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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명 Sep 04. 2019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

- 대화의 애티튜드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

한 계절에 한 번씩 두통이 오고 두 계절에 한 번씩 이를 뽑는 것

텅 빈 미소와 다정한 주름이 상관하는 내 인생!

- 이근화 시집 <우리들의 진화>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 中


척추 측만이 있어서 오후쯤 되면 바지가 왼쪽으로 조금 돌아가 있고, 이마가 스멀스멀 넓어지고 있지만, 아직까지 견딜만하다. 당분간 매주 화요일은 <왕좌의 게임>을 볼 수 있고, 아껴서 읽고 있는 코맥 매카시 소설이 아직 50페이지나 남았다. 이번 주는 나도 내 인생이 마음에 든다. 감사하거나 자랑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내 인생에서 몹시 아쉬운 것을 하나 꼽으라면 바로 술이다. 때로 마음이 답답할 때 잔이라도 기울이면 좋으련만. 술을 앞에 놓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나는 그게 불가능하다. 십년 전쯤 뇌혈관 질환을 앓고 난 뒤 생긴 후유증이다. 당시 의사가 앞으로 절대 술은 금지라고, 마시면 간질이나 치매가 올 확률이 높다고 겁을 잔뜩 줬다. 퇴원 후에도 한 달 동안 세모, 네모 도형 맞추기, 방금 말한 문장 따라 하기 같은 인지 능력 관련 검사를 받았는데, 공포스러운 경험이었다.


“철수는 오후 3시 영국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에 두 시간 전에 미리 도착했습니다.”

“그럼 철수는 몇 시에 공항에 도착했을까요?”, “철수는 어느 나라에 가려는 걸까요?”


“영…국? 영국이요!!”  


철수가 영국에 간다는 사실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철수가 꼭 영국에 갔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 생길 지경이었다. 그런 식으로 한 달 동안 철수에 대한 질문과 테스트를 주고 받고 나서는 겁이 나서 술을 마실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기억력이 나빠지거나 급성 치매가 올까 전전긍긍했다. 대신 술 대신 탄산 음료를 너무 마셔서 급속도로 치아가 망가졌다. 이근화 시인의 시 구절처럼 ‘두 계절에 한 번씩’ 치과를 다녔다.

사이다, 콜라를 마시면서 술자리에 남아 있었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알고 보니 나는 알코올 없이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일에 서툴렀다. 낯설었다. 대화를 나눌 때 알게 모르게 술의 힘을 빌렸던 모양이다. 테이블에 커피를 한잔 놓고 상대방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주고받기까지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좋은 변화라면 스스로의 기억력을 의심하는 습관 때문에 상대방의 이야기에 조금 더 집중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점. 알고 보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 자문자답한다. 다만 자신이 찾는 답이 자신의 이야기 안에 이미 뒤섞여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이상하지, 가만히 들어줄 사람만 있으면 사람들은 알아서 답을 찾아낸다. 다만 그 대답이 정돈될 때까지 기다려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할 뿐.  


나는 다만 상대방이 무심코 흘려 보낸 말들 가운데에서 단어들을 골라내거나, 그것을 살짝 비틀어서 되돌려준다. 쓸 데없이 뾰족한 모서리를 없애고 약간 기름을 칠해주면, 누구든 이야기를 그럴 듯하게 이끌어나갈 수 있다. 우리가 그 이야기의 드라이버가 아니라, 옆 자리에 타서 가끔씩 말을 걸어주는 게스트라는 생각만 가지고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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