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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우일 Feb 24. 2016

거리의 상상력, 폭력의 기원을 말하다

-유하 감독의 <강남> (2015)

 1.


  

 유하 감독의 신작 <강남 1970> (2015)이 개봉하였다. 이 영화는 한국 사회의 부조리한 현실 구조가 탄생하게 된 기원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인간의 폭력적인 본성과 그것을 탄생시키는 부조리한 현실적 조건들이 만나면서, 황무지에 가까웠던 ‘강남’은 인간의 욕망이 소용돌이치는 공간으로 질적 변모를 일으킨다. 영화에서 ‘강남’은 단순히 물적인 토대가 아니라 향후 자신들의 부와 미래를 결정하는 잠재적 가능성의 공간이며, 그 잠재성을 자신의 것으로 독점하고자 하는 인간들의 욕망들이 교차하는 장소이다.  


   영화 <강남 1970>에서 보여주는 인간 본성에 대한 관찰의 태도는 감독의 여타 작품들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고려 말기 공민왕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인간들의 비틀린 사랑과 성애의 비극성을 다루었던 <쌍화점> (2009)은 유하 감독의 세계를 이해하는 구조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감독은 고려 말이라는 배경을 둘러싼 역사적 사건을 중심으로 그 역사적 틀과 공간의 물적 조건 아래에서 지위와 상관없이 그 내부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본성에 대한 관찰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또한 유하 감독의 <하울링>(2012)이라는 작품은 늑대의 눈으로 바라본 인간 세태에 대한 관찰의 보고서이다. 이 작품에서 늑대는 통제할 수 없고 길들일 수 없는 욕망 그 자체의 움직임이며, 자신의 욕망을 제어할 수 없을 때에 직면하는 죽음충동 그 자체이다. 도시의 거리를 활보하고 있지만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 늑대의 존재는 유령처럼 도시의 곳곳을 떠돈다. 영화 <하울링> (2012) 속의 늑대는 단순한 동물이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윤리적 금기를 어기면서 부에 대한 욕망으로 인해 곪아가는 도시에 침입한 생채기(실재의 흔적)이다. 도시를 유령처럼 활보하는 늑대의 잔혹한 공격은 관객에게 이러한 잠언을 던져준다.  


   ‘당신들의 눈을 가리고 있는 그 환상적 욕망은 다름 아닌 자기 파괴의 과정일 뿐이라고!’


   늑대의 물어뜯음, 할큄 그리고 선혈이 낭자한 상태로 죽어가는 시신들의 모습은 바로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의 내면에 상처 내기 위한 일종의 윤리적 이미지이다. 우리는 항상 죽음을 망각하고 산다. 마치 나에게는 그런 죽음이 도래하지 않을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늑대의 선명한 이빨 자국을 남기며 물화된 죽음은 하나의 실체로써 죽음을 우리의 중심에 개입시키며,  존재로서의 윤리를 자문하도록 한다.   


   유하 감독에게 인간의 본성은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자신을 둘러싼 물리적 조건의 결과이다. 물론 그것들의 인과적 과정은 너무 복잡하여 망각되기 때문에 선명하게 알아차릴 수 없지만 어느 순간 우리를 공격하고, 나의 주체를 규정짓는 하나의 사회적 관계망을 구축해버리게 된다. 이러한 거미줄 속에서 파닥거리는 하나의 먹이처럼 붙잡힌 인간의 모습은 음습하고 서글픈 것이 되기 쉽다. 이러한 유하 감독의 시선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 거리 삼부작이다.  



  2.


   <말죽거리 잔혹사> (2004)는 1978년의 학원 풍경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학원 액션 영화이다. 이 영화는 전학생 현수가 강남의 정문고로 전학을 오면서 벌어지는 몇몇의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가장 합리적이어야 하는 학교가 비합리적 공간으로 제시된다. 사회의 부정과 폭력은 갑작스럽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내부에서 양육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학교라는 공간은 1978년 한국 사회의 메커니즘을 고발하는 알레고리이며, <말죽거리 잔혹사>는 개인적으로는 유하 감독의 유년을 다룬 개인적인 성장담이겠지만, 사회적 차원에 놓으면 우리의 무의식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가 우리의 일상 속에서 끼어드는 방식에 대한 섬세한 관찰이기도 하다.  
 

