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치 않은 울진의 맑은 날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었던 탓인지 울진에 갈 때면 흐리거나 바람이 세차게 불거나, 보통은 날씨가 좋지 않았다. 이리 청량하고 고요한 자태를 뽐내는 울진은 거진 처음이라 신이 난다. 가속 페달에서 발을 떼곤 느린 드라이브를 즐긴다. 창문을 여니 바다의 정직한 푸름이 더욱 활기를 띤다.
시골 바다의 좋은 점은 멈추고 싶은 곳 어디에서든 멈출 수 있다는 것이다. 주차장도 단속 카메라도 없는 조용한 도로. 바다가 아름답다면 어디에서나 머물러 갈 수 있다.
카메라를 챙겨 해변으로 향한다. 얼마 전 렌즈를 망가뜨려 수리를 맡겼는데 다행히 큰 문제가 없어서 금방 받을 수 있었다. 어디든 카메라를 목에 걸고 다니노라면 그곳은 어느새 특별한 장소로 탈바꿈한다. 바다와 하늘, 새와 파도를 찍는 셔터음이 경쾌하다.
두꺼운 조개껍데기를 발견한다. 이번 여행이 가끔 기억나도록 잡동사니에 추가할 요량이다. 모래를 훌훌 털어 주머니에 챙긴다.
부러진 나뭇가지가 도처에 있다. 쓸만한 가지 하나를 주워 꺾어선 젖은 백사장에 소망을 적어 본다. 아마도 머지않아 파도가 이를 쓱 훑어 품어줄 테다. 바다는 얼마나 많은 소망들을 제 속에 품고 있을는지.
여행 참 별 것 없다. 식사와 커피, 사진, 휴식. 일상과 다름없는 행동들이 단지 낯선 곳에서 행해진다는 이유로 특별해짐은 신기하다. 나그네의 마음가짐으로 살아간다면 일상도 여행이 될 수 있을까, 물음을 건넨다.
다시금 책 한 권 챙겨 커피숍으로 향한다. 이번에는 해변을 목전에 둔 전망 카페다. 3층이 안내된 표지판을 보곤 한참을 헤매었는데, 알고 보니 입구가 있는 카운터 층이 2층이었다. 1층으로 내려가려면 카운터에서 한 층 아래로 내려가야 하는 구조다. 대충 살펴 결론짓는 일이 참으로 어리석었다. 피식 웃고는 3층에 자리 잡는다.
전망 카페 치고는 전망이 탁 트이진 않는다. 무슨 연유에선지 통창 대신 격자 모양 창틀을 시공해 놓았다. 그래도 바다의 푸름이 곁에 있다는 사실에 신이 나서는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긴다. 장소를 옮기면 같은 책도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따듯한 청귤차와 함께 한 독서는 새콤달콤한 맛이었다.
아무래도 1층을 지나칠 수 없다. 카페를 나서기 전, 1층에서 이어지는 바닷가로 나가본다. 이곳은 해변이 아니라 작은 부두에 가깝다. 하늘엔 어느새 푸름 물러나고 붉음이 번진다. 아래에서부터 따뜻해지는 동해 바다의 노을은 언제이고 아름답다. 구름 한 점 없이 투명한 바다 노을을 본 게 언제였는지. 잔잔한 바람과 촉촉한 공기가 오늘 유난히 감사하다. 색 많아진 하늘과, 하늘 비쳐 오묘해진 바다를 함께 카메라에 담는다. 저마다 생각이 많을 사람들에게 차분함을 선물할 아름다운 자연의 색이다.
울진에는 강아지가 많다. 자동차로 향하는 중에도 줄에 묶인 개 한 마리를 발견한다. 선한 눈빛이 바다를 닮았다. 사람을 반기는 눈이 설레듯 반짝인다. 누군가는 미물로 느낄 이 작디작은 동물들도 조건 없는 사랑을 한다. 우리들은 왜 서로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인지. 반성한다.
울진에서 귀가하는 길은 언제나 짙다. 저릿한 보랏빛이 운전대 넘어 하늘에 넘실댄다. 새도 구름도 존재감을 버리고 그저 하늘에 귀속되는 시간이다. 그간 아쉬웠던 마음이라거나 털어놓지 못했던 것들을 이 하늘 아래에서라면 시원하게 게워낼 수 있을 것만 같다. 자연이 자연을 삼키는 이 황홀한 시간은 참 짧게도 끝이 난다.
가로등도 없이 캄캄한 국도를 지나노라면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산 넘어 언뜻 보이는 별들이 반갑다. 귀가하는 길목에는 '산타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도로를 오가며 몇 년 전부터 봐왔던 산타마을의 전경이 오늘은 왠지 눈길을 사로잡는다. 아마도 성탄절을 앞두어서인가 보다. 성탄절의 불빛은 누구나 어린아이로 만든다.
잠깐 차를 돌려 산타마을을 구경해 보기로 한다. 어두웠던 길목을 지나자 자동차며 사람들이 보인다. 역시 아이와 함께 온 가족들이 많다. 마을은 조형물이며 부스들이며 나름대로 이것저것 꾸며놓았다. 밤이라서 불 꺼진 곳이 많은데 낮에는 꽤나 활기를 띠었을 것 같다. 나무색과 노란 전구로 꾸며진 마을에서, 잠시간 성탄의 분위기를 만끽한다.
오늘의 울진은 참 포근했다. 살아있는 것들도 죽어있는 것들도 많은 위로를 건넸다. 아마 한동안은 이 기억을 동력 삼아 조금 들뜬 일상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며칠 남지 않은 2023년의 연말. 따뜻한 말과 표정들이 모두에게 머물렀으면. 도시의 거리에도, 시골의 골목들에도 오늘 내 느낀 자연의 위로가 가득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