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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우일 Feb 24. 2016

성과 속 그 사이의 인간학

-이도윤 감독의 <좋은 친구들> (2014)

"그러니 우리의 눈이 그 마지막 날을 보고자 기리고 있는 동안에는

죽어야 할 인간일랑 어느 누구도 행복하다고 기리지 말라, 

삶의 종말을 지나 고통에서 해방될 때까지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 중에서    


  1.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두 여자가 있다. 한 여자는 떠났고, 한 여자는 백사장에 남았다. 태양이 저물어간다. 푸른 바다에는 붉은 노을이 내리깔린다. 바다의 파도소리는 딱 발목만큼의 음표로 운다. 풍요롭고 거칠고 때로는 몸의 마디를 비트는 파도소리의 낮은 떨림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는 것만 같다.  카메라는 여자의 뒷모습을 롱숏(long-shot)으로 응시한다. 넓은 바다와 작아서 부서져버릴 것 같은 그녀의 뒷모습이 대비된다. 무너질 듯 위태롭게 서있는 여자는 껍질을 잃은 소라의 쓰라림을 연상시킨다. 

 카메라는 경박하게 그녀의 슬픈 얼굴을 집요하게 포착하지 않는다. 클로즈업(close-up)으로 집요한 관찰을 보여줬다면 그것은 카메라의 편집증을 드러내는 것이고 만약 그녀의 일그러진 얼굴이 정면을 응시했다면 신파극이 되었을 것이다. 그녀의 뒤에서 변화하는 파도 그것의 자체의 이미지가 모든 말을 대신한다. 바다의 이미지는 관객과 거리를 두고 말을 한다. 그것은 활자화된 말이 아니라 정서적 공감의 언어를 일으킨다. 손쉬운 위로나 과장 섞인 드러냄을 허락하지 않는 카메라의 무덤덤함이 영화에 진중한 무게감을 준다. 이것은 이도윤 감독의 단편영화 <이웃> (2007)의 한 장면에 대한 것이다.

  영화는 대상을 훔쳐보듯 정희의 뒤를 쫓는 카메라의 움직임으로 시작하고 있으며 핸드 헬드 숏(hand-held-shot)으로 찍어서 흔들리는 초점 때문에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듯한 현장감을 준다. 그리고 사실적으로 연출된 카메라의 시선에 따라 이야기는 긴장감 있게 진행된다. 살인자의 어머니로 살아가는 정희와 그의 아들에 의해 살해된 딸의 엄마 연순이 교회에서 만난다. 두 여자가 공유하고 있는 불행 속에서 둘은 함께 구원에 이를 수 있을까?  

 《마가복음》 22장 39절에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신은 말했다. 어떤 불행은 당사자들뿐이 아니라 남겨진 자들의 운명까지도 고통스러운 멍에를 안겨준다. 둘은 우연한 불행이 남겨준 고통을 극복하고자 교회를 찾았고 신의 율법 속에서 서로를 만났다. 그녀들은 이제 신의 율법 속에서 서로를 사랑해야 하는 이웃이다. 하지만 그녀들은 신의 율법과 인간의 복수심 사이의 간극에 있다. 신의 율법과 육신의 존재인 인간 욕망의 그 허약함 사이에서 부서지는 연순의 비명은 너무도 아름다운 바다의 이미지와 함께 일렁인다. 

 영화 <이웃>의 마지막 장면,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교회의 수련회를 마치고 기념 촬영을 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담긴다. 사진을 찍기 위해 미소와 함께 한 장소에 서있지만 동시에 둘 사이의 넓은 공간은 텅 빈 두 사람의 심리적 거리감을 그대로 포착한다. 이 작품은 오로지 카메라의 움직임과 대상과의 거리를 통해서 감독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영화적 주체의식을 노출한다. 성스러움과 대비되는 인간의 허약함에 눈시울이 붉어진다. 많은 대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두 캐릭터를 설명하기 위한 설명적 시퀀스도 크게 없다. 그럼에도 영화적 배경과 두 여자를 둘러싼 비극적 정서는 카메라의 이미지들을 통해서 말을 건다. 

