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부터 2000년대 초까지 비디오 가게는 그야말로 최전성기를 맞았습니다. 저 멀리 두메산골부터 해안선 끝 바다마을까지도 비디오 가게는 있었습니다. 비디오 가게가 호황의 도로를 달리던 그 시절, 저는 20대를 보냈습니다.
제 방 비디오 기계를 거쳐 간 수많은 테이프들이 생각납니다. 90년대 초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던 샤론스톤의 <원초적 본능>, 90년대 중반 최고의 감동을 선사했던 <쇼생크 탈출>, 90년대 후반 송강호라는 대형 스타를 배출한 <넘버3>, 그리고 2000년대 초 제 마음을 달뜨게 한 손예진의 <클래식>까지.
비디오 가게는 그 자체로도 낭만적이었습니다. 벽에 붙어 있던 화려한 포스터들, 은근한 읽는 재미를 선사했던 비디오 소개 잡지, “이거 보자” “아냐, 저게 더 재미있어!” 옥신각신하던 사랑하는 친구들.... 이들도 낭만의 일부를 장식했습니다.
하지만 제게 있어 비디오 가게는 보다 특별합니다. 우리 동네 비디오집 ‘그녀’에 대한 기억 때문이죠. 비디오 가게 주인집 딸이자 저와 동갑내기였던 그녀. 마을의 예쁜이였던 그녀가 가게를 지키는 날이면 비디오 가게는 동네 총각들로 그야말로 북새통을 이뤘습니다. 대학생이었던 그녀는 수업이 없던 주말에 잠깐씩 가게에 나왔습니다. 평일에는 그녀의 어머니가 가게를 운영하셨고요.
저 또한 그녀를 볼 수 있는 주말이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지금도 기억이 나네요. 그녀가 가게에 앉아 있던 날, 비디오테이프를 빌리러 가면서 떨려오던 내 청춘이 말이죠.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그녀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던 더벅머리 총각들이 1개 중대는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도도했던 그녀가 승낙하는 경우는 없었다고 하지만.
저도 그녀와 떡볶이도 먹고 싶고 동물원에도 가고 싶고 대학로도 거닐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소심쟁이였던 저는 데이트 신청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거절당할까 두려웠던 거지요.
1990년대 중반이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남자인 저는 국가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울먹이는 가족들, 서운해하는 친구들을 뒤로한 채 입영열차에 올랐습니다. 열차가 출발하자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가 떠올랐습니다. 가사처럼 '가슴속엔 무엇인가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비디오집 그녀를 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입대 후 여느 군인이 그렇듯 저도 정신없이 생활했습니다. 총 쏘고 제초 작업하고 고참에게 얻어터지며 그렇게 시간을 보냈습니다. 힘들 때마다 비디오테이프를 건네며 수줍게 웃던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곤 했습니다.
우리 내무반에는 큰 시계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 시계를 거꾸로 매달아 보았습니다. 그래도 시간은 갔습니다. 즉 거꾸로 매달아도 국방부 시계는 돌았고, 1990년대 후반이 되었습니다. 무사히 군 생활을 마쳤습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비디오 가게부터 들렀습니다. 가게는 훨씬 번창해 있었습니다. 바로 옆 식료품점까지 인수해 거의 두 배 크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녀, 나의 비디오집 그녀는 더욱 아름다워져 있었습니다. 풋내음 풍기던 소녀가 시간을 입고 성숙해 있었던 겁니다.
그녀는 엷은 미소를 보이며 제게 비디오테이프를 건넸습니다. 분명 알 수 있었습니다. 제가 돌아온 걸 그녀도 기뻐하고 있다는 것을요. 하지만 뭔가 시도해 보기엔 시기가 맞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바빴거든요. 그녀는 직장에 들어갔고, 저는 복학 후 수업 따라잡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틈나는 대로 비디오 가게에 방문했습니다. 그녀를 못 보고 허탕 치는 날엔 어쩔 수 없이 주인아주머니와 영화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처음엔 따분했지만, 차츰 아주머니와도 친해졌습니다. 미래의 장모(?)가 되실 분이었으니 잘 보여서 나쁠 건 없었죠.
