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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우일 Feb 24. 2016

악의 순환과 반복의 알레고리

-한준희 감독의 <차이나타운> (2015)

   한준희 감독의 <차이나타운>은 일종의 성장담이다. 한 소녀가 사랑에 실패하고 어른이 된다. 성장은 죽음을 전제한다. 과거의 내가 죽어야 지금의 내가 산다. 그러므로 영화 속에서 ‘엄마’의 죽음은 필연이다. 엄마는 자신의 과거이기에 엄마가 죽어야 내가 산다. 일영에게 세계는 의심스럽지 않다. 지침계인 엄마가 있고 세계는 안정적이다. 빚을 갚지 못하면 누군가를 죽이고, 장기를 적출하며, 떼인 돈을 받아야 사는 밑바닥 인생이지만 그 일을 행하는 가족을 사랑한다.   
 

   그녀의 가족은 나름의 윤리적 원칙도 있다. 밥을 먹으면 일을 해야 한다. 일을 하지 않으면 존재는 필요가 없다. 필요가 없으면 버려진다. 모두가 버려지기 위해 일을 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버려진 것들을 치우는 것은 일이 된다. 버려지는 것이 일이 되는 사회의 순환은 작품 속에서 자연스러운 것으로 남겨질 뿐 의심되지 않는다. 이러한 순환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극단까지 밀고나가는 인물은 홍주이다. 그는 자신을 보호고자 하는 생존본능과 일을 해야 살 수 있다는 강박으로 존재한다. 그는 판단하거나 사고하지 않는다. 주어진 것 이상을 탐하거나 꿈꾸지 않는다. 그는 성장이 멈춰진 자동기계이다. 이미 답이 내려진 일을 수행한다. 밥을 먹고 노동을 한다. 움직인다. 관념이 물러서고 신체가 전면화 된다. 그가 우리와 다른가? 그는 ‘나’이다. 단지 나는 밥숟가락을 들고 회사를 생각하는 것이 다를 뿐이다.  
   

   차이나타운에서 꿈은 상품이다. 이 세계에서 꿈은 돈을 먹고 자란다. 그러므로 가난한 석현의 꿈은 백일몽이다. 석현은 부정적인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인물이다. 영화 속에서 다른 인물들이 환경 내부에서 순환한다면, 석현은 극복하고자 시도하는 유일한 인물이다. 사실 그의 꿈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아버지가 자신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한 믿음 아래 꾸는 꿈이기 때문이다. 석현을 사랑하게 된 일영이 아버지를 믿느냐고 물었을 때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답한다. 결과적으로 석현의 믿음은 쉽게 무너져 내렸다. 아버지는 빚으로부터 도망쳤고 아들의 장기는 상품이 되어 자본 앞에 던져졌다.  
 

   아버지의 빚이 이자를 낳는다. 석현은 이자를 갚기도 빠듯하다. 시간은 돈이다. 왜냐하면 시간은 이자를 낳기 때문이다. 흘러가는 시간이 돈이라는 것은 우리의 현재를 규정하는 가치의 은유이다. 파국은 시간에 값을 매길 수 없는 무능의 순간 찾아온다. 석현은 아버지가 자식을 버릴 수 없다고 믿지만 실제로 일어났다. 영화는 왜 아버지가 석현을 버렸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결과만을 보여줄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어떤 상황인지 짐작한다. 보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는 말은 우리가 부정적인 세계의 내부에 개입하고 있다는 말과 뭐가 다를까?    
 

   영화 속에서 우곤은 과묵하며 자신의 주어진 일을 수행하는 데 막힘이 없다. 그에게 폭력과 살인은 일종의 업무다. 그런 그도 일영만큼은 염려한다. 일영이 위기에 처했을 때 바로 달려온 사람이 우곤이다. 쓰러진 일영을 보고 그는 엄마에게 말한다. 가족끼리 이래도 되느냐고. 나는 우곤에게 묻는다. 가족이 아닌 사람에게 그래도 되느냐고. 그의 세계는 가족과 밖의 나머지로 구분된다. 그는 일영을 살리기 위해 홍주를 죽였다. 더불어 가족을 지키기 위해 애썼지만 자신도 지키지 못했다. 한 개인의 능력으로 가족이란 공동체가 지켜질 수 있을까? 그의 사고 속에는 타인들과의 연대가 가능성 속에서 배제되어 있다. 
 

