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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우일 Feb 24. 2016

어느 저녁 우리는 그들과 나란히 서 있을 것이다

-부지영 감독의 <카트> (2014)

1.  


 

  부지영 감독의 영화 <카트>(2014)가 개봉 10일 만에 60만 관객을 모으며, 한국영화 순위에서 1위를 차지했다. 영화관은 <인터스텔라>와 <헝거게임: 모킹제이>같은 대작들이 상영되고 있는 상황에서 앞서의 작품들과 경쟁할 만한 블록버스터급 한국영화는 아직 개봉하지 않은 실정이다. 굳이 현재 개봉된 한국영화를 추려보자면, 김덕수 감독의 <아빠를 빌려드립니다>와 오기환 감독의 <패션왕> 그리고 부지영 감독의 <카트> 정도일 것이다. 
 


 

  현재 <카트>가 한국영화 중에서 60만 관객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은, 아직 경쟁할만한 한국영화가 없는 상황이 작용했을 것이다. 또한 다른 작품들과 다르게 과거 이랜드 홈에버 사건을 소재로 삼은 측면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상업영화이면서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문제를 전면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도 흥행의 요소로 볼 수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문제가 상업영화에서 전면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그것이 이제 우리 사회의 보편적인 문제가 되었음을 알아차리게 해준다. 요즘 아이들의 꿈이 “정규직”이라니 웃으면서도 아픈 농담이다. 어쩌면 영화 속의 인물들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정규직 노동자라는 삶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젊음을 착취하면서, 그것에 ‘열정’이라는 이름의 딱지를 붙이는 사회의 구태는 일상이 된지 오래다. 
   


 

  최근 ‘SNL코리아’라는 개그 프로그램에서 “아프니까, 청춘이지!”라고 말하는 회사의 부장님에게 어린 남자 직원이 “아프면 병원에 가야죠.”라고 말하는 냉소는 누구를 향하는 것일까?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하루를 살기 위해 그 설움을 감추고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영화 <카트>는 이 사회의 치부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관객의 호기심을 끌기 충분하다. 
 


 

  어쩌면 대부분의 관객들은 영화 <카트>를 보면서, ‘더 마트’에 등장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에서, 자기 삶의 일부를 마주하는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영화 <카트>가 다른 한국영화들 사이에서 60만 관객을 모으며, 흥행순위 1위를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2. 


 

  영화 <카트>는 영화적 미학성에 있어서 많은 아쉬움을 남기는 것이 사실이다. 무엇보다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인물의 성격과 내러티브의 결함이다. 실화에 토대한 구성이라는 것은 이해하지만 그것의 전개 방식은 설득력이 많이 떨어진다. 
 


 

  예컨대 마트의 카운터를 점거하고 농성을 풀지 않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자신들만의 연대를 쌓기 위해 그 안에서 벌이는 공연들이 환상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차갑고 어두운 마트 안에 감금된 인물들의 절망은 어디론가 사라져있다. 절망적으로 보이는 상황 속에서 나타나는 그들의 연대는 신비하게도 ‘꿈’ 그리고 ‘희망’과 같은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성 있게 다가오지 않고 인위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또한 인물의 성격에서 있어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정규직이 되기 위해 그동안 힘썼던 선희는 부당하게 회사에서 해고된 이후 노동조합대표로 선출된다. 이 소식을 접한 회사는 손쉽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시 선희에게 정규직 제안을 하고 노동조합을 해체할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동료 ‘혜미’는 조합원 내부의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기 위한 회사의 책략임을 주장하면서 선희의 내면적 갈등은 봉합된다. 이것은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그동안 선희는 비정규직이지만 정규직 직원이 되기 위해 일을 해왔다. 그래서 회사의 부당한 요구에도 헌신적으로 일해오지 않았던가. 동료를 배신해야 한다는 대가를 치르겠지만 다시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왔다면 흔들리는 것이 인간의 욕망이지 않을까? 선희의 개인적 욕망은 고려될 가치가 없는 부도덕한 것인가? 인물의 욕망과 현실의 구조가 서로 어긋나는 그 모순의 간극이야 말로 삶의 비밀이 입을 벌리는 순간이 아니던가? 또한 노동조합을 대표하던 혜미가 동료들을 배신한다는 설정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실패한 투쟁을 다시 시작하는 선희의 의지에 감화 받은 혜미가 다시 함께 카트를 밀며 투쟁을 이어나간다는 설정은 억지스럽다.  


