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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우일 Feb 24. 2016

보이는 것과 말하지 않은 것

-곽경택 감독의 영화 <극비수사> (2015)

   과거에 실제로 일어났던 유괴 사건을 하나의 완성된 작품으로 재구성하여 내어놓는다는 것은 단순히 현장을 재현하려는 목적이 아닐 것이다. 영화란 분할된 쇼트들이 하나의 시퀀스를 구성하는 그리고 시퀀스들이 모여 일정한 의미를 구성하는 미학 체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이란 재료를 어떤 방식으로 배치하는가에 따라서 영화 속의 사건은 단순한 ‘사실’의 반복이 될 수도 혹은 복잡한 현실을 드러내는 알레고리가 되기도 한다. 
 

   최근 개봉한 곽경택 감독의 영화 <극비수사>는 ‘보이는 것’과 ‘말하지 않은 것’ 사이에서 관객의 호기심을 유도한다. ‘보이는 것’이란 괴한에게 유괴된 소녀를 구하기 위해 공길용 형사와 역술인 김중산이 좌충우돌하는 수사 과정을 말한다. 그리고 ‘말하지 않은 것’은 작품 속에서 밝혀지지 않는 공범의 정체를 뜻한다. 작품 속에서 공길용과 김중산의 협력에 의해 유괴된 소녀가 구출되고 범인이 검거되지만 결국 공범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는다. 궁금한 것은 실체를 알 수 없는 공범은 처음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것일까? 없었던 것일까? 
 

   명산에서 수도하고 속세로 내려온 김중산이란 캐릭터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지닌 존재로 보인다. 그는 유괴된 소녀의 사주만으로도 생사는 물론 범인에게 연락이 올 시점을 예언한다. 부산에서 서울로 배경이 바뀐 이후에도 오전 10시쯤 범인에게 다시 연락이 올 것이라고 정확히 예지한다는 점에서 김중산에 대한 관객의 신뢰도는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높아진다. 반면 영화는 경찰들의 사건 수사 과정을 신뢰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수사물의 내러티브가 사건이 벌어지고 정밀한 과학적 분석을 통해 범인을 추적하는 과정으로 구성된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영화 <극비수사>는 애초부터 합리적 수사의 가능성을 닫아놓는다. 이러한 내러티브의  구성 방식과 태도는 작품을 이해하는 하나의 중요한 키워드이다.    

   영화는 유괴 사건을 해결할 실마리가 찾지 못하고 계속해서 수사가 공회전하는 것으로 진행된다. 이런 상황에서 김중산이라는 역술가의 예지력은 어떠한 과학적인 수사 기법보다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대비된다. 영화는 역술가의 조언보다 못한 경찰의 수사력 자체의 무능을 나란히 병치한다. 이러한 병치의 의미는 유괴범을 잡으라고 했더니 집에서 자기 일을 봐주고 있는 운전기사를 심문하여 자기 뒤를 캐고 있다며 불쾌해하는 은주 아버지의 말을 통해서 보다 명료해진다.    
  

   이처럼 김중산의 예지력은 영화 <극비수사>의 서사가 진행되도록 만드는 원동력이다. 그가 예지하고 말을 하지 않으면 사건은 진행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김중산은 모든 것은 알고 있는 자이다. 스스로 말하듯 정감을 통해서 세상의 묘리를 체득한 도사라고나 할까? 어쨌든 주인공 공길용이 자꾸 범인의 검거에 실패하고 사건이 꼬여가는 상황 속에서 김중산의 예언은 그가 사건의 진정한 실체에 다가가도록 해주는 힘이 된다. 
 

   이 작품에서 사건은 두 가지로 분리해볼 수 있다. 하나는 표면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은주 유괴사건이고, 또 하나는 공길용이 결국 좌절할 수밖에 없는 부조리한 현실의 발견이다. 유괴 사건의 실마리를 해결하기 위해 범인의 정체에 다가갈수록 그것을 방해하는 조직의 부패와 부조리를 대면하게 된다. 이것은 체제의 외부에 존재하는 타자의 위치에서 1978년 한국 사회 전체를 조감하는 자의 시선이다. 공길용을 자꾸만 체제의 외부에 위치한 타자의 시선을 지니도록 이끄는 힘이 바로 김중산이라는 존재이다. 그의 말과 예지력이 필연적이고 어떠한 것보다 정확한 것으로 강조될수록 합리적이고 객관화된 것들이라고 믿어지는 상징계의 현실은 위태롭고 의심스러운 것이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영화 <극비수사>는 모두가 알고 있기에 동시에 모두가 모를 수밖에 없는 감춰진 현실의 부정성에 대한 탐문이라고 할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 속에서 사소한 시간까지 맞추는 예지 능력을 지닌 김중산이 유일하게 맞추지 못한 것이 있다면 공범의 존재 유무이다. 영화의 결말에 김중산은 공길용에게 범인에게 공범이 없었냐고 묻는다. 하지만 공길용은 조사 결과 공범은 없었다고 대답한다. 왜 영화는 공범의 존재를 암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체를 밝혀내지 못한 것일까? 어쩌면 공범은 분명 존재하지만 현실의 표면으로 드러낼 수 있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은 아닐까? 결말에 이르러 김중산이 공길용 형사에 던지는 질문은 의미심장하다.