  <말죽거리 잔혹사>는 표면적으로 1978년을 배경으로 해서 몇몇 고등학생들의 성장담이지만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암시하는 장치들이 사용된다. 군복을 입은 선생이 학생을 군화로 짓밟는 무자비한 폭력, 자신의 혈기왕성한 에너지를 어떻게 소비해야 할지 모르고, 학교의 짱이 되기 위해 다투는 어린 소년들, 현수가 보여주는 이소룡이라는 액션 배우에 대한 동경 등등 이미 영화에는 폭력의 알레고리들이 가득하다. 이때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폭력의 이미지가 발화되는 방식이다. 이 작품에서 우리가 목도하는 폭력은 섬뜩하고 잔혹한 것이 아니다. 마치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다비드 상’처럼 아름다운 남성의 육체적 매력과 혼합된 미학적(美學的) 이미지로 제시된다. 당시 몸짱 배우로도 알려진 권상우의 육체는 현수라는 캐릭터를 채우고 있는 남성성을 대변해준다. 현수의 아름다운 육체의 시각성이 주는 쾌락이 그를 지배하고 있는 폭력의 욕구를 은폐한다.   
  


   강남으로 전학을 온 평범한 학생인 현수는 비열한 방법으로 학교의 짱이었던 우식을 물리치고, 그의 자리를 차지한 종훈을 응징하기 위해서 이소룡의 절권도를 연마하며, 육체를 수련한다. 배우 권상우가 연기한 현수의 단련된 육체는 타인에 대한 계획된 폭력이 행사되기 위해 준비되는 과정이 얼마나 아름답고 건강하게 보일 수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관객들의 시선은 이 시퀀스를 보는 동안 현수의 시선과 분리되지 않는다. 현수의 건강한 육체의 아름다움이 주는 감각적 쾌감이 그의 폭력에 대한 우려보다는 그것의 건전함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현실화한다.  


   그렇게 현수가 자신의 육체를 완벽히 단련하고, 스스로 이소룡이 되었다고 믿는 순간, 다시 말해서 영화 속에서 항상 정의라는 가치를 위해서만 자신의 무술을 구사하는 이소룡이라는 자아-이상의 모델과 현수가 자신의 육체를 일치시키는 순간, 우리는 현수의 폭력에 함께 가담하게 된다. 이미 폭력은 현수의 아름다운 육체 속에 자신을 숨기고,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정신과 육체를 뱀의 똬리처럼 감아오는 것이다.


   문제의 본질은 종훈을 쓰러뜨리는 것이 아니라 폭력의 구조이다. 현수가 종훈을 물리치고 학교의 짱이 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폭력은 다시 반복될 것이고, 더 강한 사람이 있다면 현수를 물리치고 군림할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종훈과의 마지막 결투가 끝나고 현수가 학교를 스스로 떠난다는 점과 충동적으로 일그러진 얼굴과 함께 내뱉는 현수의 대사는 정서적 울림을 전달한다.


   “이런 씨발, 대한민국 학교 좆까라고 그래!”  

   그렇다. 충동적으로 내뱉는 이 한마디의 말이 여전히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폭력을 통해 학교의 짱이 되려는 욕망이 아니라 폭력을 까부수는 충동의 돌출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잘못되고 부정적인 것이 있다면, ‘좆까!’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3.


   유하의 거리삼부작 중에서 두 번째 작품인 <비열한 거리> (2006)는 조직폭력배 병두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비열한 음모와 배신이 난무하는 거리의 풍경을 진지하게 다루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병두라는 한 개인의 출세와 실패를 다루고 있지만 그가 서있는 쓸쓸한 거리의 현실과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현장이 분리되어 있는 것 같지 않다.


   이 영화에서 눈여겨볼 지점은 병두라는 인물이 민호라는 친구에게 보이는 신뢰와 믿음이 생성되고 실패하는 과정이다. 삼류조폭으로 생을 마감하는 것이 두려운 병두는 황회장이 제안한 청부살인을 저지르고, 자신의 두목을 배신한다. 병두는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 타인과의 신뢰와 믿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 잘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연히 거리에서 만난 친구 민호와의 신뢰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한다. 영화의 결말에 이르러서 생활이 안정되고 남들과 같이 사랑을 하고 우정을 나누며 살고 싶었던 병두의 꿈은 민호의 배신에 의해서 한순간에 망가지고 거리에서 자신의 조직원에게 피살되며 모든 것을 잃는다.


  병두의 칼부림이나 살인 그리고 배신이 인간답게 “남들처럼 사는 것”이 목적이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지불한 대가였다는 것을 우리는 상기해야 한다. 남들처럼 인간답게 사는 일상적 삶이라는 것이 자신을 비열한 거리에 내던져지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것이라면, 이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도 역시 부정성 속에 가로놓여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믿음을 준 사람을 배신하고, 그 배신을 통해서만 자신의 생존을 도모할 수 있는 사회의 구조가 정상적인 것일까? 병두의 꿈은 기존의 사회적 체계의 가치와 동일화되고자 하는 의지아래에서만 가능한 것이기에, 그가 꾸고 있는 꿈의 외부에는 사회와 동일화되기를 부추기는 부조리한 현실의 사회구조가 버티고 있음을 확인시켜준다.  