 이도윤 감독은 인간의 내면과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관심을 내밀하게 포착하는 눈을 가지고 있다. 그는 날카롭게 인간의 나약한 폐부를 잘 찌른다. 이도윤의 스타일은 루이스 부뉴엘의 영화 <비리디아나> (1961)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여주인공 비리디아나는 수녀로서 사회의 부랑자들을 구원하려고 했지만 술에 취한 부랑자들에 의해 나중에 강간을 당하게 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비리디아나는 스스로 사회를 구원하겠다는 자신의 신념을 꺾고 수녀가 되기를 포기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이 영화에서 우리는 신의 의지로도 구원할 수 없는 인간 존재의 속악함을 망연자실하게 목도하게 된다. 그때의 서글픔은 마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떠올리게 하는 화면의 미장센과 더불어 성(聖)과 속(俗)이 뒤섞이면서 극대화된다. 인간이란 존재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 절대적 심연을 포착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거장 루이스 부뉴엘 문법의 영향을 이도윤의 영화 속에서 발견하게 된다.  

 한국 영화의 대표적인 감독들 중에 하나인 김기덕 감독은 영화 <뫼비우스> (2013)에서 성스러움과 속됨의 관계에 있는 인간의 애증을 표현한 바 있다. 그렇지만 그의 몽타주들은 난삽하고 자폐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더구나 갑작스러운 해탈(解脫)로 표현되는 초월의 제스처는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 몽타주들은 자신의 작품 세계를 이루고 있는 두 가지 세계를 봉합해놓은 것일 뿐이다. 이것에 비하면 이도윤의 단편영화 <이웃>은 자연스럽다. 인간의 감춰진 욕망의 굴곡을 카메라의 거리와 열린 눈으로 관찰하는 시선이 단단해서 좋다. 억지스럽지 않고 세련되게 카메라를 사용하는 감독의 스타일이 모던하다. 아마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도윤이라는 신임 감독을 김기덕 감독과 비교하는 것은 무리라고. 그러나 나는 김기덕 영화 <뫼비우스>의 몽타주보다 이도윤이 창조한 하나의 시퀀스를 선택하겠다. 어쩌랴! 그것은 영화를 보는 한 관객으로서의 이끌림인 것을. 


  2. 믿는 자에게 구원이 있나니


  최근 이도윤 감독은 영화 <좋은 친구들> (2014)을 제작해서 개봉하였다. 흥행에는 여지없이 실패했으나 젊은 감독의 영화 세계의 질적 하락과 관련한 문제가 아니다. 다만 그 독특성을 눈여겨봐줄 대중이 적었을 뿐이다. 이도윤 감독은 영화 <이웃>에서 그랬던 것처럼 <좋은 친구들>을 통해 인간의 내면에 대한 섬세한 관찰을 보여준다. 그는 인물들의 갈등을 통해 감춰진 인간의 본성을 포착하는데 재능이 있다. 그것은 때로 아름답지만 추(醜)하기도 하다. 우리가 세련된 근대인의 형상을 취하고 있지만 누구나 화장실에 가는 것처럼 말이다. 그 본성, 버릴 수 없는 인간 내면의 속됨과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는 인간의 윤리성 사이의 경계를 깊이 있게 탐구하는 안목이 놀랍다. 

 그의 영화가 지닌 미덕은 어떠한 보편적 가치로 문제를 봉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열린 그대로 그것을 관객들이 직시하도록 이끈다. 어쩌면 그는 지독한 신화학자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롤랑바르트가 자신의 저서 《신화론》에서 했던 말처럼 오로지 텍스트를 통해 그는 세계의 진실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에만 집중하기 때문이다. 영화 <좋은 친구들>에서 이도윤 감독은 우정이라는 믿음을 심문한다. 무엇을 우정이라고 불러야 할까? 서로를 친구라 부르는 세 명의 남자들이 있다. 여태껏 서로를 친구라 여기고 살아왔으나 현태의 부모가 사고로 죽으면서 그들의 우정은 시험받는다. 


