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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과학원 여인들

희한한 팀워크와 유체이탈 화법의 정수를 경험하다

by 마늘파

한때 빵집을 운영하고 싶다는 꿈을 가졌다. 아침엔 빵을 굽고 낮에는 빵을 팔고 오후 3시엔 문을 닫고 저녁엔 동화를 쓰고.... 뭐 이런 조금은 현실과 동떨어진 삶을 그렸다. 꼭 꿈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20대 후반 시절 제과·제빵 자격증을 땄다. 직장생활을 할 때라 저녁 시간대를 활용해 학원에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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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 만드는 수업은 재미있었다. 학원에는 여자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그래서인지 분위기가 밝았고 역할도 각자 공평하게 분담했다. 6명씩 조를 이뤄 함께 재료를 배합하고 반죽을 하고 둥글리기를 했다. 밑작업을 끝낸 반죽은 한동안 발효시킨 뒤 양념을 입혀 구웠다. 그때 풍기는 고소하고 달큰한 냄새, 오븐에서 풍성하게 쏟아져 나오는 결실들.... 구운 빵은 다음 날 회사 직원들에게 나눠줬다. 다들 좋아했다.

어느 날 우리 조에 어린 학생이 들어왔다. 중학교 1학년인 S는 몸집이 작아 초등학생처럼 보였다. 밝고 귀염성이 있어 잘 대해줬다. 녀석도 나를 형이라고 부르며 잘 따랐다. 여기까진 좋았다. 그런데 S가 들어오자 공평하게 분담하던 각자의 역할이 깨져버렸다.


- S야, 가서 휘핑크림 좀 가져와.

- S야, 이 대야 좀 닦아놔.


조원들이 잡다한 일을 S에게 시키기 시작했다. 특히 우리 조의 고참급이라 할 수 있는 40대 여자가 심했다. 그 아줌마가 S에게 잔일을 시키자 다른 조원들도 자연스럽게 따라 하기 시작했다.


S는 어리기에 그것이 부당하다는 걸 못 느끼는 눈치였다. 하지만 녀석은 잔심부름을 하느라 기술을 익힐 수가 없었다. 잠깐 반죽하다가 심부름으로 달걀 가져오고, 잠깐 빵 성형하다가 심부름으로 식기 닦고.... S도 엄연히 돈 내고 배우는 수강생인데 잔일하다가 판이 끝날 지경이었다.


지켜보는 나는 안타까웠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여자들이 참 개념이 없다고 생각했다. 자기 아들이라면, 지들 동생이라면 저럴 수 있을까?


― 그러지 마세요!


라고 조원들에게 쏘아붙여야 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겉으로는 분위기가 너무 화기애애해서였다. 집에서 먹을 것도 싸 와서 나눠 먹고, 여자들 특유의 수다와 웃음꽃도 곳곳에서 피어나고.... 그런 분위기에 도저히 찬물을 끼얹을 수가 없었다. S도 뭐가 잘못됐는지도 모른 채 그냥 심부름을 하고 있었기에 내가 느닷없이 나설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이건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가 있는 걸 분명히 알면서도 외면하는 건 비겁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대놓고 쓴소리하기가 어렵다면 다른 교정법이라도 찾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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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이었다. 나는 자판기에서 코코아를 뽑아 마시며 휴식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화장실에서 볼 일을 마친 40대 아줌마가 자판기 쪽으로 왔다. 기회였다. 커피를 뽑는 아줌마 옆으로 다가섰다.


“S의 기술 연마가 느린 것 같아요. 녀석이 착해서 조원들 말 잘 듣는 건 좋은데, 잔심부름하느라 빵 만들 시간을 빼앗기는 것 같아서 보기가 좀 그러네요. S도 동등한 학원생인데....”


내 나름대로 돌려서 말했다. 아줌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기가 막힌 말이 들려왔다.


“그러게 말이야. S도 배워야 하는데 이것저것 잔심부름하느라 시간 뺏기는 것 같더라고. 참나, 사람들이 왜 그런지 몰라.”


자신과는 상관없는 이야기인 양 S를 걱정했다. 전형적인 유체이탈 화법이었다.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어쨌든 의사는 전달했으므로 상황을 두고 보기로 했다.


효과는 있었다. 그녀는 S에게 뭘 시키려다가도 잠깐씩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최고참 언니가 조심을 하니 다른 조원들도 점차 심부름을 줄여갔다. S는 점차 빵 만드는 데에 집중할 수 있었다.


얼마 후 제과기능사 필기시험이 있었다. 기능사의 경우 1차 필기를 통과해야 2차 실기를 볼 자격이 주어진다. 4지 선다형으로 60점 이상만 맞으면 되니까 그리 어려운 시험은 아니었다. 하지만 중학교 1학년이 풀기에는 어려웠던 것 같다. S는 필기시험에서 미역국을 먹고 말았다.


그래도 녀석은 빵 만드는 걸 좋아했다. 떨어진 후에도 한동안 학원에 나와 반죽을 했다. 하지만 며칠 후 S의 엄마가 학원에 찾아와 중단을 통보하면서 녀석의 제과·제빵사 도전기도 끝이 났다. 그냥 학교 공부를 좀 더 열심히 시키겠다는 것이었다.


S는 엄마 손에 이끌려 나가면서도 미련이 남는지 계속 작업실을 돌아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형, 잘 있어”라며 손을 흔들었다. 나도 “그래, 공부 열심히 해”라고 답했다.


그렇게 S는 학원을 떠났다. 아쉬웠지만 나는 아무 일 없던 듯 다시 빵을 만들기 시작했다. S는 S의 길을 갔고 나는 내게 주어진 일을 했을 뿐이다. 그리고 몇 주 후 나는 자격증을 취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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