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erimi Sep 10. 2021

내 영혼의 그림자


어제 딸아이가 미술학원에서 미술대회(우리은행에서 주최하는 우리미술대회) 참여 안내문을 받아왔다. 인터넷으로 개별 접수를 해야 하는데 아이는 꼭 참가하고 싶다고 한다. 아무래도 지난번에 미술학원에서 일괄적으로 접수해서 참여했던 국제친선학생미술대전에서 특상을 받았던 경험이 아이에게 굉장한 자신감을 선물해 준 것 같았다.


올해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한 딸아이는 미술학원, 피아노학원, 무용학원(발레와 벨리댄스)에 다니고 있다. 엄마인 내가 어릴 때 해보지 못한 것을 대리 만족하듯 시키지는 않으려고 마음을 다잡는데, 다행히도 아이는 스스로 즐거워하며 다양한 경험을 해보고 싶어 하는 편이다. 힘들면 꼭 이야기하라고 몇 번이나 일러두었지만 아이는 매번 웃는 얼굴로 재미있다고만 한다.


어릴 때의 나는 꽤 주눅이 들어있는 아이였다. 어린 내가 낯설게 겪을 수밖에 없었던 그 많은 상황들은 언제나 나한테만 낯설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무슨 말이냐 하면, 다른 아이들이 겪은 적이 있거나, 본 적이 있거나, 들은 적이 있는 상황들의 대부분이 나한테는 처음일 때가 많았다는 말이다. 다른 아이들이 엄마가 해준 적 있는 것, 아빠가 가르쳐준 적 있는 것, 학원에서 배운 적 있는 것이라는 식의 말을 할 때마다 나는 아마도 조금씩 의기소침해지다가 마침내는 습관처럼 주눅이 든 아이가 되었을 것이었다.


타고나길 원체 조용했다던 내가 6살이 되던 해에 갑자기 아버지가 사라졌다. 젊은 엄마는 6살 딸을 포대기로 업고서 남편의 친구들, 지인들을 찾아다니며 그의 흔적을 수소문하고 다녔지만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엄마는 남편이 남기고 사라진 빚을 갚기 위해, 그리고 남겨진 어린 두 남매와 시어머니까지 건사하기 위해 홀로 생업에 뛰어들었다. 그때부터 엄마는 새벽달이 뜰 때 집에서 나가, 저녁달이 뜰 때야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사람이었다.


8살에 학교에 입학한 뒤에는 매 학년 초마다 담임선생님들이 아버지의 행방에 대해 물었고, 내가 대답할 수 있는 말은, '잘 모르겠어요. 돈 벌러 갔대요.' 정도였다. 어린 내가 그 불확실함을 얼마나 싫어했냐면, 이후 초등학교 5학년 때 엄마가 아버지를 만나 법적으로 완전히 이혼하고 나자, 담임선생님께 '선생님 있잖아요, 우리 엄마 아빠는 이혼한 거래요!' 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고 여길 정도였다.


그런 어린 시절의 경험과 상관이 있는지 없는지 확신은 못하겠는데, 어쨌든 내가 아는 어린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것' 에 불안함을 느끼는 아이였다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남들과는 다르게 시작되는 그 어린 시절에서부터 차근차근 쌓여간 무수한 작은 경험들이 나에게 근원적인 '불안함' 과 '주눅' 을 내재하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라는 존재와 함께 나눌 수 있는 일상의 경험들, 감정의 교류들 뿐만 아니라 내게는 엄마와의 그것 또한 부재했거나 혹은 부족했다. 아버지는 없었고 엄마는 늘 바빴기 때문이다. 가정 형편까지 늘 빠듯하다 보니 내가 겪을 수 있는 온갖 경험의 폭은 아주 좁았고, 다른 아이들과의 격차는 자랄수록 더 커지기만 했다.


누구라도 '괜찮아. 잘했어. 잘할 수 있어.' 라고 말해주었다면 좋았겠지만, 늘 삶의 피로에 젖은 엄마의 굳은 얼굴을 보면서 내가 배운 감정은 낯선 것에 대해 '한 번 해보고 싶다' 는 의욕보단, '나는 잘 못해' 라는 '빠른 포기' 였던 것 같다.


학교에서는 의외로 아이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어떤 선생님이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내가 겪은 학교는 그랬다. 미술시간에도 그림을 잘 그리는 방법 같은 걸 가르쳐주진 않는다. 그저 그리라고 할 뿐이다. 그러면 아이들의 그림은 아주 차이가 크다. 미술학원에서 각종 기술을 배워온 아이들의 그림과 전혀 그런 것을 배워본 적이 없는 아이들의 그림. 음악시간에는 더 심하다. 악보를 읽기는커녕 음표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데 그걸 제대로 가르쳐주는 선생님이 없었다. 그렇게 자란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뜬금없이 피아노 연주 실기 시험을 쳐야 했을 때의 절망감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까짓 거 못하면 좀 어떠랴 만은, '불안함' 과 '주눅' 을 내재한 가난한 아이에게는 그런 작은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모든 경험은 차곡차곡 쌓인다. 물리적 경험은 기억에 쌓이고, 감정의 경험은 마음에 쌓인다.


몸이 자라면서 생각과 마음이 함께 자라난다고 해도, 이미 영혼에 쩍 달라붙은 경험의 그림자를 떼어내기란 쉽지 않다. 스스로에게 아무리 '괜찮다' 라고 말한다 해도, 오래 힘들었던 영혼은 쉽게 '그래, 괜찮아' 라 대답해주지는 않는다.


내 딸아이를 보면서 나는 아직도 이렇게 종종 어린 시절의 나 자신을 되새김질하곤 한다. 내가 가지지 못했던 것을 딸아이에게는 한껏 쥐어주고 싶은 마음, 내가 받지 못했던 사랑을 딸아이에게는 잔뜩 안겨주고 싶은 마음, 그리고 어느 정도 그럴 수 있음에 안도하는 마음까지 복잡하게 느끼면서 말이다.


떨쳐지지 않는 옛 기억들의 무거운 그림자에 끌어안긴 채 어두운 감정에 빠져 쉽게 허우적대는 내 영혼은 아직도 어린 시절의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구나, 하고 깨닫기도 한다.


또 그러다가도 즐겁게 웃는 딸아이의 얼굴을 보면서 내가 스스로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이 검은 연못이 고작 내 무릎께 밖에 오지 않는 곳일지도 모른다는 걸 깨닫고 다시 일어서기도 한다.


'낯선' 경험들이 아니라 '새로운' 경험들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면서 즐거워하는 딸아이의 웃는 얼굴은 외로운 내 영혼에 밝은 빛으로 비춰 들어온다.


오늘 저녁에는 딸아이가 참여하고 싶다는 미술대회에 제출할 그림을 어떤 주제로 그릴지에 대해 이야기 나눠봐야겠다. 기대감으로 가득 찬 아이의 웃음소리가 저녁 식탁에 번지면 어둡게 가라앉아 있던 내 영혼에도 다시금 밝은 빛의 색이 덧칠되어 갈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