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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어른들께 왜 신정보다 구정인가요 물으면 구정이 민족의 명절인 설날이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그럼 신정에 떡국 먹고 구정에도 떡국 먹으면 나이를 두 살 먹는 건가요 떡국만 먹는 건가요. 새해는 신정부터 시작인가요 구정부터 시작인가요. 이 레퍼토리는 어릴 때 부모님을 시달리게 하는 부질없는 단골 말다툼 중 하나였던 것 같다. 참을성 없는 부모님이 아니셨지만 나는 자녀가 좀 많은 집의 네 번째 딸로 자랐기 때문에 질문이 좀 신박해야 했다. 그러니까, 부모님 시점에서 이미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에서 이미 웬만한 질문에 시달려 봤기 때문에 웬만한 질문은 물어봐야 침묵 속으로 사라지거나 형제들을 통해 해결해야 했던 것이다. 어린 시절 그 세계에서 나는 부모님의 관심을 끌려면 신박한 질문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던 것 같다.
그러니까, 신정에 떡국 먹고 구정에도 떡국 먹으면 나이를 두 살 먹는 거냐는 질문은 그래도 떡국을 차려줄 누군가가 있었을 때의 고민이었다. 지금은 그럴 일이 없어서 떡국 역시 없다. 종교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리추얼을 지키는 것에 꽤 단호한 편이지만 신정에도 떡국을 챙기지 않았고, 구정이 지나가는 지금, 혼자서 낑낑대며 떡국 의식을 치러야 할지 모르겠다. 뭐 이번 구정을 놓치면 다음 새해에 떡국 먹을 타이밍이 돌아오지 않겠나. 기다림을 미루는 건지, 유예하는 건지, 리추얼의 끈을 놓아버리는 건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구정인데 구정의 리추얼이랄 게 떡국 외에 잘 생각나지 않는다. 구정의 리추얼 말고 구정의 찬스라고 하면 뭐랄까 패자부활전 같은 느낌이 없잖아 있다. 송구영신하고 기분 좋게 일월 일일을 맞은 뒤 갈지자 걸음을 걸으며 작심삼일을 반복하다가 어라 구정이네. 그래, 모두 리셋시켜서 오늘부터 모두 새해인 거다라고 하는 찬스. 근데 그럼 올해에 한 달을 더 더해주는 건가요. 그건 아니고 그냥 기분인 건데. 에이, 새해만 음력으로 돌려놓고 다시 양력으로 살아가게 하긴 가요.
여하튼 부질없는 말다툼은 포기하고, 그래서 구정을 어떻게 보낼까 생각해봤다. 연휴 전날 마지막 백신 맞고 체력이 방전되어서 간신히 있는 터라 떡국 리추얼은 포기하기로 했다. 대신 연휴에 문 닫기 전 공립도서관에 들려서 빌리고 싶던 책을 빌려두었는데 우선 이 책을 읽기로 했다. 표지가 굉장히 심플하고 제목이 인상 깊은 산문집인데, 올 구정은 이 책이랑 연애하는 기분으로 지내야겠다.
제목은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이라는 책인데, 이 책의 하얗고 심플한 표지를 열고 들어가면, 프랑스에 다녀온 기분도 느낄 수 있고, 각종 공연 소식이나 해설, 정설, 감상, 사견에 대해 들을 수 있다. 아, 그러고 보니 구정인데 프랑스에 다녀오게 되었다. 그렇지만 꼭 프랑스는 아니고 공연이 열리는 곳들을 같이 투어 해볼 수 있다고 하는 게 정확할 것 같다. 민족의 명절인 설날에 이방인의 감상을 나누기에 뭔가 적절한 책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