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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 May 14. 2018

부산의 공간들

함께 떠난 여행의 기록

나는 '해야겠다' 보다는 '가야겠다'란 생각이 들 때, 추진력이 강해지는 편이다. 아무래도 좋은 공간을 경험하고 싶은 니즈가 커지면서 추진력도 배가 된 듯하다.


작년부터 가고 싶었던 아난티코브의 이터널 저니에서 재즈 피아니스트와 함께하는 심야책방 소식을 들었을 때 나의 추진력은 200%가 되었고 부산여행은 그렇게 갑자기 결정되었다. 사월이 유독 힘들어서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친구와, 고향이 부산인 친구. 이렇게 셋이서 함께.


사실 심야책방만 보고 결정한 여행이었기에, 어떤 곳을 가야 좋을지 고민이었다. 몇 년만에 가는 부산인 만큼 갈만한 곳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광안리? 해운대? 하지만 분명한 건 유명한 관광지보단 취향이 담긴 공간을 탐험하고 싶다는 것. 부산에서 가고 싶은 곳들은 생각보다 거리가 있었다. 면허는 있지만 종점은 하늘이라는 친구의 말에, 뚜벅이가 갈 수 있을만한 코스로 정리했다.


뚜벅이들의 부산여행 지도, 친구가 귀엽게 손수 그려왔다.


첫 번째 코스

초량 845의 경치,

그리고 초량 1941의 벚꽃 우유


우리의 첫 목적지는 <초량 845>. 부산역에서 출발할 경우, 택시를 타는 것이 좋다는 조언에 따랐다. 기사 아저씨는 가까운 초량을 왜 택시타고 가냐고 하셨지만, 매우 가파른 언덕길을 몇 번 올라가자 아저씨도 수긍한 눈치였다. 오르고 올라 도착한 이 곳. 자, 계단을 따라 위로 올라가 보자.

이 계단을 따라 위로 올라가면, 놀라운 풍경이 펼쳐지지!


'거기 대체 뭐가 있는데요?'라고 묻던 택시 아저씨는 이 곳의 풍경을 보셨을까? 넓은 창에 확 트인 전경. 고향이 부산인 친구도 이런 곳은 처음 왔다며, 부모님도 나중에 같이 오고 싶다고 했다. 옅은 미소를 띠며 평소에 잘 찍지 않는다던 음식 사진을 찍는 친구의 모습을 보니 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량에서는 팝업 전시를 할 수 있는 공간도 제공해준다. 이 날의 전시는 <미슬관>. 자신의 일상을 꾸준히 기록하는 작가님을 보면서, 역시 모든 것의 힘은 '꾸준함'이라며,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담다 보면 자연스레 자신의 색깔이 선명하게 드러나게 되니까.


<초량 845>를 나와 작은 언덕을 오르면 우유만 파는 카페로 유명한 <초량 1941>가 보인다. 친구는 기간 한정으로 판매하는 벚꽃 우유를 샀는데, 한 모금 마셔보니 어디서도 맛보지 못한 달큼한 맛이다. 벚꽃이 이런 맛이구나. 신기하게 맛있다(!)



두 번째 코스

덕화 명란의 쇼룸

<there the house> 푸드라이프 스튜디오


초량을 떠나기 전, 이목을 끄는 곳이 있었다. 많은 이들이 <초량 845>와 <초량 1941>만 들리는 듯했지만, 내 안의 호기심 세포는 저 건너편 건물의 새하얀 간판을 유심히 보았고 저곳도 한 번 가보고 싶다며 우리를 이끌었다. 바로 그 공간은 2대째 운영되고 있는 덕화 명란의 쇼룸이었다. 2층에는 푸드 스튜디오가 있어서 미리 사전예약을 하면 명란을 이용한 셀프요리까지 할 수 있다. 재료도 준비해주고 가격도 합리적이다. 미리 알았다면 점심을 여기서 먹어도 좋았을 텐데. (참고)


계속 머무르고 싶었던 곳, 우리 집이면 좋겠다..


무엇보다 이 곳은 공간이 주는 매력이 컸다. 모든 요소가 섬세하게 설계되어 만들어진 티가 난다. 의도한건지 벽에 쓰인 색깔은 마치 명란색처럼 보였는데, 색이 참 곱더라. 입구는 돌과 파란 타일, 나무 등 다양한 소재가 어울려졌고, 문을 열고 들어서면 부드러운 카펫 위에 놓인 하얀 슬리퍼을 신는다. 자연의 풍경을 가득 담은 커다란 창과 따뜻한 빛. 그야말로 계속 머무르고 싶게 하는 아늑한 공간이었다. 사방이 나무 재질로 되어있어서 처음엔 눈치채지 못했는데, 커다란 에어컨을 나무 창살로 가린 디테일과 센스도 놀라웠다. 이 곳에서 소중한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창밖의 풍경을 보면서 시간을 보내면 얼마나 멋질까. 부산에 온다면 다시 오고 싶은 공간이다.



