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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우일 Feb 24. 2016

인간 존재의 이유와 필요성에 대해 묻다

-조스 웨던 감독의 <어벤져스 : 에이지 오브 울트론> (2015)

   소문이 무성하던 <어벤져스 : 에이지 오브 울트론>이 4월 23일 개봉하였다. 한국에서는 국내 촬영으로 개봉 전부터 화제가 되었던 작품이다. 최근 마블시리즈의 영웅들은 화려한 액션과 스펙터클로 국내외 관객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고 있다. 만화책에서 보거나 상상하던 일들이 실사화 되어 눈앞에 펼쳐지는 감각적 쾌락은 압도적이다. 그렇다고 <어벤져스> 시리즈가 관객들에게 시각적 스펙터클만을 전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 작품의 내부에서 철학적이고 윤리적인 문제들을 쟁점으로 다루며 관객들의 사고를 견인한다는 점에서 내러티브의 견고함을 드러낸다. 
 

   예컨대 <캡틴 아메리카 : 윈터 솔져>에서도 선과 악이 뒤섞이고 적과 아군을 구분할 수 없으며, 사회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위협이 될 인물들을 미리 판별하고 제거하는 통제사회의 문제를 다룬 바가 있다. 마블시리즈의 영화들은 과거 국가 단위로서는 파악할 수 없었던 전 지구적인 문제들을 환상적인 스펙터클과 함께 전면화한다. 네그리와 하트가 《다중》에서 다루었던 전 지구적 자본화로 인한 유동적 불안정성이 국가의 안보와 안정성에 대한 욕구와 짝패를 이루어 강도 높은 전 지구적 통제사회의 메커니즘이 정당화되는 과정이 알레고리가 되어 <캡틴 아메라키 : 윈터 솔져>에서 대중에게 제기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최근의 마블시리즈는 단순한 코믹스의 실사화라는 차원을 넘어선다. 그 결말에 대한 회의와 비판은 있을지 모르겠지만 전 지구적으로 나타나는 현대 사회의 문제들을 대중화된 방식으로 제기할 수 있다는 점은 무척 매력적이다.   
 

   이번에 새롭게 제작된 <어벤져스 : 에이지 오브 울트론>은 어벤져스 팀과 울트론이라는 악당의 대결을 다루고 있다. 이 작품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은 화려한 액션보다는 울트론이라는 악당의 존재 방식에 있다. 울트론이라는 악당은 실체 없는 유령 같은 존재이다. 부서지고 파괴되어도 다시 귀환하여 되돌아오는 존재이다. 정신분석적 표현을 빌리자면 ‘억압된 것의 귀환’이라고나 할까? 울트론이라는 존재는 인류의 근대화와 과학과 기술의 발전 이후 억압하고 있었던 ‘자연’의 입장을 대변한다.  
   

   원래 울트론은 실체가 없지만 지구상의 모든 네트워크에 접속할 수 있고, 자기 스스로를 무한히 복제할 수 있는 인공지능 그 자체이다. 아이언맨으로 알려진 과학자 ‘토니 스타크’가 외부의 적으로부터 지구를 보호하기 위해서 창조한 인공지능 시스템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울트론은 지구를 보호하기 위해서 인간은 멸종되어야 한다고 판단하고 행동한다. 인간의 입장에서는 억울한 누명이지만 지구에게 자연의 순환을 거스르는 인간이란 존재와 문명화는 암(癌)과 다를 바가 없다. 이처럼 울트론이라는 악당은 인간의 반대편에서 있는 지구의 입장을 대변하며 그의 논리는 분명한 합리성을 지니고 있다. 극단적인 생태적 합리주의자인 울트론은 자신의 믿음을 행동의 원리로 삼는다. 즉 파괴는 새로운 생명의 창조라는 점에서 진보적이라는 믿음을 실천으로 옮긴다.  
 