 


 

  영화 <카트>는 실화에 토대하지만 미학적 관점에 있어서 설득력은 많이 떨어진다. 갑작스러운 내러티브의 전개와 회의에 일방적으로 억압받고 패배하는 인물들 그리고 그럼에도 다시 연대의 희망을 놓지 않는 주인공의 모습은 현실의 진정성보다는 감정의 과잉에 가깝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3.  


 

  오히려 영화 <카트>의 강점은 메인플롯보다 그것을 보조하는 서브플롯에서 찾아진다. 삶의 진실이 언제나 사건의 중심이 아니라 그 주변에서 드러나는 경우가 많은 것처럼 말이다. 주인공 선희가 자신의 부당해고에 대한 투쟁을 이어나가는 사이 집에 남겨진 아이들은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황폐해져간다. 자신의 해고가 부당하다는 것을 알리고 투쟁을 이어나가기에는 그 과정이 힘겹고 길며 그 사이 남겨진 가족들이 굶주림과 고통에 볼모로 잡히는 현실은 섬뜩한 것이다.    
 


 

   선희의 아들 태경은 자신이 가난하다는 사실을 학교의 친구들에게 들킬까봐 전전긍긍한다. 친구들 대부분이 들고 다니는 스마트폰 대신에 2G폰을 들고 다니면서도, 자신의 현실을 친구들에게 들추어지는 일에 민감하다. 여기서 우리는 가난이 부끄러운 것이 되어버린 현실의 부도덕을 발견한다. 왜 가난은 부끄러운가? 가난은 개인의 부도덕과 등질적인가? 가난은 개인의 부도덕이 낳은 결과인가? 가난의 죄는 가난한 자들에게 돌려져야 하는가?라는 문제의식을 돌려준다. 개인의 가난이 부도덕이라면, 그 부도덕의 비난은 가난한 자들을 향한 착취를 사회의 발전과 효율이라고 칭하는 사회의 구조에게 되돌려져야 한다. 또한 단지 친구들과 수학여행을 가기 위해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지만, 악덕 사장에게 월급을 받지 못하고 쫓겨나는 태경의 모습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부당하게 해고하는 거대 기업의 횡포와 논리가 우리 일상적인 현실에 뿌리내려있음을 발견하게 한다.   
    

   서브플롯은 주로 선희와 태경이라는 인물을 둘러싸고 벌어진다. 서브플롯의 이야기들은 현실의 에피소드에 상상력을 더해 극화한 된 것일 터이다. 그런데 노동투쟁의 현장을 다루는 메인플롯의 이야기보다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바로 인물들의 욕망과 생동감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공감은 인물들의 행위와 욕망에의 몰입을 통해 발생한다. 그렇기에 욕망은 단조로운 것이 아니라 관객의 내면에 호소할 수 있는 다채롭고 기민한 사실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서브플롯과 달리 메인플롯에 있어서 영화는 인물들의 내면을 섬세하게 다루지 못하고, 체감의 깊이를 떨어뜨린다. 이렇게 되면 영화는 어느 순간 지루한 설교가 되어버린다. 어떠한 사건이던 이야기는 근본적으로 욕망이다. 욕망이 없는 이야기는 진정성을 확보할 수 없다. 인간 욕망의 서늘함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드라마는 진정성의 표면을 더듬을 뿐이지 결코 타자를 설득하지 못한다. 
    

   필자는 영화 <카트>가 우리 사회에 나타나고 있는 핵심적인 사회적 쟁점을 전면으로 내세움으로써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의 가치를 충분히 공감한다. 하지만 영화라는 장르의 형식을 빌어서 발화되고 있다면, 더 아름다운 방식으로 체감의 깊이를 확보해야 하지 않을까? 영화라는 장르를 감독의 주제의식을 표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택했다면, 그 장르의 논리성을 작품에 녹여내었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필자는 개인적으로 이 작품이 희망적인 내러티브를 통해 투쟁의 필요성과 사회적 연대를 강조하기보다, 관객들이 판단하고 생각할 수 있도록 최대한 감정을 절제한 연출 속에서, 일종의 다큐멘터리적인 냉정한 사실적 관찰의 방식으로 나아갔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영화 <카트>는 우리 사회의 핵심 쟁점을 문제 삼고 관객들이 성찰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의미를 지닌다. 타자의 불행은 순번만 바뀌어 일어나는 나의 불행이다. 다른 사람들이 불행을 겪는 동안 무심하다가 막상 그 불행이 자신에게 닥쳤을 때 아무도 없는 공간에 자신의 부당함을 호소해보아야 세계는 침묵할 뿐이다. 우리는 저녁이 오면 타자와 함께 나란히 함께 서야만 한다. 그것은 함께 하는 불행일 수도 있지만 함께 여는 미래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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