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범한 서체 이야기
하루 종일 휴대폰을 들여다보다가 잠깐 정신을 차리려고 책을 꺼낸다. 70년대 초반에 나온 시몬 베유(Simone Adolphine Weil)의 책인데, 무려 세로읽기다. 세로로 조판된 문장을 읽으면 일단 읽는 속도가 느려진다. 요즘 말로 DT(Duration Time: 페이지에 머무는 시간)가 늘어난다. 게다가 한글의 생김새는 확실히 세로읽기에 잘 어울린다. 백화점에 세일 매대에 널부러져 있는 옷을 마네킹에 걸쳐 세워놓은 것처럼.
이렇게 세로읽기에서 가로읽기로, 책의 조판이 변화하던 시기의 책에는 재미있는 공통점이 있다. 본문은 세로읽기를, 책 뒷 표지의 홍보 문구는 가로읽기를 채택한 책들이 많다는 점. 지금이야 가로읽기가 표준이지만, 그때 책들을 보면 가로읽기는 확실히 홍보-마케팅 문법에 가까웠다. 시간이 흐르면서 한글이 갖고 있는 세로읽기 친화적 성격보다 시장 가치가 더 중요한 기준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알파벳 기반의 가로 조판이 기술 표준과 같은 지위를 차지한 것이 주된 이유겠지만.
“Typography must be as beautiful as a forest, not like the concrete jungle of the tenements.”_ Adrian Frutiger (1928. 5. 24 ~ 2015. 9. 10)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타이포그래피란 모름지기 숲처럼 아름다워야 한다고. 세심하게 잘 조율되고, 훌륭한 리듬감을 가진 문장 속을 거닐면 좋은 공기를 마시는 기분이 든다. 내가 가끔씩 세로읽기로 된 낡은 책들을 읽는 이유다. 책을 읽는 일은 때로는 내용과 상관없이 서체가 만들어낸 공간을 음미하는 일에 가까울 때도 있다.
최근에는 민음사 ‘쏜살’ 총서 다니자키 준이치로 전집에서 본문 서체로 등장한 ‘산돌정체’가 나의 관심을 끌었다. 새로운 서체가 만들어낸 책의 풍경은 흥미로운 나들이 같다. 참,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렸던 하룬 파로키 전시 관련 책자에도 본문을 산돌정체로 풀었는데, 몹시 좋았다. 어떤 디자이너 분이 서체를 조율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감탄이 전달되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래봤자 내 관심은 평범한 독서가의 그것이지, 타이포그래피 작업을 하는 분들이나 편집 디자이너의 감식안에는 한참 미치지 못한다. 서체는 더 많은 이들에게 널리 활용되어야 하면서도 더없이 세심한 감식안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까다로운 작업물이다. 가끔 서체 디자인하는 분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면 서체 디자인은 수고를 넘어 헌신을 요구하는 일이라고 설명한다.
90자 내외를 고민해야 알파벳에 비하면, 한글 서체는 기본적으로 초성-중성-종성으로 조합된 2,350자를 일일이 만져야 한다고. 종이와 화면, 보고서와 메일 등 그 쓰임과 사용자의 보편적인 눈높이를 모두 만족시키는 한글 서체의 존재가 귀한 이유다. 긴 호흡을 감당하는 좋은 본문서체는 만들기가 워낙 어렵고, 사용자를 만족시키기도 쉽지 않아서 막상 쓸만한 한글 본문서체는 몇 가지 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이벤트성으로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한글날 무료 서체들이 이런 서체-만들기 환경을 헤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가뜩이나 만들기도 어려운 서체에 제대로 된 비용을 지급하는 데 인색하게 만드니까. 또 캐주얼하고 소모적인 각종 제목용 서체들은 서체가 가지고 있어야 할 기본적인 미덕을 결여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일반인들의 미감을 후퇴시킨다고 생각한다.
서체은 기본적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일종의 '공통적인 미감'을 만들어내는 영역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메일이나 문서에 자주 활용되는 ‘맑은 고딕’도 마찬가지다. 지금이야 더 멋진 폰트들이 활동하고 있기에 '맑은 고딕'은 '아무'서체 취급을 받지만, 그 탄생 과정이나 의미를 살펴 보면 곱씹어볼 부분이 적지 않다.
말이 나온 김에 맑은 고딕 서체에 대해 좀 더 알아보자면
맑은 고딕은 클리어타입 매뉴얼 힌팅(hinting)이라는 기술이 적용돼, 비트맵으로 구현되던 이전 폰트들이 해상도 제한으로 화면-인쇄 격차가 발생하고 심각하게 왜곡되던 것을 막아내는……
고만 알아보자.
정리하면 흔하디 흔한 맑은 고딕이지만, 맑은 고딕은 한글 폰트 최초의 ‘힌팅 폰트’다. 화면-인쇄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최초의 한글 서체다. 그전까지 활용되던 굴림, 돋움처럼 화면 상에서 서체의 아웃라인이 뭉개지거나 깨지지 않는 것이다. 때로는 세상 가장 흔한 서체 취급을 받고, 심지어 맑은 고딕으로 작업하면 무성의하다는 평가를 받는 경우도 있는데, 사실 ‘맑은 고딕’만 한 서체도 잘 없다.
나도 맑은 고딕같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잘 드러나지 않지만, 알고 보면 괜찮은. 함께 어울려 있으면 공기처럼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지만, 없으면 섭섭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