제 더 이상 운동의 수단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빠른 속도로 자전거는 곧 제 삶의 일부가 되었고 유튜브와 핸드폰을 집어던지고 주말에도 자전거를 타러 나가는 지경에 이르렀죠. 주위 사람들에게 자전거 타러 가자고 하고, 자전거 이야기밖에 하지 않는 소위 '자전거 전도사'가 되었습니다.
자전거를 바꾸다.
그러던 중 저는 한강에서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제 옆을 멋지게 추월하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자전거 모양이 저와는 조금 다르다는 것이었죠. 핸들이 조금 다르게 생겼구요, 안장이 높았습니다. 허리를 숙이고 고개를 들고 아주 멋진 자세로 '지나가겠습니다~'라고 말하며 멀어지는 그들을 보며 부러움을 느꼈지요. 알아보니 그 자전거는 '로드 자전거'라고 하는 제 것과 다른 종류의 자전거였습니다. 그러고보니 같이 자전거를 타는 직장 선배님도, 친하게 지내는 자전거를 같이 타게 된 아는 형님 자전거도 로드 자전거였지요. 그 멋진 자세에 반한 저는 자전거를 바꿀 결심을 하게 됩니다. 2019년 10월 말, 하이브리드 자전거를 산 지 채 두달이 되지 않은 때의 일이었죠. 자전거를 같이 타는 친한 형님께 여쭤보니 "105 구동계의 카본 소재의 자전거가 좋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물론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일단은 105 구동계 카본 자전거를 사기로 결정했고 대만 브랜드인 '자이언트' 사에서 나온 TCR이라는 자전거를 구매하게 됩니다.
검은색, 파란색의 디자인에 멋지게 잘 빠진 날렵한 로드 자전거는 제 마음을 한 번에 사로잡기에 아주 충분했지요. 자전거를 바꾸고 나서 더욱 큰 꿈을 꾸게 됩니다. '한강을 따라 끝도 없이 이어진 자전거 길에는 어떤 새로운 풍경이 또 펼쳐져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지요.
자린이, 서울 밖으로 나가다.
자린이는 자전거+어린이의 줄임말이라고 하네요. 자전거를 바꾸고 새로운 길에 대한 욕심이 생긴 저는 한강을 따라 끝없이 이어진 이 길 끝에 무엇이 있을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주말에 대학 후배 한 명을 꼬드겨 '정서진'이라는 곳을 처음 가게 됩니다. 한강 자전거길을 지나서 아라뱃길을 따라 이어진 자전거길을 쭉 달리다 보면 도착할 수 있는, 우리나라 4대강 국토종주길의 시작 혹은 끝이 될 수 있는 곳입니다. 구로동 저희 집에서 시작해서 정서진을 찍고 오면 약 80km정도로, 당시에는 정말 대단한 도전이었지요.
페달을 밟는 내내 정말 힘들었지만 그 힘든 것이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주변 풍경이 예뻤습니다. 강을 따라 이어진 자전거도로와 그 양 옆으로 쭉쭉 뻗어 있는 나무들, 달리다 보면 나오는 예쁘게 꾸며진 공원들까지 어느 하나 버릴 것 없는 풍경들이었지요. 네이버 지도를 켜서 길을 헤메 가며 기어코 정서진에 도착했을 때의 뿌듯함은 지금도 잊을 수 없었습니다.
정서진을 무사히 다녀 오고 용기가 생긴 저는, 그 때 그 후배를 다시 한 번 꼬드겨서 이번에는 팔당에 있는 초계국수를 먹고 오기로 했습니다. 한강의 서쪽으로 가 보았으니 이번에는 동쪽에는 무엇이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 탓이었지요. 팔당 초계국수는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사이에서 꽤나 유명한 곳이더군요. 자전거를 타는 사람으로써 이런 곳은 안 가볼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구로에서 출발하여 팔당 능내역을 찍고 오는 코스는 왕복 110km정도의 엄청난 도전이었습니다. 저희는 단단히 각오를 다지고 오전에 출발했습니다. 순탄하게 자전거도로를 따라 달리던 저희는 첫 번째 난관을 만나게 됩니다. 암사고개, 일명 '아이유 고개'라고도 불리는 이 곳은 서울에서 하남으로 넘어가는 관문 같은 언덕길이었지요. 언덕을 자전거로 올라가는 게 얼마나 힘든 지도 모르고 맞이했던 첫 언덕은 저희에게 지옥을 선사합니다. 1km 남짓한 이 언덕은 저희에게 저승사자가 무엇인지 보여주었죠. 우여곡절 끝에 언덕을 오른 저희는 내리막길의 시원함을 맛보며 본격적인 경기도 구간으로 들어서게 됩니다.
