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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명 Sep 04. 2019

드러누운 기차처럼

- 밤의 외주화

전에 내가 세들어 살던 집 근처에는 커다란 야외 농구장이 있었다. 회사를 마치면 자정 너머까지 모르는 사람들하고 리바운드를 다투고, 몸 싸움하는 게 큰 즐거움이었다.


그 농구장 옆에는 지상으로 올라온 지하철 선로가 있었는데, 새벽이면 노오란 보선차가 나타나 선로를 수리했다. 마지막 지하철이 차량기지로 복귀하고 사람들은 각자 휴대폰을 충전기에 꽂고 잠드는 시간. 경기도 끝나고 땀을 식히고 있으면, 주황색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이 보선차에서 내려 어디 망가진 곳이 없나 철로 구석구석 살피고 두드렸다.


그런 식으로 가장 먼저 외주화가 시작된 영역은 밤이었다. 이를테면 철로를 살피는 보선 작업반 같은 사람들과 함께, 눈에 띄는 대로 밤의 작업들이 외주로 바뀌었다. 게다가 그 밤들은 가격도 저렴했다. 정규직을 줄이고 외주 업체로, 헐 값에 할당되었다. 기차들이 자주자주 드러눕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어쩐일인지 그 기차들처럼 경로를 이탈해 드러누운 문장들을 나는 요즘 자주 만난다. 


밤이 오면 나도 키보드를 두드려 망가진 문장들을 찾아내 하나씩 고쳐 나간다. 마케팅의 마지막 영역, SNS며 유튜브, 다양한 플랫폼에서 새로운 시도가 이루어지고 흥미로운 이야기와 퍼포먼스로 시끌시끌한 가운데 내 책상만 세상 조용한 것 같다. 나에게 할당된 밤도 저렴하긴 하지만, 여전히 고즈넉하고 내밀해서 일하기 나쁘지 않다. 

콘텐츠 마케팅 월드. 나 역시 매달 조회수가 폭발해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콘텐츠를 구경하기를 즐긴다. 그런데 직업적인 호기심으로 그 브랜드들이 운영하는 소위 ‘콘텐츠 허브’를 구경하다 보면 꼭 탈이 난다. 텍스트와 이미지로 아카이빙되어 있는 블로그며, 웹진, 스토리텔링이 가미된 곳에서 앞뒤가 맞지 않는 문장들을 너무 자주 발견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게 무슨 큰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고, 누구를 다치게 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냥 그런 것들이 눈에 보일 때마다 좀 외롭다. 누구 하나 들여다보지 않는 어느 블로그에 불시착해 나도 모르게 문장을 뜯어고치고 있자면 뭐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래서 나는 내친 김에 블로그에 댓글로 오타와 비문을 조목조목 지적… 하지는 않고 인스타그램을 한다. 인스타그램에서는 텍스트도 그냥 이미지에 머물기 때문에 읽어도 읽은 것 같지 않아서 마음이 편하다. 거짓말이다. 마음이 편할 리가. 나는 아마 죽을 때까지 '텍스트야말로 가장 보편적이고, 흡입력 있는 미디어'라는 믿음을 따라갈 것이다. 적어도 언제든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다고 믿는다.


텍스트에 홀려버린 에디터에게 콘텐츠 마케팅이 대세가 된 세상은 때로는 지나치게 허술하고 무신경해 보인다. 그냥 세상이 다 콘텐츠 마케팅의 멋지고 드라마틱한 세계로 달려가도 누군가는 그 뒤에 남아 아카이빙을 생각하고, 정확한 문장을 구사하는 데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세월이 가면’이라는 옛 노래의 가사인데, 콘텐츠 마케팅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은 못생긴 문장들을 언젠가 누군가는 고쳐야 될 것이다. 그 누군가가 나라는 생각. 


지난 몇 년간 SNS 플랫폼 기반의 콘테츠 마케팅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일정한 훈련이나 코칭 없이 곧바로 실전에 투입된 인력들이 너무 많았다. 제대로 된 가이드도, 일정한 인큐베이팅도 없이 하루 3~4개씩 콘텐츠를 찍어내며 돌이킬 수 없이 망가진 젊은 동료들을 너무 많이 봤다. 뭐 그렇다고 이들 때문에 기차가 드러눕는 것도, 브랜드 이미지가 심각하게 훼손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잘못된 문법이 길러낸, 거기 길들여진 플레이어들의 생명력은 점점 더 짧아진다. 


이제 겨우 사회에 발을 내디딘 젊음들을 싼값에 외주로 돌려 소모해온 까닭이다. 쉽게 썼으니 쉽게 버려진다. 누구의 잘못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나도 그 잘못에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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