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경태 Oct 23. 2018

아이거의 눈물

2.33. 그린델발트-피르스트-융프라우

루체른에서 이틀을 잔 후 그린델발트로 이동하기로 했다. 융프라우나 아이거, 피스스트 같은 알프스의 대표 봉우리들과 호수를 포함하는 산악지역을 베르너오버란트란 명칭으로 부르는데 그린델발트는 그 중간 정도에 위치하고 있다. 산아래 마을인 인터라켄과 라우터부르넨, 융프라우와 함께 원형의 철도로 연결되어 있고, 융프라우로 올라가기 위한 베이스캠프 같은 성격의 마을이다.


예약한 숙소에 조금 일찍 11시에 도착했는데 체크인이 가능했다. 우리가 이틀간 묵을 숙소는 Lodge라고 불리는 유형인데 방안에는 세면대만 있고 욕실과 화장실은 공동으로 사용하는 방식이다. 나라마다 독특한 형태의 숙박업소들이 있는데 물가가 너무 비싸서 호텔에서 잘 엄두를 낼 수 없는 스위스에서 그나마 적당한 가격에 잘 수 있는 숙소였다. 물론 싸다고는 해도 다른 나라의 어지간한 호텔 숙박비보다 더 비싼 비용이기는 하다. 


순식간에 구름이 걷힌 알프스


날씨가 흐려서 융프라우는 내일 올라가기로 하고 먼저 피르스트로 가기로 했다. 피르스트는 짚 라인이나 트로티 자전거 등 레저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곳인데, 융프라우 VIP 패스를 사용하면 아무때나 올라갈 수 있어서 가벼운 마음으로 올가갈 수 있었다. 


융프라우 VIP 패스는 할인해도 인당 20만원 정도로 비싼 가격이었지만 어차피 융프라우에 한번 올라갔다 오려면 거의 비슷한 기차요금이 들기 때문에 2일 동안 베르너오버란트 지역을 다 돌아볼 수 있는 VIP 패스를 사는 것이 맘 편했다.


아이거북벽 아래 구름 속에서 한가롭게 쉬고 있는 알프스 소들


피르스트 전망대까지는 곤돌라를 몇 번을 갈아타고 30분 정도 올라가는데 유럽에서 가장 긴 길이의 곤돌라라고 한다. 위로 올라갈수록 날씨가 점점 더 안 좋아져서 꼭대기에 도착했을 때쯤엔 온통 구름으로 가득 차서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피르스트 플라이어도 운행을 안 해서 어쩔 수 없이 정상에서 잠시 머물다 다시 내려가기로 했다. 안개속 어딘가에서 울려퍼지는 소 방울소리가 아련히 들렸다.


곤돌라 아래로 보이는 집 중에 목이 긴 좀 웃기게 생긴 동물들을 기르는 곳이 보였다. 아마 안데스 산맥에 사는 라마 같은데, 멀리 알프스까지 라마가 오게 된 사연이 궁금하다. 


안개속의 피르스트 정상


곤돌라를 타고 내려가다 와이프와 크게 말다툼을 했다. 별로 싸울 거리도 안 되는 사소한 얘기가 점점 말다툼으로 커져가더니, 급기야는 와이프가 곤돌라에서 내리더니 혼자 숙소로 가버렸다. 기분이 울적했지만 잠시 서로 풀어질 시간이 필요하기도 하고 VIP 패스가 아깝기도 해서 혼자서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전형적인 알프스 마을 전경


제일 먼저 가 보고 싶은 곳은 아이거였다. 아이거는 알프스의 3대 봉우리 중 하나라고 하는데, 특히 아이거 북벽은 항상 북쪽을 면해 있어서 항상 눈과 얼음으로 뒤덮혀 있는 가파른 절벽이기 때문에 20세기 초반까지 아무도 등반하지 못했던 봉우리로 유명하다. 


기차역에서 본 아이거 북벽 


특히, 몇 해 전에 본 영화 때문에 아이거는 이번 여행에서 내가 반드시 보아야 할 리스트에 추가되었는데, ‘Nord wand’라는 제목의 독일 영화로 영어로는 North face, 즉 아이거 북벽을 가리키는 말이다. 두 남자가 눈보라 속에 절벽에 매달린 포스터에 혹해서 보게 된 영화인데 내가 본 가장 충격적인 등반 영화였다.


클리프 행어나 버티컬 리미트 같은 유명한 등반 영화들이 많지만 대부분 산을 배경으로 한 액션 스릴러 픽션들인데 반해 Nord wand는 등반 그 자체에 관한 영화이다. 



베를린 올림픽을 앞두고 아이거 북벽을 제일 먼저 등반하기 위해 각 나라의 자존심을 걸고 경쟁하다가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는 등반가들의 이야기인데 영화에 나오는 거의 모든 디테일한 장면까지 실제 사건을 재현한 것이어서 더욱 더 와 닿는 영화이다. 


