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도둑이다. 일말의 양심도 없이, 낮이고 밤이고 훔쳐댄다.
나는 와이파이 도둑이다. 쓰고보니 생각보다 더 유치하지만,
이것이야말로 현대인의 표상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수치심은 넣어두기로 한다.
와이파이 도둑과 현대인의 표상이 무슨 연관이 있냐고?
나는 현대인이고, 10원 한 장도 내지 않고 공짜 와이파이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이게 다 나의 게으름 덕이다. 나는 평소처럼 게을렀고, 그럼에도 노트북은 해야 했기에
별 생각없이 평소처럼 노트북을 열었고, 그런데 별안간 따란~ 개방형 와이파이가 떡하니
연결되었다. 복 받으세요. ‘보안’과 ‘개방’이 적힌 창을 한참 쳐다봤다.
보안은 타노스의 앙 다문 입술 같았고 개방은...개방은...참으로 사랑스러웠다.
오늘 밤은 정말로 써야만 하는 것이 있다.
거의 매일 밤이, 적어도 일주일에 3일 밤은 그러하지만,
그 날이 오늘이다. 대본을 써야한다.
‘12시가 마감이라면, 난 아마 마감 3시간 전부터 똥줄이 타 들어갈 거야^^’
이 와중에도 어린왕자의 명대사를 패러디하는 HUMOR를 발휘했지만 진 기분이다.
나는 ‘마감형 인간‘으로 기본 세팅값이 맞춰져 지구에 보내졌다.
‘미리미리형 인간’이나 ‘빨리빨리형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난 지금 곱절은 행복하고
날씬한 부자겠지... 각설하고
나는 지독한 마감형 인간이다. 스스로에게 시간의 공증을 철저하게 받은 뼈 아픈 팩트다.
마감형 인간에게도 그만의 룰이 있고 상식이 있지만, 구차하게 들릴 게 뻔하므로 삼킨다.
지금의 단계는 양호한 편이다.
새벽 4시가 가까워져 오지만 별로 졸립지 않고,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로
생각을 쏟아내는 일을 하고 있다. 기특한 새벽이다.
오늘 ‘마감형 인간’의 초기 증상 단계엔 직방에 들어가 이사할만한 집을 찾아봤다.
내 돈을 잔뜩 주고, 결코 내가 가질 수도 없는 집을 ‘잠시’ 빌려쓰는 일.
바로 ‘전세방을 구하는 일’은 정말로 말도 안 되게 고단하고, 비현실적이다.
이사를 해야지...생각만 세 달, 본격적으로 찾아본 지 한 달,
직방을 보면서 한숨 쉰 건 131번. 그런데 오늘도 한숨으로 끝이 났다.
아무래도 판타지인 것 같다. 이건 꿈이야 그렇지?
노트북을 켠다.
다음은 유튜브다. ‘알 수 없는 알고리즘의 피해’는 나도 매일 입는다.
‘온앤오프’ 프로그램 짤이 유독 많이 나온다. 이슬아 작가가 10초 안에 출근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타닥 타닥 계단을 내려오니 멋드러진 서재가 나온다.
판타지라고 끝을 내고 희망을 찾아 온 사람한테 다소 가혹한 행보이지 않은가, 세상?
그녀는 나보다 3살이 어리고, 나보다 3배는 큰 집에 사는 것 같다(1층 한정)
그것만으로도 허파가 시린데, 시청 소감은 아직 안 끝났다.
용기와 패기. 자신을 믿는 자긍심이 나보다 30배는 많다. 그렇게 보인다. 샘나게.
알고리즘이 내 맘을 쥐고 흔드는 동안 손가락은 빠르게 YES 24로 이동한다.
당장 대본을 넘겨야 하는 게 급선무지만, 나는 한가해지면 책을 읽을 것이다.
고로 결제한다. 이슬아의 첫 산문집을 샀다.
빠른 터치 동작으로 이슬아 작가의 재산에 일조하고서 나는 다짐한다.
일간 이슬아를 시작할 수 있었던, 용기가 담긴 문장을 찾아내겠노라고.
그 힘이 어디에 있는지 내 몸으로 꼭 느끼겠노라고.
말로만 글 쓰는 애는, 진짜로 글을 쓴 애의 해맑은 영상을 보고 회개하기도 한다.
지금이 그렇고, 앞으로 책을 넘길 때마다 그러하길 바란다.
이제 글을 마무리 하자.
성실히 일하고 틈틈이 읽고 틈틈이 쓰는 것. 그것이 남아야 한다 오늘.
자 이제, 다음 수순은 잠들기. 내일의 일은 내일의 나에게 맡겨두고 잠을 자자.
진짜 ‘마감 나잇‘은 내일이니까. 후후
이 터무니 없는 글도 ‘마감형 인간’의 놀이사전 231개 중 하나였다는
소름 돋는 이야기로 마무리. 우리는 내일 해골같은 모습으로 다시 만나는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