   사실 그의 질문은 공길용이 아니라 관객의 내면을 향한다. 이것은 일종의 의도된 트릭이다. 영화 <극비수사>는 내러티브의 중간에 관객에게 공범의 존재가 있음을 암시하지만 정작 관객에게 보여준 것은 은주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공길용의 노력이 좌절되는 과정이다. 공범의 존재는 관객에게 영화를 마지막까지 계속해서 집중하도록 관심을 유도하는 장치이다. 그럼에도 김중산의 물음은 뼈 없는 빈 말이 아니다. 공범은 이미 오프닝에서부터 자신의 몽타주를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 <극비수사>는 오프닝에서부터 1978년 부산의 일상을 보여준다. 물고기를 잡고 교역하는 과정과 조직적으로 생선의 무게를 부풀려 부를 축적하는 은주 아버지의 모습, 그리고 공길용이 다른 경찰서 소속의 후배에게 자신이 범인을 상품으로 교환하는 모습은 일상에 끼어든 세계의 부정성을 보여준다. 어떠한 대상보다 돈이 우선적인 가치를 지니는 사회의 실상을 잘 보여줄 수 있는 사건이 있다면 유괴가 아닐까? 인간을 일종의 상품교환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은주의 유괴 사건은 감춰져있던 부조리한 사회의 실상의 민낯을 드러내는 계기이다.     
 

   무엇보다 부산중부경찰서 소속의 형사들은 은주의 구출보다 범인의 검거와 책임의 면피를 위해 공개수사를 주장하고, 범인을 검거할 능력이 부족하다 못해 자신들의 맡은 바 책임도 다하지 않는 무능력함을 지속적으로 노출한다. 그때마다 공길용의 이유 있는 좌절에 관객들은 공감하게 된다. 범인과 상관없는 사람에게 폭행을 휘두르고 범인의 위치를 말하라며 위협하는 경찰들의 모습은 공권력에 대한 불신을 노출한다. 영화에서 재현되는 1978년의 한국 사회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야 한다는 공권력의 의무와 책임을 방기하고 있다. 
 

    영화 <극비수사>의 공범을 독립적인 인격체가 아니라 부조리한 한국 사회구조 그 자체로 보는 것은 불가능한 것일까? 비록 김중산의 예언은 틀렸지만 영화는 처음부터 범인의 몽타주를 지속적으로 주시했다는 점에서 그의 예언은 적중했다. 이 같은 해석에 확신을 주는 것은 영화의 말미에 중부경찰서의 경찰들이 거수경례를 하고 있는 국기 게양대에서 태극기가 바람에 흔들리는 이미지이다. 자부심으로 가득해 보이는 형사들의 얼굴과 그들이 아이들을 안고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은 영화 속에서 드러난 그들의 무력한 행태와 대비적이다. 이 같은  의도된 배치와 구성된 이미지는 작품의 주제의식을 드러내고 서사 전체를 압축해준다.  
 

   바람에 흔들리는 태극기라는 환유를 통해 직접적으로 한국 사회의 부정성과 위태로움이 환기된다. 서사의 진행 과정을 통해 드러난 거짓과 위선적인 사회의 실상이야 말로 흔들리는 태극기로 상징되는 한국 사회의 실체임을 의도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공범의 실체가 부조리한 한국 사회라고 한다면 범죄는 한 개인의 부정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생산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작품 속에서 범인이 홀어머니를 힘겹게 봉양하고 있던 평범한 개인이라는 사실은 이것을 말해준다. 물론 범인의 범죄는 윤리적으로 잘못되었지만 평범한 개인이 부정을 저지르도록 유도하는 사회는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모든 부덕을 개인의 내면 문제로 환원할 수 없다. 부정한 사건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현실의 부조리를 대면할 때, 우리는 새로운 사회와 인간적 삶의 양식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 <극비수사>가 보여주는 참혹은 2015년 현재와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우리는 이미 부조리와 부패가 만연한 세계의 부정성 속에 갇혀 있으며 누구도 그 내부에서 안전하지 못하다. 더 이상 현실에서 무능하고 무책임한 공권력에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의 절망만큼이나 부정한 세계 내부에서 우리 내면의 도덕을 지켜나가는 일의 고통과 무거움을 떠올리면 삶의 길이 아득하게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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