가장 안타까운 장면은 극한적 상황에서 초인적 힘으로 버티던 주인공 토니 크루츠가 구조대들의 몇 미터 앞에서 허공에 매달린 채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인데 실제의 사진과 비교해보니 영화와 거의 그대로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이거 북벽 전경


예전에 여행 왔을 때 봤던 아이거지만 그땐 별 생각이 없이 무심히 봐 넘겼고 이번에는 좀 제대로 보려고 아이거를 볼 수 있는 클라이네 샤이덱 역으로 기차를 타고 갔지만 짙은 구름으로 아이거를 전혀 볼 수 없었다. 구름이 걷히기를 한참 동안 기다렸지만 도저히 걷힐 기미를 보이지 않아서 아쉽게 내려와야 했다. 


오랜만에 혼자 돌아다니니까 예전에 배낭여행 하던 생각도 나고 색다른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숙소에 혼자 있는 와이프가 걱정되어서 그냥 돌아가기로 했다. 


구름속에 반쯤 잠긴 알프스 마을


숙소로 돌아와보니 와이프가 침대에서 자고 있길래 나도 그냥 침대로 들어가서 누워 자기로 했다. 한참을 자고 일어나니 저녁 시간이 되어서 나와보니 어느새 맑은 날씨로 바뀌어 있다. 


중국집에서 저녁을 먹으며 낮에 다툰 일을 풀었다. 와이프는 금방 성질을 내는 성격이기도 하지만 또 금새 풀어지고 별로 뒤끝이 없는 성격이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저녁 식사 후 마을을 한참 산책하고 돌아와서 융프라우에 올라가야 하는 내일은 날씨가 좋기를 바라면서 잠들었다.


융프라우 만년설을 배경으로. 고소 증세가 와서 조금만 격하게 움직이면 어지러웠다.


아침에 일어나니 근래에 보기 힘들었던 화창한 날씨이다. 로지 카운터에 있는 여직원에게 융프라우 정상 날씨가 어떤지 확인해달라고 했더니 지금 올라가면 아주 좋을 거라고 얘기해준다. 시시각각 변하는 날씨라 시간 단위로 날씨를 예보해주는 웹사이트 같은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중부 유럽에서 날씨가 안 도와줘서 우울한 순간이 많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그래도 날씨가 한 몫 해 주는 것 같다. 서둘러 융프라우로 올라가는 등산열차를 타기 위해 어제 혼자 갔던 클라이네 샤이덱으로 다시 갔다. 오늘은 아이거가 얼굴을 내밀고 있었는데 급하게 열차를 갈아타느라 제대로 볼 시간은 없었다. 


만년설과 초원의 경계


등산 열차는 한참을 바깥쪽으로 올라가다가 어느 시점부터 터널 속으로 들어가서 융프라우요흐 역까지 계속 간다. 중간에 몇 개의 역이 있는데 그 중 아이거 노르트반트역이 바로 토니 크루츠가 마지막으로 죽음을 맞은 지점 부근에 있는 역이다. 


이 역의 환기구를 통해 나간 구조대가 우여곡절 끝에 토니 크루츠에게 밧줄을 전달해서 그 밧줄로 토니 크루츠가 타고 내려왔지만, 실수로 짧은 밧줄을 가져오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밧줄을 잇기 위해 매듭을 만들어야 했고, 눈보라 속에서 절벽에 붙어 사투를 벌이느라 하느라 기력을 소진한 토니크루츠는 그 매듭을 넘지 못하고 구조대가 보는 몇 미터 앞에 매달린 채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것을 바로 앞에서 지켜본 구조대는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융프라우 정상의 빙하지대


그런데 올라가는 열차 안에서 보여주는 동영상 중에 한 젊은 등반가가 아이거북벽을 엄청난 속도로 올라가는 동영상이 있었다. 낫 비슷하게 생긴 이상한 장비를 양손에 들고 거의 뛰어올라가듯이 두 손 두발을 이용해서 아이거를 두 시간 반 만에 올라가는 모습을 보여 주었는데, 토니크루츠의 눈물겨운 사투가 지금은 몇 시간 거리도 안 된다고 하니 허망한 노릇이다.


한때 2시간 10분이 인간이 뛸 수 있는 마라톤의 한계이고 100미터를 10초에 주파하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던 시절이 있었던 것을 생각하며 인간의 한계란 스스로 설정하기 나름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융프라우 꼭대기에서 신난 와이프


융프라우의 꼭대기에 올라오니 조금만 빨리 걸어도 심장이 뛰고 어질어질한 느낌이다. 머리도 좀 아픈 거 같고.. 이런 것이 말로만 듣던 고산병 증세일까? 와이프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나만 그런다. 나이를 더 먹어서 그런가? 


역 밖으로 나오니 온통 하얀 눈 세상이다. 역 안은 좀 추운 느낌이 있었지만 바깥은 눈밭 위인데도 날씨가 더워서 반팔로 돌아다니는 사람도 많다. 한여름에 눈밭에서 뒹구니 상쾌한 느낌이다. 