시간은 흘렀습니다. 저도 대학을 마쳤습니다. 열심히 학점관리를 했기에 무난히 취업에 성공했습니다. 기뻤습니다. 사회인으로서 자립을 하게 되었으니까요. 이제 그녀 앞에 당당히 나서리라 마음먹었습니다. 몇 년간 마음속에서만 맴돌던 그녀, 용기없어 하지 못한 그 수많은 말들, 이제는 건네리라 다짐했습니다.
하지만 환경은 또다시 우리를 갈라놓았습니다. 입사하자마자 저는 지방지사로 가야 했습니다. 그녀와 시작해 보려 했는데 답답했습니다. 솔직히 환경 탓은 핑계입니다. 그냥 결단력이 부족했습니다. 어쨌든 그녀에게 다가서지 못한 채 지방으로 떠났습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열심히 일해야 했고 자리를 잡아야 했습니다. 집에는 가끔 올라갔습니다. 그때마다 먼발치서라도 그녀를 볼 수 있음에 감사했습니다. 그러는 도중 2002 월드컵이 지나갔고 대통령도 바뀌었습니다.
다시 시간은 흘렀습니다. 제 직장은 여전히 지방지사였고 두세 달에 한 번씩 집을 찾는 생활을 반복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일까요. 집으로 향할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비디오 가게가 조금씩 기울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터넷과 DVD 보급이 활성화되면서 비디오테이프 빌리는 사람이 갈수록 줄어들었습니다.
가끔씩 마주치는 그녀,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세월의 무게는 어쩔 수 없었는지 눈가에 잔주름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2000년대 중반에 접어들었습니다. 저는 지방근무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얼마나 고대하던 순간이었는지 모릅니다.
‘이제 그녀와 시작해 보리라.’
물리적 거리가 가까워졌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제 소심함을 벗기로 했습니다. 다가서지 못하고 곁에서 맴도는 바보짓은 이제 그만하기로 했습니다. 주말을 맞아 비디오 가게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습니다. 그녀를 만나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 이런!’
비디오 가게가 폐업 절차를 밟고 있었습니다. 급속히 변화하는 시대와 더는 맞설 수 없었나 봅니다. 가게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주인아주머니가 반갑게 맞이해 주셨습니다. 아주머니와 저는 그간의 회포를 풀며 웃었습니다. 하지만 아주머니의 미소 띤 얼굴 한켠에 언뜻언뜻 삶에 치인 어두움이 드러났습니다.
저는 가게 진열대 쪽으로 시선을 돌려보았습니다. 중간중간 휑하니 빈 공간들이 보였습니다. 남은 테이프들을 헐값에 팔고 있었습니다. 신프로는 1000원, 구프로는 500원이었습니다. 마음이 아파왔습니다. 제 푸르렀던 20대와 함께 했던 비디오 가게가 사라진다는 게 믿기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가게 문을 열고 드문드문 들어왔습니다. 하나 실제로 테이프를 구매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냥 재미로 구경만 하러 들른 듯했습니다. 이미 그들의 집에는 인터넷과 DVD가 들어차 있을 테니 말입니다.
저는 지갑을 꺼냈습니다. 비디오테이프를 한아름 골랐습니다. <영웅본색>, <첩혈쌍웅> 등 학창 시절 즐겨 보던 홍콩영화와 시대를 대표하는 할리우드 흥행작들을 집어 들었습니다. 그녀가 가게에 있을 땐 쑥스러워 빌리지 못했던 <젖소부인 바람났네> 같은 옛날 성인물도 슬쩍 끼워 넣었습니다.
많이 구매하자 주인아주머니가 서비스로 테이프를 몇 개 더 주려 하셨습니다. 저는 괜찮다고 손을 크게 저었습니다. 구매한 테이프들은 라면 박스에 넣었습니다. 아주머니의 배웅을 받으며 가게를 나섰습니다. “많이 파세요”라고 인사를 건넸습니다. 그러면서도 아주머니께 차마 묻지 못한 한마디가 입 속에서 맴돌았습니다.
‘따님은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요....’
집으로 돌아온 저는 주말 내내 비디오테이프들을 돌려 보았습니다. 다양한 영화 장면이 지나갔습니다. 영화 자체의 재미보다도 이 영화들을 처음 비디오로 접했던 그 시점, 그 시절들이 떠올랐습니다. 괜스레 눈시울이 아려왔습니다. 저도 조금씩 나이를 먹어가고 있었나 봅니다.
그러던 어느 날입니다. 조금 일찍 퇴근한 저는 여유롭게 비디오 가게 앞을 지났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가게 문이 잠겨 있습니다.
