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로 배우는 인생사
자전거를 열심히 타게 되면서 여러 대회에 참가할 기회가 많아졌다. 그 동안 코로나-19로 인해 대회도 열리지 않고, 막상 대회가 열리게 되어도 참가하기가 꺼려졌었다. 이번 년도에는 그 동안 열리지 않았던 대회들을 한 번에 열려고 하는 것인지 다양한 지역에서 다양한 자전거 대회들이 열리고 있다. 사실 모든 대회에 다 나가는 것은 불가능하고, 또 최근 여러 가지 일들로 기력이 영 없어서 다른 대회들은 그냥 열린다는 소식만 듣고 있었다. 하지만 무려 지리산의 이름을 달고 나온 '지리산 그란폰도'가 열린다는 소식에 큰 맘 먹고 대회에 출전하기로 했다. 지리산은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산으로, 갈 때 마다 현실의 어려움에 지친 마음을 위로를 받고 오는 산이다. 지리산에서 대회가 열린다니 안 갈 수 없지 않겠는가.
그란폰도가 무엇인가?
자전거를 이용한 비경쟁 방식의 동호인 대회이다. 따라서 프로 사이클 선수는 출전할 수 없고, 등수를 매기긴 하지만 상금이 크지 않다. 거리는 90km부터 200km까지 다양하다. 그란폰도에서는 거리도 중요하지만 자전거로 오른 언덕의 높이도 중요하다. 이 언덕의 높이를 다 더한 것을 '획득고도'라고 부른다. 만약 당신이 180m의 서울의 남산과 300m의 북악산을 올랐다면 당신의 획득고도는 480m가 되는 식이다. 이번에 필자가 출전한 지리산 그란폰도는 길이 159km에 획득고도 약 3200m 정도의 대회였다.
AM 1:00 대회 준비, 그리고 출발
일요일 새벽 1시에 여의도에서 버스에 탑승했다. 일반적인 사람들이라면 거의 잠에 들었을 시각이라 그런지 한밤중의 여의도는 정말 고요함 그 자체였다. 버스에 자전거를 싣느라 바쁜 우리들의 소리를 제외하면 간간히 들려오는 바람 소리와 이따금씩 들리는 자동차 소리 뿐. 잠시간의 소란 끝에 버스는 출발했고 눈을 잠시 감았다 뜨니 버스는 지리산 그란폰도 출발점인 남원 공설운동장에 도착해 있었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시각이었지만 운동장은 벌써부터 자전거를 내리고 몸을 푸는 사람들로 시끌벅적했다. 워낙 일찍 도착한 탓에 출발시간인 7시까지는 상당히 여유가 있었고, 그런 사람들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아침을 먹었다. 거북이처럼 여유를 부리며 대회 준비를 하다 보니 어느새 해가 뜨고 있었다. 몇몇 사람들이 대회 전날에 지리산 근처에 비가 오는 것이 아니냐며 걱정했지만 필자는 언제나 그렇듯이 비가 절대로 안 올거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줬다.
출발 시각이 다가오고 사람들이 슬슬 출발선으로 모여드는 광경을 보고 있으니 굉장한 진풍경이 펼쳐졌다. 참가자는 약 3천명 이상이었고, 출발선부터 이어진 자전거의 행렬은 500m짜리 트랙 운동장을 한 바퀴 꽉 채워서 돌고도 계속해서 이어졌다. 지난 6월에 치뤄진 설악 그란폰도 이후로 역대급으로 사람들이 많이 본 듯 하다.
아쉽게도 지리산 그란폰도는 사진 찍을 겨를이 없어 출발하는 사람들의 행렬을 찍진 못했지만 아무튼 대단했던 것 같다. 필자는 맨 마지막 줄에서 여유롭게 출발하기로 했고, 출발 신호가 떨어지고도 20분 동안 출발하지 못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앞에서 출발하는 사람들로 인해 교통 체증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출발선을 통과했고, 약 160km에 이르는 거대한 여정의 막이 오르는 순간이었다.
지리산으로 가는 길목, 천마산에 오르다.