서울을 벗어난 한강 자전거길은 저희를 환상적인 풍경으로 이끌었습니다. 길 왼편으로 펼쳐진 조용한 한강은 한강을 따라 달리는 저희의 말을 잃게 만들었고 한강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은 보는 것 만으로도 시원하게 저희를 맞아 주고 있었습니다. 이대로라면 해가 질 때 까지도 달릴 수 있겠다고 생각했고 언젠가 이 자전거길이 끝나는 곳 까지 멈추지 않고 달려보자고 다짐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팔당에서 드디어 초계국수를 먹었습니다. 자전거 타는 사람이 추천하는 맛집은 가지 말라는 격언이 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그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 때 이해했습니다. 자전거 타고 난 다음에는 뭘 먹어도 정말 맛있네요!
자린이, 남산에 처음 가다.
팔당에 다녀오고 나서 더욱 자전거에 흥미를 붙이고 저는 동호회에 가입하게 됩니다. 막 만들어지기 시작한 신생 모임이었고, 초보 모임이라서 저도 쉽게 적응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가입했지요. 막상 동호회에 가입했지만 제게는 큰 시련이 하나 찾아오게 됩니다. 자전거 타는 사람 모두가 겪게 될 시련이지요. 그것은 바로 겨울이 왔다는 것입니다. 겨울이 오니 살을 에는 듯한 추위에 도저히 자전거를 탈 수 없었지요...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 기온이 영상으로 올라가기만 하면 자전거를 타고 나갔습니다.
그렇게 자전거를 타며 2020년을 맞이했고, 긴 기다림의 시간 끝에 드디어 봄이 찾아왔습니다. 봄이 찾아오고 본격적으로 동호회 활동을 하며 자전거를 타던 중 자린이었던 저를 완전한 자덕으로써의 저로 바꿔준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바로 남산 도전이었지요.
'엥? 남산을 어떻게 자전거를 타고 올라가지?' 라고 저는 생각했지만 의외로 남산은 자덕들의 성지 같은 곳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당시 저는 자전거 마라톤인 '그란폰도'라는 자전거 대회에 출전해보고 싶어서 알아보던 도중 큰 언덕들을 넘어야 한다는 말에 매우 고민하던 찰나였습니다. 동호회 사람들이 남산에 간다기에 자전거로 언덕을 오르는 연습도 할 겸 처음으로 남산에 도전하게 됩니다. 남산은 가는 길부터 정말 힘들었습니다. 자전거도로밖에 모르던 저는 처음으로 자동차가 달리는 공공도로를 타게 되었고 언덕이라고는 아이유 고개밖에 넘어본 적 없던 저는 거의 4km에 달하는 언덕(남산 가는 길+남산 공원 길)을 올라가 봤지요.
목에서는 피 맛이 나고 숨을 너무 헐떡여서 폐가 아팠지만 남산을 다 오르고 나니 너무나도 짜릿했던 기억이 납니다. 동시에 '스트라바'라는 어플에서 사람들이 남산을 몇 분 만에 올랐는지 기록 경쟁을 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지요. 제 마음 속에서 묘한 도전의식이 불타기 시작했던 것도 그 때부터였습니다.
자린이에서 자덕으로
그 이후로 저는 자전거를 타고 산으로 들로 강으로 쏘다니며 많은 추억을 만들었습니다. 자전거와 두 다리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었고 어디든 갔던 곳에는 전에 갔던 곳과는 조금씩 다른 훌륭한 풍경과 맛있는 음식들이 있었습니다. 자전거를 타며 소중한 인연도 많이 만들었고 점점 잃어가고 있었던 건강도 되찾는 것을 넘어서 '지금이 일생 중 가장 건강한 한 때가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생활 패턴도 완전히 바뀌어서 새벽에 잠들고 오후에 일어나던 패턴을 버리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새 나라의 어른으로 거듭났습니다. 물론 정신적으로도 굉장히 건강해져서 한 때 우울해 했던 날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의욕이 넘치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다음엔 어떤 새로운 곳을 가볼까? 라는 생각을 하면 저절로 스트레스가 풀리고 기분이 좋아지네요.
삶이 재미 없다고 느끼거나, 건강해지기 위해 운동을 하고 싶다거나, 우울한 일이 너무 많아 몰두할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제게 말한다면 저는 주저없이 이 말을 꼭 해 주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