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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태 Oct 20. 2018

빌라도의 불꽃

2.32.  필라투스-카펠교


루체른 근교의 여러 산 중에서 가장 유명한 필라투스 산을 가 보기로 했다. 필라투스의 모습은 멀리서 보면 마치 불꽃이 타오르는 것 같은데, 불을 뿜는 용이 이 산의 상징이라고도 한다. 필라투스라는 명칭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본디오 빌라도의 바로 그 빌라도에서 온 것이라고 하는데, 뭔가 사악한 기운이 깃들어 진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유람선에서 본 필라테스 전경


필라투스까지 가는 길은 유람선을 타고 50분쯤 가서 등산열차로 갈아 타고 전망대를 올라간 후 다시 케이블카와 곤돌라로 갈아타고 내려온 후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길고도 복잡한 여정이었다. 필라투스 산을 올라가는 등산 열차는 엄청나게 길었는데 제일 급경사로 만들어진 곳이라고도 한다.


엄청난 급경사의 등산열차


필라투스 정상은 날씨가 좋지 않아서 전망대로 올라가자 말자 비가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애써서 올라왔는데 기대한 풍광을 볼 수 없다는 생각에 낙담하고 있으니 와이프가 좀 기다리면 괜찮아질 테니 여유를 가지고 기다리자고 말한다.


시커먼 구름에 비에 도저히 날씨가 좋아질 거 같지가 않아서 그냥 한숨만 쉬고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니 거짓말처럼 비가 그치고 파란 하늘이 보이기 시작한다. 와이프는 자기 말이 맞지 않냐며 매사에 서두르지 말고 여유를 가지라며 핀잔을 준다. 


지난번 플릿비체 때도 그렇고 가끔은 와이프가 신기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루체른 호숫가에서 햇살을 즐기는 사람들


필라투스 전망대는 일부분이 개미굴처럼 바위 속을 뚫어서 길을 만들어서 사방을 볼 수 있는 전망대를 만들었는데, 바위 속을 뚫느라 고생했을 인부 아저씨들을 생각하니 절로 숙연해지는 느낌이다. 이정도 굴을 보고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바위산 속에 기차가 다닐 수 있는 터널을 뚫은 아이거의 아저씨들은 어땠을지 상상도 안 간다. 물론 그 때문에 엄청나게 비싼 돈을 내고 올라가서 신라면 한 그릇을 먹고 오는 거겠지만..


바위를 뚫어서 만든 전망대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풍경들


필라투스에서 내려오는 길도 케이블카와 곤돌라를 몇 번을 갈아타야 하는 긴 여정이었다. 마지막으로 곤돌라를 내려서 버스를 타는 곳을 찾아봤지만 도무지 어디서 타야 하는지 모르겠다. 이럴 땐 다른 사람들 따라 가는 것이 상책이라 중국인 관광객들로 보이는 사람들을 따라서 가다 보니 버스가 나오길래 냉큼 올라탔다. 


그런데 버스 안에 있는 사람들이 나를 보면서 약간 놀란 눈치로 쳐다보면서 뭐라고 수근거린다. 버스기사도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우리에게 뭐라고 말한다. 알고 보니 이 버스는 중국인 단체 관광객들을 위한 전세 버스라는 얘기 같았다.


순간 나도 당황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내렸다. 이곳에서 만난 중국인 관광객들은 대부분 밝고 명랑해 보였고, 한류의 영향인지 한국 사람들에 대한 인식도 좋아 보였다. 지나치게 시끄러운 거 빼면 괜찮은 사람들이다. 


필라투스 꼭대기의 까마귀들


이번에는 제대로 길을 찾아서 내려가다 보니 왠 대머리 아저씨가 네다섯 살쯤 된 딸을 데리고 내려가고 있었는데, 아저씨는 딸을 위한 유모차를 밀면서 가고 딸도 누구를 위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유모차를 밀면서 내려가고 있다. 그러다 갑자기 딸이 넘어졌는데 아빠가 딸을 일으켜 세울 생각을 안하고 그냥 지켜만 보고 있다. 딸이 스스로 힘으로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겨우 일어난 딸은 코를 찧었는지 연신 코를 만지면서도 뭐가 재밌는지 키득거리고 있다.


넘어져도 울지 않고 씩씩한 아이


버스를 타고 시내로 돌아오다 루체른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카펠교에서 내렸다. 카펠교는 14세기에 지어진 유럽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긴 나무다리인데 다리 자체도 아름답지만 다리 지붕을 받치는 박공 구조물 아래에 달려있는 나무 판자 위에 그려진 그림도 유명하다. 스위스 역사상 중요한 사건들을 표현한 것이라고 하는데 안타깝게도 1993년에 화재로 다리의 거의 절반이 타버렸다고 한다.  