‘아직 처리해야 할 테이프가 많이 남았을 텐데?’
왜 문을 열지 않았을까, 궁금했습니다. 건너편 세탁소 아저씨께 이유를 물었습니다. 아저씨가 어두운 표정으로 담배를 꺼내 물었습니다. 이후 그의 설명은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녀가, 나의 비디오집 그녀가 교통사고를 당해 중태에 빠졌다는 것이었습니다. 후진하던 레커차가 보도블록을 침범하며 그녀를 덮쳤다고 했습니다. 저는 어질어질한 상태로 세탁소 간이의자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그 어떤 생각도 뇌 안에 자리하지 못했습니다. 한동안 멍하니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언제까지 넋 놓고 있을 순 없었죠. 겨우 몸을 일으켜 그녀가 실려 갔다는 병원 응급실로 뛰어갔습니다.
응급실 앞은 혼란 그 자체였습니다. 주인아주머니가 혼이 빠진 듯 오열하며 담당의사의 가운을 부여잡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 다시금 마음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나의 그녀는 지금 생사를 넘나들고 있는데
저는 속수무책으로 그냥 있어야 했습니다.
제 무능력함을 얼마나 원망했는지 모릅니다.
응급실과 수술실 앞을 오가며 밤을 지새웠습니다. 아침이 되자 회사 상사가 연신 휴대폰을 해댔습니다. 왜 출근 안 해! 저는 그냥 휴대폰을 꺼버렸습니다.
휴대폰을 껐어도 휴대폰 시계는 돌아갑니다. 그렇게 오후가 되었습니다. 담당의사가 보호자들을 찾아왔습니다. 절망적인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녀가 뇌사상태에 빠졌다고 했습니다. 통곡하는 그녀의 어머니에게 원무과 직원이 이후의 수속 절차를 알려주었습니다.
저는 화장실로 향했습니다. 거울을 보며 가슴을 부여잡았습니다. 이를 악물어봤지만, 신음하듯 울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끄윽, 끄어억.... 저 스스로도 처음 들어본 생소한 울음소리였습니다.
세면대에서 얼굴을 씻고 나오니 병원 관계자들의 수군거림이 들려왔습니다. 곧 그녀의 장기적출이 시작될 거라 했습니다. 아직 젊은 그녀는 신장, 간, 췌장 등 장기 주요 부분을 기증할 거라 했습니다.
파란 천에 쌓인 채 그녀가 수술실로 들어갔습니다. 얼마 후 대부분의 장기가 빠진 채 시신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그녀는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이후 비디오 가게는 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출퇴근을 하면서 그곳을 지나야 하는 저는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아직 물건 정리할 것도 많이 남았을 텐데.... 주인아주머니 걱정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비디오 가게의 문은 굳게 잠겨 있었습니다.
그렇게 두 달 정도가 지난 어느 날입니다. 저는 여느 때처럼 퇴근 후 비디오 가게 앞을 지났습니다. 그날은 뭔가 달랐습니다. 인근이 시끌벅적했습니다. 비디오 가게 쪽으로 시선을 돌려보았습니다.
이게 웬일입니까. 비디오 가게에 불이 환하게 들어와 있었습니다. 문을 활짝 열고 사람들을 반기고 있었습니다.
‘대체 무슨 일일까?’
가게 앞으로 다가갔습니다. 정문에 안내문구가 붙어 있었습니다.
- 비디오테이프 공짜로 드립니다. 마음껏 가져가세요.
의문이 풀렸습니다. 저도 가게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아주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손님들만 북적였습니다. 저는 가게 이곳저곳을 돌아다녔습니다. 테이프를 가져갈 생각은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테이프를 가져가면서 가게가 지저분해져 있었기에 뒷정리를 하기 위해 수선을 떤 것입니다. 청소를 하면서 손님들을 아련한 눈길로 바라보았습니다. 테이프를 집어 들고 나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니 먹먹했거든요. 모든 장기를 나눠주고 떠난 그녀와 모든 테이프를 나눠주고 있는 비디오 가게의 모습이 겹쳐졌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이틀에 걸쳐 비디오테이프는 모두 배포되었습니다. 이후 비디오 가게는 영원히 문을 닫았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속 비디오 가게는 청춘의 기억과 함께 언제까지나 문을 열고 있을 겁니다. 물론 그 가게의 주인은 그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