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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우일 Feb 24. 2016

남자라는 추문

-윤종빈 감독론


1.

 불투명한 가치의 세계 속에서 누가 더 오래 발기할 수 있는지를 겨루는 게임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윤종빈 감독의 영화들은 남성성이라는 화두를 통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게임의 법칙에 대해 질문한다. 그의 영화가 불편하다면 영화를 매개로 발화되는 우리 무의식의 감춰진 목소리를 듣기 때문일 것이다. 감춰진 무의식의 목소리를 듣는 경험은 분열적 체험이기도 하다. 내 안에 존재하지만 나조차 인식할 수 없었던 무의식의 목소리는 섬뜩하게 느껴진다.


 <용서받지 못한 자>(2005)와 <비스티 보이즈>(2008) 그리고 <범죄와의 전쟁>(2012)과 같은 영화들은 감독의 일관된 작품 세계를 보여준다. 윤종빈 감독은 독립영화 <남자의 증명>(2004)이라는 작품에서부터 남성성에 관해 발화하여 왔다. 무엇이 감독에게 남성성에 관한 질문을 지속적으로 던지게 하는 것일까. 그가 바라보는 남성의 세계는 도대체 어떠한 불온함을 지니기에 스크린을 통해 관객에게 목소리를 되돌려주는 것인가? 


남성이란 무엇인가? 남성성 혹은 남자다움을 채우고 있는 기표 내용은 무엇인가. 이것과 관련하여 남성성 혹은 남자다움이란 사회의 성정치적 기획의 생산물로 바라볼 수 있다. 즉 남성이 남자다움을 학습하는 국가의 이데올로기적 장치로써 군대는 우리 사회의 남성적 무의식을 구성하고 있는 초자아(super ego)로 위치한다. 일상에 있어서 국방이라는 것은 안보와 관련해 ‘신성한’ 의무로 제시되고 군대는 남자다움을 구성하는 장치로 작동하여 왔다. 


 윤종빈 감독은 <용서받지 못한 자> (2005)에서 우리 한국 사회의 남자-남성성의 일치라는 당위를 생산하는 장치인 군대를 일상적 관점에서 조망한다. 감독이 자신의 첫 장편 영화의 배경으로 군대라는 폐쇄적인 남성 공간을 선택한 것은, 남성성과 위계화 된 계급적 관계의 상관성을 해명하기 위한 시도로 보인다.

 영화의 주제 의식은 에필로그 방식으로 덧붙여진 태정(하정우 역)과 승영(서장원 역)의 대화를 통해서 제시된다. 영화는 태정이 군대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승영에게 “야, 넌 내가 봤을 때 어른이 먼저 되어야 돼 새꺄. 에휴. 들어가자.”라고 말한다. 이에 승영이 “내가 고참이 되면 다 바꿀거야.”라는 말로 응답하며 끝이 난다. 태정이 바라보기에는 순진한 아이나 다름없는 승영에게 어른이 되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군대에서 남성에게 남성성을 교육하고 학습시키는 일은 아이가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어른이 되는 일과 같다. 군대에서 남자-되기는 아이-어른되기라는 구조와 같다. 이 과정은 한 존재가 사회적 상징 질서를 습득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군대라는 조직이 부여하는 남성성을 남성 주체가 학습하고 받아들여 남성-남성성의 일치를 당위적인 자연스러운 정체성으로 정립시킬 때 아이는 어른으로 탄생하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의 실패는 승영과 그의 후임이었던 지훈의 자살로 알 수 있듯이 죽음이다. 

 이처럼 영화는 남성-남성성의 당위적 결합 양상에 대한 비판과 그것을 강제적으로 요구하는 사회적 장치로써 군대를 문제 삼음으로써 남성이 남성성을 내면화하고 어른이 되는 과정의 불합리성과 폭력성을 들추어낸다. 이런 맥락에서 윤종빈 감독의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는 남성성에 대한 추문(醜聞)이다. 

2. 