 현태(지성 역), 인철(주지훈 역), 민수(이광수 역) 세 명은 어려서부터 우정을 나눈 친구들이다. 겨울의 어느 날 중학교 졸업식을 마치고 몰래 학교에서 빠져나와 산에서 사진촬영을 하던 중에 실수로 절벽에서 떨어져 죽을 위기에 처한 민수를 인철과 현태의 노력으로 구하게 된다. 이후 셋은 자라서 어른이 되고 서로의 우정을 간직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보험회사를 다니던 인철은 전자경마장을 운영하던 현태모와 함께 모의하여 보험사기를 치기로 한다. 인철은 망설이던 친구 민수를 끌어들이고, 현태 모와 합의한 계획에 따라 범행을 진행한다. 하지만 민수의 실수로 현태의 부모가 사고로 죽게 되면서 사건은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결국 인철은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현태모가 운영하던 전자경마장에 화재를 내고 민수와 이 사실을 비밀로 붙인다. 하지만 현태는 갑작스럽게 일어난 사고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고 진실을 찾기 위해 인철에게 도움을 청하면서 사건은 복잡하게 꼬여만 간다. 

 영화 <좋은 친구들>은 드라마에 스릴러 장르의 서스펜스 문법을 섞어놓았다. 서스펜스란 관객에게 어떤 불안이나 긴장감을 일으키도록 하는 것인데, 이 작품에서는 인철과 민수가 현태에게 진실을 들키는가 하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현태에게 진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孤軍奮鬪)하는 인철의 모습이 영화를 보는 동안 긴장감을 형성한다. 하지만 진실은 밝혀지는 법이다. 민수가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자살을 선택하면서 파국(破局)이 예정된다. 인철은 민수의 죽음 이후 현태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모든 재산을 넘겨주고 외국으로 떠나기로 한다. 하지만 진실을 알게 된 현태가 보낸 살인청부업자에 의해 공항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현태는 두 친구를 잃고 홀로 남지만 인철의 진심을 나중에 알게 되면서 그 스스로 죄악의 수렁에 빠지고 만다. 

 영화는 마지막 반전을 남겨둔다. 역설적으로 우정을 중시하던 현태가 과거 어린 시절 민수가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눈보라를 뚫고 마을 사람들을 불러온 인철과 달리 자신만이라도 살고자 민수를 버리기로 했었던 사실이 반전으로 밝혀지면서, 우정이란 과연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을 묻게 된다. 친구를 믿지 못한 것은 현태 자신이었으며, 오히려 친구들을 가장 믿었던 사람은 인철이라는 아이러닉한 진실에 이르게 된다. 


 현태가 그토록 찾았던 진실은 범인이 누구인가라는 문제에서 시작되었을지 모르지만 그 결말에는 우정이라는 이름에 감춰진 진실하지 못했던 자기 자신의 거짓됨이다. 이것은 국가를 병들게 한 범인을 수소문 하지만 그 자신의 죄악을 발견했던 오이디푸스 이야기와 다를 바가 없다. 현태는 복수에 눈이 멀어 인철을 살해함으로써 지금껏 우정을 지켜왔다고 믿고 있던 자기 자신의 거짓됨을 발견하게 된다. 현태는 세상의 어떠한 것도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근대인의 형상이다. 의심을 통해서 그는 진실을 구하였지만 그 의심은 그가 어떠한 것으로도 충족될 수 없는 결핍 상태의 불안한 존재임을 증명한다. 

 오히려 자살을 택한 민수의 죽음은 인간의 내면에 작동하는 도덕법칙으로써의 윤리성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의도하지 않은 실수이지만 현태의 부모를 살해했다는 사실에 대한 죄책감을 떨쳐버리지 못한 민수는 현태에게 속죄의 고백이 담긴 편지를 남기고 죽음을 택함으로써 자신의 소중한 우정을 지키고자 한다. 어쩌면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버리는 것만이 자신의 진심을 전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민수는 알았는지도 모른다. 