산아래로 내려가는 트래킹 중


한참 동안을 눈 속에서 헤매고 놀다가 아래로 등산열차를 타고 내려오다가 중간에 트래킹을 해 보기로 하고 아이거 글래쳐라는 역에서 내려서 아래로 걸어갔다. 정확히 길은 모르지만 대충 사람들 따라서 아래로 내려가면 될 거 같아서 천천히 걸어 내려갔는데 빙하와 절벽으로 둘러 쌓인 멋진 길이었다.


머리가 깨질듯이 차가웠던 샘물


중간에 호수 같은 것이 있고 그 옆에는 물이 솟아오르는 샘이 있었는데 샘 안에 발을 담근 채로 기대어 누울 수 있도록 의자들이 놓여있었다. 서양인 커플이 앉아 있었는데 와이프가 옆 의자에 앉아서 발을 담그더니 셋이서 같이 차갑다고 호들갑 떨며 들어오란다.


나도 양말을 벗고 들어가 보았는데, 처음 물에 들어갔을 때는 별로 안 차갑다고 느껴지다가 채 몇 초가 지나지 않아서 머리가 깨질 듯한 차가움이 느껴졌다. 발이 시려서 오래는 못 있었지만 피로가 풀리는 느낌이다. 


트레킹 중 만난 거울같은 호수


어제 올라갔다가 그냥 내려온 피르스트에 다시 가기로 하고 곤돌라를 타고 올라갔는데 무슨 문제가 있는지 가다 서다를 반복하더니만 급기야는 한참 동안 멈춰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어찌어찌 해서 올라가긴 했는데 이미 마감시간이 지나고 날씨도 급격히 안 좋아져서 오늘도 아무것도 못 타고 다시 내려와야 했다. 


저녁 시간이 다 되어서 숙소로 돌아왔는데 문을 열고 들어오자 고소한 퐁뒤 냄새가 난다. 맛있어 보여서 식당에서 먹어보려 했지만 미리 예약을 안 하면 먹을 수 없다고 한다. 할 수 없이 오늘도 나가서 식당에서 뢰스티와 파스타로 저녁을 먹고 들어와서 쉬었다.


트래킹 중 만난 알프스 소


다음날 일어나서 삼고초려하는 마음으로 다시 피르스트로 올라갔다. 여전히 날씨가 안 좋았지만 오늘은 피르스트 플라이어를 운행하고 있어서 타려고 가 봤다. 하지만 줄도 길고 비도 간간히 내리고 해서 그냥 트로티 자전거를 타기로 했다. 


트로티는 페달이 없는 자전거라서 아래로 경사진 곳에서만 탈 수 있는 자전거인데 의외로 재미있었다. 트로티 자전거를 위한 길이 별로도 있는 것은 아니고 그냥 마을 길을 따라서 내려가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도 만나고 차도 마주치면서 내려가는 데 꽤 먼 거리를 내려가고 급경사인 곳도 많기 때문에 조심하면서 갔는데 급기야 와이프가 넘어져서 무릎이 까지고 말았다. 


피르스트에서 타고 내려온 트로티 바이크. 생각보다 신나는 경험이다.


트로티바이크를 반납하고 라우터부르넨으로 갔다. 예전 여행 왔을 때가 한 겨울이라 라우터부르넨 캠핑장에서 자고 부삽이라는 이상한 지명의 산꼭대기에서 반나절 동안 썰매를 재미있게 타고 내려왔던 기억이 있는 곳이다. 캠핑장을 지나면서 보니 예전에 혼자 쓸쓸하게 잤던 기억이 떠오른다. 


라우터부르넨 안쪽에 위치한 트뤼멜 폭포를 찾아가 보았다. 바위 속을 뚫고 아래로 흐르는 폭포를 여러 층에 걸쳐서 구경하면서 내려오는 곳인데 압도적인 물소리가 인상적이다. 바위 속을 뚫고 흐르는 폭포는 어디서도 본 적이 없는 특이한 광경이었다. 


쉬니케플라테로 올라가는 등산 열차. 가장 오래된 열차라 자리도 불편하고 삐걱거리면서 느리게 올라갔지만 소풍 가는 듯 여유로운 느낌이다.


다음으로 알프스의 정원이라고 불리는 쉬니게 플라테(Schynige Platte)로 올라갔다. VIP 패스로 공짜이기 때문에 좀 색다른 곳을 가 보고 싶어서 간 곳이다. 정상에 알펜가든(Alpen garden)이라는 식물원이 있는데 에델바이스와 같은 알프스의 갖가지 식물과 꽃들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올라가는 등산 열차는 19세기에 알프스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노선이고 열차도 아주 오래된 것이라서 삐거덕거리는 소리에 속도도 느리지만 소풍 가듯이 편안한 느낌을 주는 열차이다. 한 시간쯤 올라가는 경치가 매우 아름다운 곳인데 날씨가 흐려서 제대로 볼 수 없어서 아쉬웠다. 꼭대기의 알펜가든도 날씨가 흐리고 너무 추워서 제대로 보지 못하고 내려와야 했다.


바위 속을 뚫고 흐르는 트뤼멜 폭포


매거진의 이전글 빌라도의 불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