사실 대회를 참가할 때 코스를 자세히 숙지하는 것은 필수이다. 그렇지만 필자는 그저 지리산에 간다는 생각에 대회 코스를 잘 모르고 출발했다. 주위 사람들을 따라 열심히 달려가다 보니 갑자기 언덕이 시작되며 풍경이 건물과 아파트가 있는 도시의 풍경에서 완전한 산속 풍경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남원시에서 지리산으로 들어가기 전에 거쳐야 하는 산인 천마산이었다. 길이는 약 6km, 올라가야 하는 획득 고도는 500m 정도로 절대 쉬운 언덕길은 아니었지만 앞으로 나올 지리산의 험난한 길에 비하면 몸을 푸는 정도였다. 시작한지 얼마 안 되기도 했고, 또 대회에 나오면 평소보다 몸이 더 잘 움직여지는 느낌 때문에 별 어려움 없이 올라갔다. 그리고 예전 글을 보면 알겠지만 필자는 2020년에도, 2021년에도 지리산에 왔었기 때문에 천마산 언덕은 몇 번 와 봐서 아예 모르는 길은 아니었다.
큰 어려움 없이 천마산 정상에 오르면 긴 내리막이 이어진다. 내리막을 지나서 평지를 달리다 보면 표지판이 하나 보이는데 '전라남도 구례군'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알려주는 표지판이다. 지리산이 워낙 큰 산이라서 전라북도 남원시, 전라남도 구례군, 경상남도 함양군에 걸쳐져 있다. 무려 세 곳의 행정구역에 걸쳐 있는 산이라니, 새삼 지리산의 거대함이 느껴졌다. 구례군은 벚꽃 명소로 굉장히 유명하다. 벚꽃 나무가 가로수로 심어져 있는 벚꽃길이 있는데, 그 벚꽃길을 따라 달리다 보면 지리산의 3대 고개 중 하나인 '성삼재'로 향할 수 있다.
험준한 산맥 사이의 길, 성삼재
본격적으로 성삼재에 오르기 전 대회 개최측에서 준비한 물과 초코바 등을 먹는 장소에서 한 번 쉬었다.(이 장소를 '보급소'라고 한다.) 보급소에서 여러 가지 준비를 한 뒤 본격적으로 성삼재에 오르기 시작했다. 성삼재는 길이 약 15km, 올라가야 하는 획득 고도는 1000m 정도 된다. 자전거로 언덕길을 올라가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사실 고통도 이런 고통이 또 없다. 1시간이 넘는 시간을 주구장창 언덕만 올라가고 있으면 '여기서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래서 사람들은 필자에게 매일 묻는다. 도대체 왜 그런 고문을 스스로 하고 있는 거냐고. 필자도 곰곰히 생각해 봤는데, 여러 이유를 찾아봤다. 우선 언덕을 올라가는 시간에는 현실의 걱정을 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할 수가 없다. 살기 위해 저 너머로 뻗은 언덕길을 계속해서 올라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덕을 다 올랐을 때 보이는 멋진 경치와 시원한 바람, 그리고 해냈다는 짜릿한 성취감이 그간 겪었던 고통을 다 잊게 해준다. 다른 이유도 많겠지만 일단은 이정도가 아닐까 싶다. 거기에 따라오는 건강한 몸과 체력은 덤이다.
하늘과 맞닿아 있는 고개, 정령치
성삼재 정상에서 이것 저것 보급을 한 뒤 내리막을 내려오다 보면 삼거리가 나타난다. 대회 코스는 그 삼거리에서 왼쪽 방향으로 가야만 했다. 왼쪽으로 자전거 핸들을 틀자마자 앞에 거대한 절벽이 하나 나타났다. 그 절벽의 이름은 '정령치'였다. 역시 마찬가지로 지리산 3대 고개 중 하나이다. 물론 2020년에도 와 보고, 2022년 봄에도 와 봤던 길이지만 성삼재를 넘고 연이어 정령치로 향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 때 부터 뭔가 대회 코스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지만 이미 대회를 시작한 이상 끝을 봐야 하지 않겠는가. 거기서부터 이미 지친 표정으로 자전거를 끌고 가는 사람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그런 사람들을 앞질러 부지런히 페달을 밟았다. 왜냐하면 그란폰도는 '컷오프'라고 하여 시간 제한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정 시간까지 일정 장소에 가지 못하면 자동으로 탈락 처리가 된다. 허벅지가 터지기 직전까지 갔을 무렵 겨우 정령치 정상에 도착했다. 정령치는 해발 1200m의 고개로, 사진을 보고 싶으시다면 필자의 이전 글을 찾아보시라. 왜냐하면 도저히 사진 찍을 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령치에 있는 보급소에서 대충 바나나, 초코바 등을 입에 쑤셔넣은 뒤 부지런히 출발했다. 지리산 그란폰도에서 가장 힘든 코스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빨리 그 힘든 곳을 해치워버리고 싶었다. 그 힘든 곳의 이름은 바로