 영화 <비스티 보이즈>의 영문식 타이틀은 <The Moonlight of Seoul>이다. 서울의 달빛 정도로 해석되는데, 도시의 음영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 군상들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 영화의 광고 포스터 “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화려하다!”라는 말로 압축되는 남성 호스트들이 주인공이다. 비스티 보이즈(Beastie boys)라는 타이틀 제목의 뜻은 저속한 소년들이 되는데, beastie라는 단어는 ‘작고 귀여운 동물’을 뜻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아직은 어른이 되지 못하고 방황하는 소년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용서받지 못한 자>는 남자-되기 과정에 의문을 던졌다면, 영화 <비스티보이즈>는 소위 사회 내에서 남자-되기가 실패한 지점에서 나타나는 남성들의 생존 방식을 탐색한다. 사실 특권적으로 보이는 남성성은 “하나의 함정이며, 때때로 불합리한 상황 속에서조차 남성성을 확인해야 하는 의무가 모든 남자에게 강요하는 지속적인 긴장과 집중을 그 대가로 치러야 한다.”(피에르 부르디외, 『남성 지배』, 김용숙 옮김, 동문선 현대신서, 2003, 74면.)라는 점에서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획득하고 지속한다는 것은 남성에게도 괴로운 일이다. 그렇다면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승인 혹은 보증 받지 못한 남성들은 어떠한 모습일까? 영화 <비스티보이즈>는 남성성을 승인받지 못한 주변부 남성들의 일상을 다룬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일반적으로 호스트는 여성을 중심으로 상상되기 쉽다는 점에서 남성 호스트는 그것의 역전에 해당한다. 그런데 주변부 남성들의 남자-되기의 실패는 기존의 근대적 젠더 정치의 기획을 통해 획득되었던 헤게모니적 남성성이 해체됨으로 발생한 것일까? 문제는 헤게모니적 남성성의 해체적 현상의 원인이 젠더 정치의 급진적인 진전에 따른 것이 아니라 자본과의 로맨스 실패라는 외부적 요인에 의해 발생한다는 점이다.

 간단히 말해서 경제적 요인으로 인해 남성이 더 이상 사회에서 요구하는 역할의 수행이 불가능성해지면서 관습적인 남성-남성성의 관계가 흐려져 버린다. 이것은 남성성이라는 것이 생물학적 페니스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서 발원하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 남근의 이동과 획득을 둘러싼 인정투쟁 아래 남성성이 놓여있음을 말해준다. 


 영화 <비스티보이즈>의 주인공 승우(윤계상 역)는 청담동에서 부유하게 자란 청년이지만 집안의 사업이 망하게 되면서 생존을 위해 누나 한별과 동거 중인 재현과 함께 남성 호스트 일을 시작하게 된다. 승우는 우연히 여성 호스트로 일하는 지원(윤진서 역)과의 만나면서 “지원아 그래 솔직히 내가 너한테 이런 얘기까지 하기 그런데 나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 아니야. 그냥 잠깐 일하는 거야.”라고 말했을 때, 승우는 지원에게 자신이 남성성의 획득을 포기하지 않고 그 욕망을 은폐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 욕망은 사회적으로 상징적 남근을 획득함으로써 가능하다는 점에서 결국 그는 자본의 욕동과 자신의 욕망을 일치시킨다. 

 지원을 향한 승우의 사랑은 자본의 흐름에 따라 상징적 남근을 획득하기 위해 몸부림치면서도 그것을 획득하기 위한 노력(사랑의 상품화 혹은 물신화)이 자꾸만 지원과의 사랑을 완성하고자 하는 충동과 어긋나는 지점에서 위기에 처한다. 승우의 위기는 윤리적 딜레마로 나타난다. 지원과의 순수한 사랑을 꿈꾸면서도 스스로는 상징적 남근의 획득을 위해 사랑을 자본화하고 상품화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자본주의 아래에서 사랑은 상징적 남근을 소유하기 위해 자신을 타자에게 전시하고 상품화시켜야 하는 소외의 형식이거나 초월하기를 욕망하다 파멸되는 과정이 된다. 승우와 지원의 사랑이 고통스러운 것은 현실적 조건을 넘어서 실재(순수한 사랑)에 도달하려는 위험한 곡예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윤종빈 감독의 <비스티보이즈>는 남성성의 해체와 상징적 남근 획득의 서사가 자본에 종속되어 있음을 잘 보여준다. 

3. 