특이한 점은 카펠교를 복원하면서 화재 당시의 상처를 거의 그대로 보전했다고 하는데, 화재도 역사의 한 부분이라는 이유라고 한다. 그래서 카펠교를 걸어보면 지금도 시커멓게 타다 남은 부분을 볼 수 있다. 


꽃으로 장식된 카펠교와 화재로 검게 그을린 부분이 많은 카펠교 내부


카펠교와 비슷하게 불탄 우리 숭례문의 복원과 비교해보면 느끼는 바가 많았다. 새로 만들어진 숭례문은 예전 모습과 많이 달라졌는데, 마치 교통사고로 다친 얼굴을 치료하는 김에 성형수술까지 같이 한 느낌이다. 그것마저도 제대로 못해서 현판이 갈라지고 난리 났었지만..


실제로 본 카펠교는 명성만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는데, 화재로 많은 부분이 타 버려서 더 그런 느낌이 드는 것 같다. 스위스 사람들은 꽃을 꽤나 좋아하는 듯 어딜 가나 꽃으로 치장되어 있는 곳이 많았는데 이곳 카펠교 다리 난간도 아름다운 꽃으로 덮혀 있었다.



카펠교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빈사의 사자 상으로 갔다. 프랑스 혁명에서 왕을 지키려다 희생된 스위스 용병들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이 부조에는 스위스 용병을 상징하는 사자가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었는데, 생각보다 크고 장엄한 느낌을 주었다.


지금 스위스는 세계에서 제일 잘사는 나라 중 하나이지만 이때만 해도 가난한 이류 국가여서 유럽 각 나라에 용병을 파견해서 먹고 살았던 시절이라고 한다. 마크트웨인은 이 부조를 보고 ‘세상에서 가장 슬픈 바위’라고 했다는데, 나도 보고 있으니 슬픈 스위스 역사와 우리의 역사가 비슷하다는 생각에 절로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빈사의 사자를 보러 온 사람들 중에 젊은 사람들로 구성된 일단의 한국인 단체 관광객들이 있었는데, 어디선가 우르르 몰려와서는

“어머, 저 사자 너무 귀여워.” 등등의 수다를 떨다 우르르 몰려가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보니 좀 씁쓸한 느낌이 들었다. 사자상에 얽힌 스위스인들의 아픈 역사를 모르지는 않았을 텐데. 


생각보다 크고 장엄한 분위기의 빈사의 사장 상


갑자기 화장실이 급해서 주변을 찾아봤지만 마땅히 화장실이 보이지 않았다. 캠핑장까지는 먼 길이어서 도저히 못 버틸 거 같았는데 호숫가 가판대에 다행이 공중화장실이 있어서 들어가 보았다. 그런데 시설이 너무 좋다. 


청소를 편하게 하기 위해서인지 변기나 내부 마감, 심지어는 거울까지 전부 스테인레스로 되어 있어서 깨끗한 느낌이다. 루체른의 공중화장실은 대부분 이런 형태였는데, 확실히 나라의 경제 수준과 공중화장실은 비례한다는 생각이 든다.


루체른 호숫가의 연주자들


리도 캠핑장을 향해 호숫가를 산책하듯 천천히 걸어 왔는데 커다란 호수의 물이 너무나 맑았다. 산책 나와있는 사람들도 많았고 군데 군데 연주하는 사람들도 많아서 평화로운 광경이다. 나중에 이런 데서 살면 어떨까 잠시 생각해봤다. 


중간 중간 백조들이 많았는데 사냥을 하는 것인지 물속에 머리를 박고 궁둥이만 물밖에 내놓고 버둥거리는 모습이 너무 우스꽝스럽다. 정말이지 이번 여행에서는 백조에 대해 가지고 있던 우아한 이미지가 산산조각 나는 것 같다. 


갑자기 어두워지며 거센 바람이 불었다.


걸어가는 중에 바람이 점점 거세어지더니 조금 전까지의 평화로운 광경은 어딜 가고 호수 물이 거친 파도를 일으키고 커다란 나무가 부러질 듯 흔들리고 있다. 바람과 파도를 피해 물가로 나와 있는 오리들이 왠지 쓸쓸해 보인다. 마치 집에서 멀리 떨어져서 쓸쓸한 우리들처럼.. 


호숫사의 오리들이 우리 모습과 같다는 생각에 쓸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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