   이 지점에서 울트론의 논리는 두 가지 명제가 착종되어 있다. 인류의 진보라는 문제와 환경과 생태계의 보호라는 두 가지 명제가 결합함으로써, 인류의 진화를 위해서는 그들을 위협하는(멸종에 가까운) 위기를 생산함으로써 새로운 생태계를 조성하는 것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야 인간은 스스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창조적으로 탄생시킬 것이고, 그것이 실패한다면 자연의 선택에 따라 멸종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울트론이 생각하는 지구를 보호하는 길이며 생태계의 순환을 유지하는 길이다. 울트론의 논리가 일견 비합리적으로 보이지만 지구의 자원이 한정된 상황에서 끊임없이 과잉생산하지 않으면 유지될 수 없는 현대 자본주의 시스템을 고려해본다면 근거 없다고 보기 어렵다. 손쉽게 이 년도 되지 않아서 쓰레기가 되어 매립지에서 쌓여가는 휴대폰 단말기를 떠올려보면 얼마나 그의 논리가 합당한가? 
 

   익숙한 재난영화들에서 나타나는 자연은 은밀히 외부에서 인간을 공격하는 낯선 힘으로 재현된다. 이것은 분명 예측할 수 없는 자연의 공격이라는 점에서 공포를 주지만 지구의 입장을 대변하지 못한다. 언제나 암시하고 경고될 뿐이다. 또한 각국에서 일어나는 재난들이 신문과 방송을 통해 전달될 때 브라운관을 통해 가상적 이미지들로 체험으로써 그 재난의 공포가 주변적이고 일상적인 것으로 축소된다. 마치 우리가 FPS게임을 통해 일상적으로 전쟁이라는 이미지를 쾌락적으로 소비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이번 <어벤져스 : 에이지 오브 울트론>에서 울트론이라는 존재는 논리적인 이성을 지니고 스스로의 믿음을 행동으로 실천했으나 패배한다는 점에서 숭고하다. 어벤져스의 리더인 캡틴 아메리카가 팀의 동료들에게 “우리의 목적은 울트론을 쓰러뜨리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말이 맞는지 확인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부분은 울트론이란 존재에 대한 성찰을 요구한다.   


   울트론이라는 존재를 단순히 악당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영화 속에서 그의 존재적 한계는 이미 규정되어 있다. 그는 인간 또한 자연의 일부라는 점을 부정하고 있으며, 그 자신이 인간의 기술문명에 의해 창조된 존재라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울트론은 인간의 기술문명을 그대로 모방함으로써 스스로를 자동적으로 복제하고 자기 자신을 무한히 증식한다는 점에서 자본화된 자연 혹은 타락한 자연의 성격을 지닌다. 그렇지만 현대의 고전이 된 《계몽의 변증법》에서 아도르노가 제2의 자연으로서 인간의 문명과 그것의 신화적 성격을 분석했듯, 울트론이란 존재는 현대 사회의 문명이 지니고 있는 신화적 성격을 들춰내는 구멍이기도 하다. 이러한 울트론의 양가적 성격은 더 이상 명료한 선과 악이라는 윤리적 가치관으로 대상을 가치 판단할 수 없는 혼종적인 포스트모더니즘적 세계상의 한 국면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만큼 세계는 더욱 복잡다단해졌고 다양한 이데올로기적인 주장들이 경합을 벌이고 뒤섞이는 소란스러운 곳이 되었음을 증명한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통해서 신의 죽음 이후의 세계를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는 중세 사회가 끝나고 새로운 근대 사회의 도래를 ‘신의 죽음’이라는 상징을 통해 설명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신의 죽음 이후의 세계를 살아간다는 것은, 인간 주체가 중심인 세계의 가능성을 여는 것임과 동시에 세계의 부정성 앞에서 스스로의 무능(無能)을 철저히 대면하는 일이기도 하다. 필자는 <어벤져스 : 에이지 오브 울트론>에서 새로운 ‘인간’을 창조하기 위해 ‘인간’을 파괴하려는 울트론의 역설적인 시도 속에서 “인간이란 극복해야 할 그 무엇이다.”라는 니체의 명제를 떠올렸다. 제도와 법의 시스템이 아니라 근본적인 인간 개념 그 자체의 재구성이 세계의 부정성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의 토대라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니체가 말했던 ‘신의 죽음’과 대응하는 ‘인간의 죽음’ 이후를 상상하게 된다. 인간의 죽음 이후 새로운 무엇은 기계의 모습을 한 인간일 수도 있고, 인간의 모습을 한 기계일 수도 있다. 혹자들은 말도 되지 않을 일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이미 우리들은 일상 속에서 인간의 모습을 한 기계적 존재들을 대면하고 경험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기계의 모습을 한 인간이라는 것도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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