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나를 잘 모르겠어요.
핸드폰에 저장된 사람 수. 999명.
당시 핸드폰에 저장될 수 있는 사람의 수는 999명이 전부였다.
고로, 999명은 내가 가지고 있는 연락처의 전부가 아니라 핸드폰이 가지고 있는 용량의 최대치였다.
그 덕에 핸드폰과 함께 작은 아날로그식 수첩을 항상 들고 다녀야 했더랬다. 핸드폰에 저장되지 못한 이들의 번호를 위해.
최근 만나는 사람들은, 요즘 유행하는 MBTI 검사 결과가 E(외향형 인간) 일 거라며 확신을 한다.
그런데 아시는가.
나는 E(외향형)가 아닌 I(내향형 인간)다.
내가 I라고 하면 회사사람들은 한결같이
말도 안 돼. 그거 다시 해봐.
잘 못 나온 거 같아.
하며 눈을 동그랗게 뜨곤 한다.
그러나 그건 나를 몰라서다.
어릴 적 엄마와 가끔 가던 백화점 지하에는 햄버거 가게가 있었다. 당시의 햄버거는 우리 형편에 귀한 음식이었기 때문에 어쩌다 일이 있어 백화점에 가게 되는 날이면 나와 동생은 햄버거를 사달라 조르기 일쑤였다. 조른다고 언제나 햄버거가 우리의 것은 아니었으나, 아주 가끔 엄마는 선심 쓰듯 햄버거를 사주셨다. 거의 연례행사 같은 일이었기에 우리에게는 너무도 신나는 일이었는데, 어느 날은 엄마가 우리에게 주문을 시켰다.
두둥. 결론이 예상이 되시는가.
그렇다. 우리는 햄버거를 먹지 못하고 집에 왔다.
당시 나는 초등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이고 엄마는 그걸 기념해서 사주신다고 했던 듯하다. 다만 조건은
너희가 주문할 것
하고많은 조건 중 내성적이고 소심한 우리 둘에게 미션 임파서블한 조건이 내려졌고, 결국 우리는 엄마가 내건 조건을 수행하지 못해 햄버거는커녕 사이드 메뉴조차 입에 넣지 못하고 집에 왔다. 엄마는 그토록 먹고 싶어 하던 햄버거를 주문조차 못해서 못 먹냐며 한바탕 잔소리 열전을 펼치셨다.
중학교에 입학하고는 반장선거가 있었다. 소심하고, 뒤에서는 시끄러워도 앞에서는 조용했던 나는 끌려가듯 선생님 손에 이끌려 앞에 나갔으나 무릎이 덜덜 떨렸다. 그 무릎이 아이들에게 보일 정도였는지, 아니면 혼자만의 느낌이었는지 아직도 궁금하다.
다행히 앞에서는 조용해도 뒤에서는 시끄러웠던 성격 덕에 친구는 꽤 많은 편이었는데, 여러 명의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 덕에 내향형이었지만 친구는 점점 늘었다.
중국에서 어학연수를 하던 시절, 사스로 인해 급박한 송별회가 열렸다. 당시 나는 4-1 반의 반장으로 옆반인 4-2 반의 반장과 한 달에 한번 회식을 주도하는 엄청난 기획력을 자랑하고 있었다(보통 회식은 한 학기에 한두 번 정도였다). 술 좋아하고 사람 좋아하는 성향이 같았던 4-1 반의 반장과 4-2 반의 반장의 기획력이 하늘까지 승천할 기세로 올라갔고, 우리는 매달 맛집을 찾아 약 40여 명의 회식자리를 예약하고는 했었다.
그 덕인지 나를 위한 송별회 주최자는 4-2 반의 반장과 그의 일본인 친구들이었다. 일본인 친구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일본음식 맛집인 오꼬노미야끼 집을 예약해 송별회를 열어주었고, 참석자가 무려 90명이 넘었었다(모두 날 보러 왔다기보다 그냥 술 먹고 노는 자리가 좋아서 온 거 같다). 술 먹고 취한 친구들이 몇몇 생긴 덕에 주최자 친구들은 자신들의 주머니를 털어 소위 땜빵을 해야 했는데, 송별회 당사자인 내 돈은 극구 사양했다.
영국에서의 공부를 마치는 시기는 나의 생일 언저리였다. 생일파티 겸 나의 송별회를 겸한 파티는 내가 묶고 있던 기숙사에서 열렸고,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 일본 스페인 루마니아 영국 브라질 등등 국적불문한 친구들이 60여 명이나 방문했다. 이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영국인 친구는 일 년 산 내가 본인보다 친구가 많다며 부러워했다.
극소심함을 거쳐 극활발함까지 두루 가보았던거 같다. 극활발함 당시의 내가 지금의 나도 신기하다. 당시 주위 사람들은 그많은 사람들을 매일같이 만나는게 피곤하지 않냐고 물어오기도 했었는데, 그때에는 그게 꽤나 재미있었던거 같다.
지금의 나는 꼭 필요한 회식이 아니면 잘 가지 않는다. 사적인 모임도 몇 달에 한 번이 전부이며, 꼭 필요한 회식이라 하더라도 직원들분의 양해를 구할 수 있을 경우 아이를 데리고 가곤 했다.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마땅치 않아서이기도 했지만 아마 내가 그만큼 회식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어서이기도 한거 같다.
회사일 관련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만나거나 연락하는 사람도 많지 않다. 나이를 먹고 생활이 바빠서 대부분 그렇게 변하겠지만, 휴직 삼 년 차인 경우에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휴직을 한다고 여유가 많이 생긴 건 아니지만, 그래도 장 보러 가는 길에 전화를 한다거나 아이를 데리러 가는 길에 연락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연락하는 사람은 크게 늘지 않았다.
가끔은 나도 내가 궁금하다.
어느 게 진짜 나였는지.
어쩌면 사회에 뿌리내리고 살기 위한 페르소나에서
천천히 나만의 페르소나를 찾아가고 있는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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