 다음으로 윤종빈 감독의 <범죄와의 전쟁>은 현대 한국 사회를 규정하고 있는 역사성을 탐색한다. 도입부터 영화는 과거의 흑백사진들을 순차적으로 전시하는 슬라이드를 보여준다. 이때 영화의 도입부에 전시되는 사진들은 군복을 입은 과거 전 대통령들의 모습과 그들의 행적과 관련 있는 역사적 사건들이다.


1961년 5월 박정희 정부의 깡패검거령에 의해 체포되는 이정재의 모습, 군대에 의해 폐허가 된 광주의 모습, 삼청교육대에서 훈련받는 사람들의 모습 등이 스크린 위에 지시된다. <범죄와의 전쟁>은 1960년을 기점으로 1980년대까지 이어진 현대사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을 증거물처럼 제시한다. 그리고 개별적으로 분화된 사진들이 반복된 패턴으로 배치되며 의미를 생산한다. 군복을 입은 전직 대통령들의 사진이 제시되고 다음에 그들과 관련한 사건들이 뒤따른다. 


 이 같은 도입부 이후 다음으로 시퀀스에서는 1990년 10월 3일 노태우 대통령의 ‘범죄와 전쟁 선언’이 발표되었음을 알리는 뉴스와 함께 최익현이 검찰에 구속되는 과정이 중계된다. 최익현(최민식 역)의 구속은 도입부의 시퀀스를 통해 한국 현대사의 반복되는 악무한(惡無限)의 과정에 연루된 파편임을 알게 된다. 즉 1990년대 범죄와의 전쟁은 그러므로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이라는 기원적 이미지에서 출발해 현재까지 반복되는 한국 현대사의 왜곡된 불구성이다. 

 영화 <범죄와의 전쟁>에서 ‘범죄’와의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1990년 선언한 ‘범죄와의 전쟁’의 작동 방식은 국가의 공권력이 스스로 ‘범죄’를 생산하고, 스스로 만든 이미지와 ‘전쟁’을 벌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범죄와의 전쟁’은 개발 자본주의 체제 내부의 과잉이 구성해낸 환상이다. 악질 검사 조범석이 최익현의 각종 아부와 회유에도 타협하지 않은 것은 공익을 대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검찰부장으로의 승진이라는 개인적 영달에 있었다는 점은 이것을 잘 표현한다. 

 1960년대로부터 시작된 한국 현대사의 기원적 이미지가 2012년 현재까지 반복되는 과정을 최익현의 시점에 따라 서사화함으로써 과거로부터 비롯된 부조리한 현실들은 한국 사회의 현재를 암시하는 알레고리로써 작동한다. 그리고 최익현의 아들이 검찰 내부에 자리 잡게 됨으로써 최익현 이후의 미래에도 부조리한 현실이 반복될 것임이 암시된다. 이런 면에서 영화 <범죄와의 전쟁>은 현재의 부조리를 구성하는 현대사의 기원적 장면을 최익현이라는 인물을 통해 복원하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는 카메라의 트레킹 이동과 함께 뒤돌아보는 최익현이 얼굴이 카메라에 잡히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대부님”이라고 부르는 목소리와 함께 화면이 흐릿해지면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외부에서부터 보다 피사체에 가까이 다가가는 이러한 카메라의 이동은 기원을 재구성하려는 또 발견하려는 영화적 관점과 일치하며 최익현은 한 개인이 아니라 한국 사회에 유령처럼 떠도는 부권적 은유로 스크린 위에 인화된다. 그리고 “대부님”이라는 갑작스러운 목소리의 침입은 이때 우리 의식의 표면에 떠오르는 낯선 감각을 거리를 가지고 인지할 것을 촉구하는 의도로 보인다. 이처럼 부권적 은유로써 아버지는 영화 <범죄와의 전쟁>의 핵심에 놓인다. 최익현은 바로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상징적 지배질서의 고정점으로써 은폐되어 의식되지 않기에 실체화되지 않지만 엄연히 우리의 삶의 형식을 규정하고 있는 상징 질서로써 무의식적 아버지이다. 

4. 

