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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명 Jul 10. 2020

로이 부캐넌

손가락은 열 개, 기타 줄은 여섯 개

손가락은 열 개, 기타 줄은 여섯 개. 


장정일이 <로이부캐넌을 추모함>이라는 시에서 그랬다. 그때는 장정일도 젊고 나도 젊었다. 세상은 복잡하고 정신없고 부조리한 점도 많았지만, 그래도 조금 노력하면 명쾌할 수 있었다. 여섯 개의 기타 줄과 열 개의 손가락이면 거의 대부분을 설명할 수 있을 만큼. 나도 열 개의 손가락과 한두 권의 노트면 충분했다. 그 밖의 다른 건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주머니에 동전이 있으면 버스를 탈까, 핫도그를 사먹을까 고민했다. 돈도 없고 선택의 여지도 별로 없었다. 하나둘셋넷 쓸데없이 주머니만 많아! 그렇게 생각했다. 내 기억에 꽤 오랫동안 핫도그 값과 시내버스비는 늘 같았기에 질문도 정해져 있었다. 핫도그를 먹으면서 걸어갈래? 버스를 타고 갈래? 간단하고 대답하기도 쉬운 세계였던 것 같다. 물론 다리가 아프거나 배가 고프거나 선택해야 했지만.  

핫도그 파는 가게는 많았는데, 내가 찾는 곳은 레코드 가게 앞 핫도그 집이었다. 시내에서 드물게 메탈 넘버를 가끔씩 틀어주는 곳이었다. 핫도그를 먹으면서 본조비, 머틀리 크루, 오지오스 본, 건즈앤 로지스, 랜디 로즈, 그리고 메탈리카를 끝도 없이 들었다. 아무려나. 그런데 어쩌다가 내가 이렇게 느려터지고 힘 빠지는 로이 부캐넌을 좋아하게 되었을까. 이유를 거슬러 올라가면 휴거가 왔기 때문이다. 레코드 집 사장님이 어느날 다미선교회의 열혈 신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원래 그는 랜디 로즈를 워낙에 좋아해서 그의 기일이면 늘 오지오스본이며, 랜디 로즈의 연주를 틀어주곤 했는데 3월 19일이 되었는데도 스피커에서는 밋밋한 가요만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장님, 오늘은 랜디 로즈 안틀어주세요?

안틀어. 


안튼다고 해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궁금하지 않았으니까. 아마 애도 기간이 이제 끝났나보다 그렇게 생각했다. 절하고, 향피우고, 육개장 먹고 나면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하니까. 정해진 순서를 잘 따르면 슬픔이나 애도도 순조롭게 진행되는 법이니까. 그렇게 가만히 있었더니 사장님이 외려 답답했던 모양이다. 


나는 이제 메탈 안들어. 

안들으시는구나.

나는 올 가을에 떠나. 가게도 접을거야. 

왜요?

그런 게 있어.


그러고서는 그는 조잡하게 인쇄된 교회 주보 같은 걸 건넸다. 그는 일종의 인증을 받아서 올 가을에 천국에 갈 예정이라는 것이다. 나는 일단 잘 됐다고 축하를 해주었다. 랜디 로즈도, 메탈리카에도 더 이상 애착이 없는 레코드 가게 사장을 어디에 쓰겠는가. 그런데 이야기를 듣고 보니 가게 한 켠에 레코드들이 파격 할인가에 줄줄이 나와 있었다. 휴거 전에 가게를 정리하려고 레코드를 싸게 내놓았다는 설명이다. 거의 90% 세일하는 레코드도 즐비했다. 신나는 일이었다. 


이거 다 세일하는 거에요? 

어. 맘에 드는 거 있으면 골라봐. 


근데 이 골 때리는 아저씨는 자기가 좋아라하는 메탈이나 록 넘버는 세일 품목에 넣질 않았다. 째째하잖아! 어째 아직 이승에 미련이 많이 남은 모양이다. 자기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레코드만 싸게 팔다니. 천국에 가려면 대담해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아저씨, 근데 그럼 저 하나만 추천해주세요. 

로이 부캐넌 들어봤냐?

아뇨. 

그럼 이거 사가지고 가. 좋아. 


좋았다. 

집에 와서 로이 부캐넌을 턴테이블에 얹고 듣기 시작했는데 정말 좋았다. 핫도그 한 개 값에 사서 더 뿌듯했다. 로이 부캐넌을 듣고 있으면 내가 이 세상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외로운 존재라는 생각이 드는데, 신기하게도 동시에 그런 감정을 누군가 가만히 위로해주는 느낌을 받는다. 외롭다고 해서 다 슬프기만 한 것은 아니다. 혼자이긴 한데 바쁘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고, 때로는 재기발랄하기도 하고 할 거 다 한다. 


그해 가을 휴거가 한반도를 휩쓸고 지나가고 난 뒤 레코드 가게는 문을 닫았고, 나도 자리를 옮겨 서점 근처에 있는 싸고 맛있는 핫도그 집을 찾았다. 이런저런 책을 들여다 보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아마 휴거가 없었다면, 그래서 레코드 가게가 문을 닫지 않았더라면 나는 기타리스트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기타리스트로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 조금 다른 테크를 타다가 어느날 정신차려보니 거대 연예기획사 사장이 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여기까지 생각하니까 조금 씁쓸하다. 


휴거가 될 거라고 철썩같이 믿었던 아저씨는 천국에 들지 못하는 나를 위해 로이 부캐넌을 추천했던 것 같다. 사실 뭐 내가 천국에 가지 못한다면, 그건 학생 때 국영수 중심으로 공부를 안한 이유가 크다고 생각하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로이 부캐넌은 천국에 가지 못하고 남아 있는 사람들을 가만히 위로하는 음악 같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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