 우정이라는 것, 분명 그것의 진정성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허구일 것이다. 인간의 관념이 만든 환상일 것이다. 그럼 민수의 죽음은 무의미한가? 우정이라는 말의 진정성은 민수가 죽음이라는 형식의 실천으로 자신을 기투(企投)하는 순간 현실에 실재하게 된다. 자신의 전 존재를 던지는 죽음이라는 실천을 통해서만 세계에 존재하지 않던 우정의 진정성은 존재하게 된다. 아니 그것은 비로소 생성된다. 이것은 신약성서에서 예수가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순간과 오버랩 된다. 예수가 믿는 바에 따라 십자가에 스스로 죽음에 이를 때에야 비로소 신은 예수의 형상을 취하여 세계 속에 실재하게 된다. 자신의 죽음을 통해 그가 믿는 신을 증거하고 목소리로 세계 밖에 존재하던 신이 세계 내부에 임하도록 한다. 

 만약 예수가 죽음을 택하지 않았다면, 그 누가 그의 말을 믿을 것이며 신의 사랑과 인간의 구원을 믿을 수 있을까? 예수가 말한 “모두 다 이루었다.”라는 완성의 선언은 스스로가 믿는 바를 위해 존재를 기투함으로써 신의 실재성이 확보되는 순간에 대한 희열을 가리킨다. 보편적 가치의 허약함을 드러내는 사건을 통해서만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진정한 것들의 생성과 가치에 대해서 다시 사유하고 지속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 문제는 사건이 아니라 사건을 대하는 진지한 태도이다. 

 이처럼 이도윤 감독은 우리의 현실을 떠받치고 있는 가치들이 얼마나 허구적 환상인지 관객에게 보여준다. 관객들은 그것들이 상실되는 잔혹한 체험 속에서 불편해진다. 우리가 믿고 있는 보편적 가치들의 진정성이 심문받는 순간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주체의 비루함이 속속들이 밝혀진다. 누구도 영화 속의 질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오히려 나 자신의 주체성에 대한 의심과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가치들에 대한 진정어린 탐구를 요구한다. 


  3. 나는 말씀을 듣나이다 


   한 신인 감독이 나타났다. 그의 카메라에 포착되는 세계는 그 아름다움마저 서글프다. 그것은 성스러움과 속됨 사이에서 발생하는 인간적 결핍을 껴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영화에서  자신의 세계를 이끌어가는 강한 운동력을 발견한다. 영화는 우선 시각적으로 보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보여주고 보는 것, 이것은 원칙이다. 그는 이 원칙에 충실하다. 

 극영화의 문법을 취하지만 그 허구적 이미지의 표현 속에서 아니 그가 상상하는 세계가 담고 있는 허구의 깊이가 나의 주체를 그리고 그것을 이루고 있는 현실적 가치를 의심하게 한다. 리얼함이란 현실을 주어진 그대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의심하도록 이끄는 힘이다. 진정한 리얼리스트는 자신이 상상하는 현실에서 그 깊이를 생산한다. 그가 보여주는 몽타주의 이미지들은 분명 허구이지만 무엇보다 리얼하다. 그 리얼함은 보이는 표면을 통해서 본질을 상상하도록 이끄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카메라는 대상의 표면을 훑지만 그 세계가 담아내는 것은 그것들이 이루어내는 어떤 지각과 정서 그리고 아픔과 고통의 감각들이다. 분명 단지 보이는 것이건만 나의 육체를 아프게 한다. 그의 영화 <이웃>이 그렇고 <좋은 친구들>이 그랬다. 그것은 단순히 교회의 수련회에 있었던 어떤 하루의 일과이고, 어떤 모르는 세 친구들의 비극에 불과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우리의 공통감각을 비집고 들어와 어떤 말들을 늘어놓는다. 감각의 말들 그 수런거림에 귀를 기울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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