  거리의 삶이란 무엇인가? 거리라는 공간은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지만 또한 어떠한 관계를 이루지 못하고 무의미하게 스쳐지나가는 장소이다. 거리는 정주하는 공간이 아니다. 거리는 순간적으로 존재했다가 사라지는 유동하는 공간이다. 영화에서 병두가 민호를 우연히 거리에 만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하나의 은유로 읽힌다. 이렇게 보면 병두와 민호의 관계의 비틀림은 예정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영원히 병두의 미래를 보장해줄 것 같았던 황회장의 배신은 끊임없이 변동하는 거리의 삶이 지닌 무의미성을 부각시킨다.


   이처럼 유감독은 <비열한 거리>를 통해서 현대의 우리 일상적 삶이란 겉으로 보기에는 고요하고 평안하게 보이지만 음모와 배신이 도사린 비열한 삶의 방식에 불과함을 관객에게 보여준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비열한 거리>는 길 위에 갇혀서 어디로 나아가야할지 모르고 방황하는 이 시대의 암울한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말죽거리 잔혹사>가 폭력이 일상의 삶에 끼어들어가 있는 방식에 관하여 다루었고, <비열한 거리>는 폭력이 없이는 일상의 삶을 유지할 수 없게 된 부정적 현실을 진단하고 있다면, <강남 1970>은 이전의 작품들에 나타난 징후들의 기원을 정치적 사회적 맥락에서 다루고자 했다는 점에서 폭력과 사회적 구조의 관계에 대한 질문의 연속성을 유지하고 있다.
 
  

  4.


   영화 <강남 1970>은 ‘서울도시계발계획’을 앞둔 시점을 중심으로, 과거에는 농경지에 불과했던 ‘강남’이 인간의 욕망을 부추기는 공간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다룬다. 영화는 액션과 느와르의 문법을 따르면서도 인물들의 욕망을 움직이는 실재로써 배후의 정치적 사회적 관계들을 보여주려고 애쓴다.


  정치적인 이유로 여당에서 많은 대선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서울도시개발계획’이 준비되고, 중앙정보국장을 통해서 이 사실을 알게 된 서의원과 박의원은 강남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경쟁적으로 대립한다. 김종대와 백용기는 이 과정에서 각각 서의원과 박의원을 대신해서 온갖 범죄를 저지르고 이용당하다가 모두 비극적 죽음을 맞는다. 이처럼 영화는 강남의 노른자 땅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음모를 꾸미고 배신하는 과정을 보여주며, 그들이 살아가는 현재를 앞으로 강남이라는 땅이 가져다줄 행복한 미래와 대조시킨다.


   강남이라는 땅을 둘러싼 소용돌이 속에서 목숨을 내걸었던 종대와 윤기가 꿈꾸었던 성공은 결국 그들이 품었던 환상이었음이 밝혀진다. 둘을 이용하고 강남의 이권을 챙긴 서의원의 청부지시에 따라 둘 모두가 살해됨으로써 강남은 애초에 그들에게 허락된 공간이 아니었음이 드러난다. 강남이라는 땅의 약속은 일의 빌미를 제공하고 계획했던 사람들의 것이었다. 영화는 엔딩 신에서 시간이 흘러 늙은 서의원이 강남의 중심지에서 국회의원으로 출마하여 “다시 저를 믿어 주십시오!”라는 외침과 함께 시민들 앞에서 연설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영화의 마지막 이 장면은 유하 감독이 강남이라는 공간을 중심적으로 다룬 이유를 설명해준다. 강남이 서울의 중심지로 탄생되는 과정을 냉정하게 보여줌으로써 어떻게 한국 사회의 비합리적이고 불균형적인 사회구조가 태동하게 되었는지 밝히고 있다. 바로 강남이라는 공간은 그 탄생 자체가 수많은 폭력과 부정 위에서 건립된 한국 사회의 소돔(Sodom)인 것이다. 비열한 방법으로 강남의 이권을 차지한 서의원이 당당하게 국회의원으로 출마하는 과정은 그 자체가 한국 사회의 부정적 현실이 지속되고 있음에 대한 환유이다.   


   영화 <강남 1970>에서 길수라는 인물은 영화 전체에서 가장 진부한 캐릭터로 보인다. 길수는 폭력 조직의 이인자였지만, 자신의 삶에 회의를 느끼고 거리를 떠돌던 주인공 종대를 거두어 세탁소를 운영하며 살아간다. 현실의 부조리한 삶에서 타인을 갈취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목격하고 있는 종대에게는 그의 원리원칙주의는 답답하게만 보인다. 또한 길수라는 인물은 종대의 일에 대해서만큼은 대신 감옥에 갈 정도로 희생적이라는 점에서 아버지나 다름이 없다. (영화 속에서 길수가 죽음을 당하고 난 이후에 밝혀지지만 자신의 호적에 종대를 아들로 입적시킨다.)