 남성성을 화두로 자신의 세계를 변주하고 확장해왔던 윤종빈 감독은 최근 <군도> (2014)를 제작 발표하였다. 이번에도 윤종빈 감독의 페르소나로 보이는 배우 하정우가 쇠백정 도치 역을 맡았고, 멋진 악역인 조윤을 배우 강동원이 맡았다. 이 영화는 액션 활극이라는 장르성을 내세우며 초반 관객들의 많은 관심을 받았지만 뒤이어 명량 (2014)과 해적(2014) 그리고 해무(2014) 등의 작품들이 연이어 개봉하면서 큰 흥행에는 실패했다. 


 영화 <군도>는 선악의 구도가 명료해 보인다. 도치라는 쇠백정이 조윤이라는 악인에 의해 어머니와 여동생을 잃고 망할 세상으로부터 백성들을 구하기로 결의한 의적들과 함께 힘을 합해서 조윤을 물리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충분히 대중들이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도 즐길 수 있는 액션 활극임이 분명하다. 하지만<군도>는 앞서 윤종빈 감독의 작품들과의 관계성 속에서바라보면감독의 변모하는 세계관을보여준다. 

 영화 <범죄와의 전쟁>은 한국사회의 부조리의 탄생과 기원을 탐구하고, 개인의 문제에서 사회의 문제의 영역으로 확장된 감독의 시선을 보여주지만 새로운 사회에 대한 희망과 가능성을 닫아놓는다. 그런데 <군도>는 더 먼 과거의 시공간으로 시점을 이동시킴으로써 고통 받는 백성들의 현실과 그들에게 내재하는 잠재력의 가능성을 옹호하려한다. 

 영화가 마지막에 이르러 도치와 조윤이 목숨을 건 대결을 하는 과정에서 조선 최고의 무관인 조윤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런데 조윤의 분명한 죽음은 도치의 칼이 아닌 카메라의 바깥에 존재하는 백성의 날카로운 창에 의해서이다. 도치와 조윤의 대결을 주시하는 카메라 밖에 존재하는 백성들의 존재는 일종의 은유가 아닐까 싶다. 

 비록 표면으로 확실하게표상될 수는 없지만카메라 밖에 존재하는 백성의 날카로운 창은 조윤의 심장을 꽤 뚫는다. 이것은 새로운 가능성을 관철시키는 존재로 백성을 이해하고, 그들의 보이지 않는 힘을 주목하는 윤종빈 감독의 시선 변화를 예고하는 것만 같다. 

 또한 도치와 조윤이라는 인물은 사실상 시대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도치는 쇠백정이라는 천한 신분으로 헐벗은 백성을 상징한다면, 조윤의 태생 또한 기생의 자식이자 탐관오리의 자식으로써 아들로 인정받지 못한 서자 출신이며, 그 또한 시대가 탄생시킨 비운의 인물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도치와 조윤의 대립 구도는 인간의 운명이란 자신의 자유의지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시대의 척도에 갇힐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영화 <군도>는 도치라는 인물보다 조윤에게 시선이 많이 간다. 영화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의 발단과 원인을 제공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서자 출신으로서 조윤이라는 인물의 삶은 아버지로부터 아들로 인정받고자 하는 인정투쟁의 과정이다. 조윤이 땅과 재물에 집착한 것은 자신의 물욕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로부터 자신을 인정받기 위한 것임이 결말에 드러난다. 그런데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그리고 아버지의 부정함이 그대로 아들에게도 상속되는 과정은 이미 영화 <범죄와의 전쟁>에서 보여준바 있다. 이런 점에서 윤종빈 감독은 자신의 세계를 일관성 있게 유지하면서 지속적으로 자신의 영화 세계를 확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윤종빈 감독은 남성성의 탐구로 시작해서 지속적으로 자기 세계를 모색해왔다.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가 남자-되기라는 개인적 사건에 한정된다면, <비스티보이즈>는 남성성의 위기와 함께 자본주의적 향락의 세계를 다룬다. 이후 윤종빈 감독은 영화 <범죄와의 전쟁>과 <군도>를 통해 자신의 관심사를 역사적 차원으로 확장시키고 있다. 앞으로 윤종빈 감독이 어떠한 방식으로 자신의 화두를 발전시켜나갈지 지켜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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