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시작하며 멋진 계획들을 세우셨는지. 나의 새해 계획 중 하나는 좋은 상가를 찾기 위해 부동산 임장을 시작하는 일이다. 제한된 예산 내 합리적인 상가을 임대해 사업을 시작해야 하기에 어쩌면 조금 이른 감이 있더라도 부동산을 다녀보기로. 일찍부터 다녀보면 뜻밖의 좋은 상가를 찾게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부동산 보는 눈이 길러질 것이라 생각하며 세운 계획이었다.
부동산은 내게 다소 무서운 곳이었다. 직장을 얻어 자취방을 구하기 위해 딱 한 번 가본 것을 제외하면 방문한 적도 없을뿐더러 가진 바 배경지식도 부족해 이리저리 휘둘리다 나올까 걱정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여기저기를 다니고 나서 그냥 '잘 봤어요'하고 나온다는 것도 괜히 미안스러울까봐, 그런 순진한 생각도 있었다.
그런 이유들로 처음에는 부동산에 들어가질 못했다. 길을 가다가 임대 현수막이 붙은 상가가 보이면 전화로 상담해 보는 정도. 처음엔 내게 그 정도 액션도 용기가 필요했다. 어느 정도 평수 대비 시세에 대한 판단이 서고는 그제야 부동산에 한 번 가봐야겠다는 결심을 할 수 있었다. 걱정도, 겁도 많은 성격에 스스로 위로를 건네 본다.
염두에 둔 동네 후보지는 따로 있지만 일단 집과 가까운 동네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가까워서 다니기 편하기도 하고, 아무래도 아는 동네라 무언가 더 많이 눈에 포착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공부한다는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목적지는 집에서 차량으로 10분 정도 떨어진 중심 상가였다.
이전에 프랜차이즈 카페가 운영되다 한 일 년 전부터 비어있는 상가가 한 채 있다. 원하던 넓이와 입지라기엔 조금 애매하지만 부동산이 바로 근처였기 때문에 상담받아 보기로 한다.
처음 열어보는 부동산 문은 무거웠다. 쭈뼛쭈뼛, 초보 티를 흘리며 들어서니 실장님이라는 아주머니께서 반갑게 맞아주신다. 녹차 한 잔을 대접받고는 상담을 시작했다.
"바로 옆에 있는 카페 자리 상가 임대를 알아보려고 왔는데요."
그때부터 보증금이나 월세, 권리금 같은 이야기가 오간다. 월세는 생각보다 비쌌다. 평수도 내가 원했던 평수보다는 작았지만 일단 한 번 들어가 직접 살펴보기로 했다. 도어락 없이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하는 곳이라는 점 때문에 열쇠를 가지고 있는 상가 주인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한 30분쯤 걸린다고 했다. 기다리기도 안 기다리기도 애매한 시간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기왕 용기 내어 들어온 부동산이니 상가에 들어가 보기는 하자고 생각되어 기다리기로 한다.
기다리며 딱히 할 건 없다. 녹차나 호록 호록 마시고 있는데 실장님께서 넉살 좋게 이런저런 이야기나 질문을 해주신다. 교양 갖춘 동네 아줌마 같았다고 할까, 풍기는 기운이 과하지 않고 선하신 분이었다. 한두 마디 섞던 것을 시작으로 개인적인 이야기까지 오가기 시작했다. 실장님이 공인중개사무실을 차리게 된 스토리나 함께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는 사장님(남편)의 삼성맨 시절, 명퇴 후 제과점을 십여 년 운영했던 경험들. 흥미가 동하는 이야기라 재미있게 들었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내 이야기도 하게 되었다.
"저도 교직에 몇 년 있다가 창업에 꿈이 생겨 그만두게 되었어요."라고 말했더니 돌아온 대답이 인상적이다.
"어쩜, 너무 잘하셨어요. 버티고 있으면 결국 번개탄이나 사러 가는 거예요."
이것 참, 대놓고 웃을 순 없는 말이지만 교사라면 공감 섞어 씁쓸한 미소를 지으리라.
왠지 일반적인 분들보다 더 공감하시는 것 같더라니 당신 자녀도 중학교 교사라고 한다. 자녀분도 늘상 '나는 승진이고 자시고 관심 없고 언제든 그만둘 수 있으니 놀라지 마라'고 으름장을 놓고 산다고. 낯익은 말에 피식한다.
내 마음에 펀치를 날린 것은 사실 실장님의 뒷말이 아니라 앞말이다. '어쩜, 너무 잘하셨어요', 이 말.
내가 교사를 그만둔다고 했을 때의 주변 반응은 다양했다. '부럽다', '괜찮겠냐', '잘됐으면 좋겠다', '응원한다', '재미있겠다', '그러다 후회한다' 등등. 힘이 되는 말도 힘이 빠지는 말도 있었다. 그런데 '잘했다'는 말은 처음이었다. '잘하셨어요'라니, 괜스레 마음 찡한 울림이 생긴다. 생면부지의 남에게서야 처음으로 '교사를 그만두길 잘했어'라는 말을 들어보다니. 오래간 기억에 남을 감동이 정말 뜻밖에도 찾아왔다. 선물 같았다.
상가 주인이 도착해 들어가 본 상가는 예상대로 내 기준에 합격점을 받진 못했다. 그래도 이 날 하루는 처음으로 부동산에 가본 날일뿐 아니라 예상 밖의 위로를 받은 하루로 기억될 것 같아 따뜻한 마음이 일었다. 부동산에 들어가 상담받는 것에 대한 마음의 허들이 낮아졌음은 물론이다.
열심히 발품 팔아 꼭 좋은 상가를 임대할 수 있다면 좋겠다. 그 시작점에서 좋은 사람 만나 힘을 받고 시작함을 감사하며, 나도 나를 거쳐가는 모든 이에게 따뜻함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