세 번째 코스

부산 168계단 - 브라운핸즈 백제


'부산역에서 초량 갈 때는 택시, 내려올 때는 이바구니 계단 또는 모노레일' 멘트를 기억하길 잘했다. 엄청난 높이의 계단을 이용할 엄두가 안 난다면 빨간 모노레일을 타면 되는데, 내려가는 이는 많지 않았으나 아래로 도착하니 올라가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모노레일을 타고 내려오는 중간에 <다락방 장난감 박스>라는 가게를 발견했는데 재미난 물건이 많아 보였다. 다만 걸어가야만 볼 수 있는 곳이니 참고하길. (계단길에 중간중간 쉼터나 갈만한 곳이 있는 것 같았지만 갈 길이 먼 우린 다음 기회에..)



초량을 떠나기 전, 부산 구 백제병원 건물을 개조해서 만든 <브라운 핸드 백제>에 들렸다. 이 곳은 부산에서 최초로 건립된 개인 종합 병원 건물로, 1920년대 종합 병원의 형식을 보여주는 데 의의가 있다고 한다. (참고) 부산역과 매우 가까우니, 집에 가기 전에 잠깐 들려도 좋겠다. 이 곳에서 좋았던건 부산에서 활동하는 이지은 작가님을 알게 되었단 점이다. 그녀가 그린 그림에는 강아지가 늘 함께 있는데 그 모습이 정말인지 사랑스럽다. (6월에 서울에서 개인전을 한다고 하니 궁금하다면 그녀의 인스타​를 참고하길!)



네 번째 코스

아난티 코브의 <워터하우스>, <이터널 저니>


우리가 부산에 온 이유, 아난티 코브는 부산역에서 꽤나 멀리 있다. 기장이라는 조용한 동네에 있는데,  동해선의 오시리아 역에 내리면 셔틀버스가 있으니 뚜벅이들도 갈만했다. 다만 한 시간 간격으로 있으니 시간을 잘 맞춰서 가야 한다. (시간표 보기)


아난티 코브는 힐튼 부산과 같이 있는데, 두 곳 모두 볼 게 많다. 힐튼 호텔에 머물지 않더라도 3층과 10층은 한 번 가보길. 이 곳은 특이하게 체크인을 10층에서 하는데 멋스러운 맥퀸즈 라운지맥퀸즈바가 있다.


여행의 시작을 느끼게 하는 통로


심야 책방에 가기 전에 우리는 온천 수영장인 <워터하우스>에 가서 피로를 풀기로 했다. 밤의 야외 수영장은 다들 처음이었는데 바닷바람이 세차게 불어도 따뜻한 온천물 덕분에 춥지 않았다. 어느덧 나무 위에는 하얗고 동그란 보름달이 떴고,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과 노란빛으로 선명해지는 달을 바라보던 순간은 오래 기억될 것 같다. 참고로 워터하우스는 숙박하지 않아도 누구나 이용 가능하다. 야간권이 좀 더 저렴하며 아난티 앱을 깔면 두 명까지 30% 할인해준다. 숙박하면 무료로 이용할 수도 있다던데 그만큼 숙박료가 비싸더라(...)

함께 달을 보며 얘기하던 순간은 오래 기억될 것 같아.


어느덧 이터널 저니에 갈 시간. 평소에는 저녁 9시에 문을 닫지만, 심야책방은 그 때부터 시작한다. 송준서 재즈 피아니스트가 고른 책 속의 문장을 소개하고, 그와 연관되는 곡을 연주하는 방식이었다. 유머러스하셨던 송준서 님은 새벽 6시까지 연주해야 하는 줄 알고 200곡을 준비해오셨다고 했다. (예정된 시간은 한 시간이었다고.) 아쉽지만 열 두시가 되기 전에 연주는 끝났고, 해가 뜰 때까지 마음껏 책을 읽는 시간이 되었다. 넓디넓은 공간에 어떤 구성으로 어떤 책들이 있는지 구경하면서 읽을 책을 고르고, 읽고, 깜빡 졸고... 안 되겠다. 깔끔하게 새벽 세시까지만 읽고 가는 걸로.


재즈 피아노 연주를 듣고, 진득하게 책을 읽고 싶다는 마음으로 이곳까지 왔는데, 오히려 부산의 멋진 공간들이 기억에 남는다. 어쩌다 나의 급 제안을 따라와 준 이들에게 고마웠던 여행이자 모든 순간이 만족스러웠던 여행. 부산여행 1일 차 코스는 아래에 정리해두었다. 부산에 가게 된다면 한 번 가보시길!


부산 여행 1일 차는 <함께하는 여행>이었다면, 2일 차는 <혼자의 여행>이었다. 그건 다음 글에 이어서!


[부산여행 1일 차 코스/시간]

- 부산역 도착(12:30)

- 초량 845에서 점심, 초량 1941에서 후식, Therethehouse와 팝업 전시(1:30-3:00)

- 168계단과 모노레일

- 브라운핸즈 백제 카페(16:00)

- 아난티코브 셔틀버스 탑승(17:30)

- 워터하우스 (18:00 - 21:00)

- 이터널 저니에서 심야책방 (22:00 - 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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