   철학자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타인을 사랑하는 것만큼 좋은 것은 없다는 사실을 안다고 말했다. 가족을 보호하는 것은 한 개인의 능력이 아니다. 타인과의 사랑과 그들과의 협업으로 이룩된다. 이런 맥락에서 영화는 파국적 현실에서 가족이라는 공동체조차 지켜질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치도는 엄마를 닮았다. 그는 차이나타운에서 암흑의 세계를 지배하는 엄마를 닮으려 했지만 결국 버림받는다. 그의 모든 것들이 배후에 있던 엄마가 쥐어준 장난감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어떤 심정이었을까? 죽어가며 그는 외친다. “나도 엄마 새끼잖아!” 그런데 치도는 몰랐다. 사실 그가 죽은 이유는 엄마의 아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영화를 보면 치도는 계속해서 자신이  성장했다는 사실을 엄마에게 노출한다. 언젠가 엄마는 일영에게 경고한 바 있다. 자신이 일영을 데리고 있는 이유는 그녀가 아이에서 더 이상 자라날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차이나타운을 규정하는 법의 원리는 분명해진다. 엄마는 아이가 자라면 살해하고 아이는 자신이 죽기 전에 엄마를 살해한다. 그러므로 치도가 계속해서 자신이 엄마만큼의 능력이 있다고 과시하는 것은 스스로의 죽음을 앞당기는 일이다. 영원히 자라지 말아다오, 내 사랑하는 자식들아. 자식을 잡아먹는 엄마의 이미지는 불편하다.  

   정신분석학적으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아이가 엄마와의 유대관계를 끊고 아버지의 언어라고 은유되는 사회적 상징을 습득하는 과정을 말한다. 그런데 작품에서 아이가 어른이 되면 엄마는 자식을 가차 없이 공격하고 살해한다. 우리가 사회적 상징을 습득하고 어른이 되는 과정, 즉 주체화 과정이 엄마라는 기호로 상징되는 오염된 것들을 억압함으로써 이룩된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그 억압되고 오염된 것들은 어김없이 회귀해서 우리가 외면하고자 했던 진실을 드러낸다. 이때 우리의 평범한 일상적 세계는 균열이 발생하고 의심스러워진다. 투명한 것들에 들러붙는 불투명한 것들로부터 우리는 분리될 수 없음을 자각하게 된다.   


   일영의 비극은 의심으로부터 시작된다. 의심은 대상과 나 사이에 거리를 만든다. 그것의 결과는 나와 대상의 거리가 좁아지거나 멀어지거나. 어떤 쪽도 불편하다. 의심은 인간 특유의 것이다. 근대는 의심의 역사다. 신을 잃은 인간들이 과학을 통해 믿음을 구하는 역사이고, 신의 죽음과 함께 진리의 확실성을 상실한 시대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의심은 신도 고치지 못한다. (고쳤다면 모두가 천국에 가 있겠지?) 사랑은 불온하다. 일상의 지각을 뒤흔든다. 대상이 새로워진다.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고 했던가? 거짓이다. 일영은 사랑을 앓다가 우울해졌다. 첫사랑에게 빚을 받으러 갔다가 목숨을 받았다. 엄마가 남자를 죽였다. 아니 일영 자신이 죽였다. 엄마는 일영을 대신해서 해야만 할 일을 했을 뿐이다. 부정적인 현실에서 일영이 살아남는 법을 엄마는 가르치고 있을 뿐이다. 냉혹하지 않으면 죽는다. 누군가를 사랑하지 말라. 대가가 크다. 남자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결국 고민 끝에 일영은 엄마를 죽이기로 결심한다. 
 

   영화에서 ‘차이나타운’이라는 공간은 현재 한국 사회 전체에 대한 환유로 제시된다. 차이나타운은 돈이 우선되는 곳이며, 부모가 자식을 버리고, 대가로 자식의 신체를 바치는 곳이다. 차이나타운의 부정성은 엄마와 함께 공직자들이 술을 한 잔씩 돌려 마시는 장면을 통해 사회 전체로 확대된다. 그렇다면 차이나타운을 지배하는 엄마는 악의 화신인가? 먹이사슬의 포식자로 보이던 엄마가 일영의 손에 죽임을 당함으로써 그녀도 장기판의 말에 불과함이 드러난다. 엄마라 불리는 존재도 선대 엄마를 죽이고 차이나타운을 점유한 말에 불과하다. 즉 엄마는 차이나타운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나타운이 엄마를 붙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영이 엄마를 죽인다는 것은 그녀가 어른이 되었음을 뜻하지만 동시에 차이나타운의 세계를 그녀가 받아들였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일영이 엄마의 제사를 손수지내는 엔딩을 통해 알아차릴 수 있다. 
 

   이 지점에서 나는 묻는다. 일영은 성장한 것일까? 성장이란 과거의 나와 절연이다. 그렇다면 일영은 과거와 달라졌는가? 그녀는 엄마가 되었을 뿐 기성의 세계를 새롭게 바라보는 주체가 되지 못했다. 순환하는 사회의 구조에 스스로를 제물로 던졌을 뿐이다.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을 덧붙이며. 영화 <차이나타운>은 세계의 부정성을 환기하면서도 그것을 내면화하는 태도가 나타난다. 이 같은 내면화 과정은 사회적 징후로 보인다. 과거 영화들이 선악의 모호함에 대해 지속적으로 문제제기 해왔다면 최근 한국영화들은 악의 불가피성을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다. 선악의 모호함과 악의 불가피성 사이에는 대상을 이해하는 심연의 차이가 있다. 영화 속에 나타나는 미묘한 태도 변화는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이 점은 성찰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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