지리산 제1관문, 오도재
길이는 약 6km, 올라가야 하는 높이는 800m 정도로 성삼재와 정령치에 비해서는 획득고도가 높지 않지만 여기가 악명 높은 이유는 따로 있다. 도로를 잘못 만들었나 싶을 정도로 경사도가 높다. 자동차가 지나가면 자동차 브레이크 타는 매캐한 냄새가 날 정도이니 말 다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필자가 오도재를 오르며 마주한 풍경은 말 그대로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죽기 직전의 표정으로 힘겹게 자전거를 끌고 올라가는 사람, 자전거와 함께 길바닥에 장렬히 전사한 사람, 고통을 견디며 겨우겨우 페달을 밟는 사람 등등. 사람들은 언덕을 올라가며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왜 그런지 알 것 같았다. 말을 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 토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가 비가 온다고 했나? 비 대신 타는 듯한 햇살이 내리쬐어 안 그래도 죽을 것 같은 사람들을 더욱 말려죽이고 있었다. 올라가는 동안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고 오로지 생존에 대한 생각만 들었다. 자전거에서 내릴 수도 없었다. 내리는 순간 다시는 자전거에 오르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영겁의 시간이 지나고 보이지 않을 것만 같았던 정상이 저 멀리서 보이기 시작했다.
정상에는 저런 멋진 관문이 하나 세워져 있다. 그리고 저기 표지판이 하나 보이는데 저건 살벌한 경고문이다. 브레이크가 파열될 수 있으니 대충 조심하라는 소리다. 허리와 허벅지가 끊어질 듯이 아팠지만 대충 자전거를 길에 버리고 조금 누워있다보니 괜찮아졌다. 그리고 가장 힘든 것을 해냈다는 생각에 신바람이 나서 빨리 내려가기로 했다. 그랬으면 안됐는데... 아무튼, 내려가다 보면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100선에 포함된 지안재 내리막이 나온다. 물론 자전거를 타고 올라갈 땐 전혀 아름답지 않다. 경사도가 오도재와 똑같기 때문이다. 내리막이라서 정말 다행이었다.
마지막 복병, 팔령고개
필자는 그란폰도 코스를 제대로 보지 않았고, 그래서 당연히 오도재가 끝인 줄 알았다. 근데 갑자기 눈앞에 웬 언덕이 하나 나타났다. 길이는 6km. 당연히 언덕이 없을 줄 알았던 필자는 매우 당황했고 이미 오도재에서 몸과 마음이 모두 털려버린 뒤라 그렇게 높은 언덕은 아니었지만 정말 죽을 힘을 다해 올라갈 수 밖에 없었다. 마음 속으로 제발 끝나라고 기도를 300번도 더 넘게 했을 무렵 겨우 정상에 도착했지만, 아직도 가야 할 거리가 35km정도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 질리도록 자전거를 탔는데도 또 1시간 이상 자전거를 타야 하는 상황이었다. 힘이 전혀 남아있지 않아서 언덕이 아닌 평지를 달리는데도 힘이 빠져 자전거를 아무렇게나 내팽개치고 두 번 정도 길바닥에서 시체 놀이를 한 것 같다.
시체 놀이가 아니라 정말로 시체가 될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쯤 저 멀리 결승선이 보였다. 결승선을 통과했을 때의 그 기쁨이란 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이다. 아무리 고통받고 죽겠다고 말하고 사서 고생한다고 후회해도 대회에 계속 나가게 되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 때문이 아닌가.
글을 마치며.
세상을 살다 보면 많은 어려움을 맞닥뜨리게 된다. 어떤 어려움들은 너무나도 힘들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만큼 고통을 주기도 한다. 마치 필자가 오도재에서, 그리고 마지막 팔령고개에서 느꼈던 감정처럼 말이다. 그런데 뭐,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았던 대회는 끝났고 어찌저찌 완주까지 했다. 우리 사는 인생도 마찬가지 아닐까. 정말 크고 높은 언덕을 마주하더라도 힘겹게 페달을 밟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멋진 풍경과 시원한 바람이 우리를 반겨줄거라고 믿는다. 이상 이렇게 오늘도 자전거로 인생을 배우고 실천을 하지 못하는 김작가였다.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들이 큰 언덕 없이 평지만 씽씽 달릴 수 있기를. 그리고 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