   종대가 선택의 기로에 있을 때마다 그 선택이 가지는 무게를 길수는 환기시킨다. 그리고 길수는 이미 모든 일을 예감하는 사람처럼 종대의 운명을 예언한다. 지금의 욕망을 포기하지 않으면 그것의 대가로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종대는 그것을 무시하기로 결심한다. 어리석지만 그 어리석음이 없다면 인간이 아니기에 그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면서도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지 못하고 나아간다. 이런 점에서 길수라는 인물은 그가 용대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기 전까지 종대를 제어하는 상징적인 아버지의 법으로서 기능을 수행한다. 길수라는 인물은 종대가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지 못할 때 맞이할 죽음을 대면하지 못하도록 그의 일을 훼방하며 지연시키는 것이다.
 

   반면 길수가 지연시키고 있는 종대의 욕망을 부추기는 것은 강남이다. 강남은 서울도시개발계획에 의해서 부가 약속된 땅으로, 길수가 지키고자 하는 그 법과 윤리적 가치들이 얼마나 그가 사는 세계에서 무기력한지를 보여주는 비교의 대상이다. 땅을 사고파는 교환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차익을 통해 부를 획득하는 방법을 깨달은 종대에게 강남은 단순한 토지가 아니라 교환가치를 지닌 상품으로 보일 뿐이다. 영화는 중반까지 종대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교환의 원리에 무지하다가 습득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된다. 그러므로 강남이라는 공간을 규정짓고 있는 것은 경제적 교환가치의 논리이다. 영화의 중반에 길수가 용기의 배신으로 죽음을 당한 이후 종대의 욕망을 제어할 장치가 사라지면서 그는 결국 자본주의적 교환가치의 논리에 함몰된다. 그리고 종대 스스로가 선택한 논리에 따라서 서의원에게 더 이상 매력적인 상품가치를 잃는 순간 다른 대상으로 교환된다.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더 인상적이다. 서의원에게 고용된 킬러에 의해 총을 맞고 긴 터널로 진입한 기차 밑으로 내던져진 종대가 바닥을 기며 터널 밖으로 보이는 빛을 향해 일그러진 얼굴로 기어나아가려고 꿈틀거린다. 오로지 종대가 바란 것은 긴 무저갱과 같은 어두운 삶에서 터널 밖에 보이는 빛을 향한 몸부림이었다는 것을 시점 쇼트(point of view)를 통해서 잘 보여준다. 하지만 종대가 길수의 말을 어기는 순간 이미 그는 빠져나올 수 없는 검은 터널과 같은 늪에 빠져버렸다. 그것은 영원히 저 밖의 빛을 동경해야하는 무덤에 갇힌 삶인 것이다.     
 

   유하 감독의 영화는 인간의 본성과 욕망이 사회적 관계 속에서 배치되는 과정을 냉정히 관찰하고 그것을 관객에게 상연한다. 특히 1970년대에서부터 현재까지의 한국 사회의 역사적 현실을 부정의 중첩으로 바라보고, 그 현실이란 음모와 배신이 난무하는 ‘거리의 삶’으로 규정짓는다. 현수가 학교를 나와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거리를 전전하고, 병두가 사람 없는 외진 길목에서 칼을 맞고 죽으며, 종대와 용기가 정체모를 낯선 인물들에게 살해당하고 인적 없는 길가에 버려지는 것처럼 말이다.


   이 거리의 삶이 가진 유일한 원리는 자신의 욕망을 현실에서 구현하기 위한 힘의 축적과 폭발 밖에 없다. 홉스가 말한 “만인을 위한 만인의 투쟁”을 일으키는 공간인 한국 사회에 대한 고발이다. 그렇다면 국가는 이 투쟁을 멈추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유하 감독은 회의적인 것 같다. <강남 1970>에서 보여주듯 국가는 강남이라는 공간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그 투쟁을 제어하지 않는다. 그것을 이용하고 획책하며 굽어보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유하 감독의 영화들에 나타나는 인물들의 삶이 우리와 전혀 관계가 없는 동떨어진 타자들의 삶인 것일까? 필자가 보기에 거리를 전전하다가 스러져 죽어가는 삶이란 우리의 현장과 다를 바가 없다. 언제든 거리로 내몰릴 수밖에 없는 현장에 우리는 불안을 버티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유하 감독이 지속적으로 보여주고 환기하고 있는 우리 현실에 절망하기 보다는 새로운 가치의 생산과 배치를 함께 사유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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