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이터의 직업 윤리
영화 <범죄의 재구성>을 보면 이문식이 연기한 얼매라는 인물이 남긴 대사가 있다. 사기꾼의 직업윤리(?) 대한 이야기지만, 어떤 면에서는 글쓰기에 대한 인사이트를 담고 있기도.
"털어먹을 놈이 테이블에 앉아있다. 그럼 끝난 거에요. 문제는, 테이블에 앉히기 위해서 우리가 얼매나 공을 들이느냐, 그 작업이 얼매나 중요한데!"
저요? 부르셨나요? 내 이야기를 하는 줄 알았다. 그의 이야기는 책상에 앉기까지 들이는 노력은 글 쓰는 데 들어가는 수고에 비해 절대 가볍지도, 간단하지도 않다는 말로 들린다. 실제로 책상에 앉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막상 책상에 앉으면 글 쓰는 일은 이미 절반은 해결됐다는 기분이 드는 것이 사실이니까. 돌아보면 단정한 모서리를 가진 책상만 있으면 나는 거의 무엇이든 써냈다. 고백하건대 우주의 기운을 받아 ‘이 달의 별자리 운세’ 칼럼을 써 내려간 적도 있고, 가보지도 않은 소금 호수 여행기를 줄줄 늘어놓은 적도 있다.
그러니까 책상이나 펜, 키보드, 일하는 동안 틀어놓는 배경 음악, 커피, 조명, 실내 온도나 습도 문제 때문에 글을 못쓴 적은 있어도, 실존적인 고민이나 경험 부족 때문에 글을 중단한 적은 없다.
마침 오늘 이 칼럼도 커피 때문에 한 차례 중단되었는데, 이상하게 커피가 짜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커피가 짠 이유는 누군가가 나를 싫어하고 있다는 신호다. 나에게는 그런 믿음이 있다.
‘그럴 리가?’ 라고 생각하시죠?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는데요. 터키에서는 지금도 집에 초대한 이성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커피에 후추나 소금을 타서 비호감을 표시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커피가 부족해서, 너무 진해서, 달아서, 짜서 글을 쓰지 못했다는 것은 얼마든지 납득할 수 있다. 커피 한 잔에도 이렇게 다양한, 글쓰기를 방해하는 이유들이 도사리고 있는데, 책상, 펜, 배경 음악, 조명, 온도, 습도까지 생각하면 글을 쓸 수 없는 이유는 수백 가지는 될 것이다. 무엇보다 책상에 앉아 바탕화면에 있는 게임 아이콘이나 개인 블로그 대신 문서 폴더를 클릭하려면 상당한 직업 윤리가 필요하다. 때문에 모든 텍스트의 첫 문장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문구가 괄호 안에 생략되어 있다. 실은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을 하는 것이 아닐까?
저마다 일하고 싶지 않거나, 일할 수 없는 이유는 하루에도 몇 가지씩 만들어낼 수 있지만, 반드시 이 일을 해야만 하는 이유는 평생에 걸쳐 찾아도 쉽게 발견해 내기 어려우니까. 게다가 그 이유를 찾아냈다고 해도 몇 번이나 의심하게 된다. 당연하다.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고 자신의 신앙을 지켜낸 기독교 성인들을 보라.
도마(Thomas)는 부활한 예수를 믿지 못해 예수 옆구리의 상처를 촉진(觸診)했고, 베드로 역시 ‘당신도 예수의 제자가 아닌가?’라는 질문에 ‘아닌데요’, ‘모르는 사람인데요.’ 라고 세번이나 부인했다. 하물며 평범한 우리가 자신의 일에 대한 확신을 얻는 일이 순조로울 리가 없다.
나는 평생 한두 번의 확신보다는 수십 번의 의심을 거쳐 일에 대한 태도가 만들어진다고 믿는 편이다. 그게 뭐라고, 한 단어, 사진 한 컷 때문에 안절부절하고 괜히 디자이너를 귀찮게 하고, 커피를 탓하고, 조명의 위치를 바꾸고 있노라면 스스로 한숨이 나온다. 하지만 그게 뭐든지, 평범한 소재에서 좋은 이야기를 끄집어낼 때의 기쁨이 도둑처럼 찾아올 때가 있다. 우리는 아마 그 짧은 희열의 순간을 잊지 못해서 의심을 거듭하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