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심우일 Feb 24. 2016

한국형 느와르의 존재 방식을 묻다

-박상준 감독의 <황제를 위하여>와 장진 감독의 <하이힐>

   왜 장진 감독은 여자가 되고 싶은 한 남자의 욕망을 느와르(noir)라는 장르에 녹여내려 했을까? 흔히 느와르 장르의 영화에서 여성은 남성적 세계에서 배제되어야 하는 존재이거나 혹은 남성을 파멸로 이끄는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팜므파탈(Femme fatale)의 형상으로 재현된다. 음모와 배신 그리고 인간의 비열한 내면을 냉소적 태도로 그려내는 느와르 장르의 영화 세계에서 여성이라는 존재의 재현방식은 제한될 수밖에 없다. 

    최근 박상준 감독의 느와르 영화 <황제를 위하여> (2014)가 개봉했지만 주목을 끌지 못하고 스크린을 내렸다. 박성웅과 이민기라는 유명 배우들을 내세워 남성적 느와르의 세계를 보여주려고 했지만 이태임이라는 여배우의 매혹적인 베드신만 화제가 되었을 뿐 그 이외에 좋은 결과를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박훈정 감독의 영화 <신세계>를 통해서 자신이 지닌 연기력을 유감없이 보여준 배우 박성웅은 <황제를 위하여>라는 작품을 통해 자신의 캐릭터를 견고하게 굳히려는 시도가 엿보인다. 

    박상준 감독의 <황제를 위하여>는 남성적 세계의 비열함과 음모를 보여주지만 필연성을 동반하지 않은 인물들의 개인적인 욕망들에서 비롯된다. 황제 그룹의 회장이라는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경쟁하는 남성들의 우정과 배신이라는 소재는 어쩌면 한국 느와르 영화의 가장 대중적인 시나리오가 아닐까 싶다. 어느 정도 결말이 예상되는 상투적인 이야기의 전개와 인물들의 캐릭터 때문에 화려한 연출에 비하여 어딘지 모르게 부실해 보인다.

   특히 여성의 재현 방식에 있어서도 연수(이태임 역) 캐릭터는 처음 폭력 조직의 세계에 발을 내밀은 이환(이민기 역)을 유혹하고 배신하는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여성’으로 분한다. 이처럼 박상준 감독의 <황제를 위하여>가 지닌 가장 큰 문제는 기존 한국형 느와르들과의 차별성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캐릭터의 역할과 성격 그리고 행동의 동기에 있어서까지 공감을 얻기 힘들어 보이며, 무엇보다 깊은 성찰적인 화면 구성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영화의 시작과 중간에 불안한 눈으로 적의 아지트를 찾아가 우악스럽게 칼질을 하는 이환의 모습을 통해서 그의 어둡고 침침한 내면을 표현하려고 한 시도는 이환과 연수의 자극적인 베드신과 더불어 영화에서 가장 돋보이는 장면이다. 

    박상준 감독의 <황제를 위하여>는 한 인간이라는 존재자와 그를 둘러싼 세계 사이의 관계에 대한 냉정한 관찰의 시선이 부재한다. 이러한 특징은 한국형 느와르들이 보여주는 어떤 균열의 지점이기도 하다. 한 예로 한국 느와르를 대표하는 곽경택 감독의 <친구>를 지배하는 것은 내레이션을 통해 전달되는 목소리이다. 

    곽경택 감독의 영화 <친구>가 당시 800만 관객을 넘기고 한국 느와르 영화의 신화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화려한 액션이나 스토리의 진중함 때문이 아니다. 절친한 친구사이였던 동수와 준석이 서로를 죽여야 하는 운명적 상황에 처한다는 설정 자체도 설득력은 별로 없어 보인다. 더구나 전체적으로 곽경택 영화의 화면들은 산만하고 장면 전환에 있어서 공백이 드러나는 특징이 있는데 그러한 산만함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것은 익명의 목소리이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정확히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야기를 시작하고 마무리하는 익명의 목소리가 과거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의 정서를 관객에게 전달한다.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익명의 목소리 입장에서 영화의 화면 구성과 흐름을 따른다. 그 결과 곽경택 감독의 영화 <친구>가 느와르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강하게 뇌리에 남는 것은 냉소적 세계에 대한 불안이 아니라 상실된 낭만적 과거에 대한 우울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더 이상 복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상실감으로 해석된다. 이처럼 최근까지 한국 영화에 있어서 느와르 장르는 낭만적인 향수나 그리움 혹은 과거 80년대 홍콩 느와르가 보여준 버디영화(buddy film)적 요소들을 뒤섞고 변주하며 지속되어 왔다. 

    원래 느와르 영화는 부정적 세계에 대한 핍진한 관찰 그리고 극단적인 하드보일드(hard-boild)한 스타일로 세계에 대한 냉소와 환멸의 정서를 표현한다. 그렇기 때문에 느와르 영화는 어떤 의미에서 한 인간이라는 존재자를 둘러싼 세계의 부정성 그리고 그것을 유발하는 구조적 모순의 견고함을 고발하는 비판 정신이 숨겨져 있다. 하지만 최근 한국 영화들에서 이러한 한 인간을 둘러싼 견고한 세계의 부정성을 핍진하게 관찰한 영화를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박상준 감독의 영화 <황제를 위하여>가 세계에 대한 핍진한 관찰이 사라진 일종의 남성적 판타지로 보이는 이유이다. 

    그럼 장진 감독의 영화 <하이힐> (2014)은 어떨까? 박상준 감독의 <황제를 위하여>가 남성적 판타지를 상투적으로 표출하고 있다면, 장진 감독은 느와르 장르의 공식에 나름의 개성적인 설정들로 도전하고 있다. (물론 시도가 성공적인지의 판단은 유보해두자.) 박상준 감독의 <황제를 위하여>에서 이태임이 맡은 연수라는 캐릭터는 전형적인 ‘팜므파탈’의 역할로부터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 반면 장진 감독은 여성이 되고 싶은 남성 주인공을 통해서 느와르 장르의 공식에 균열을 일으킨다. 자신의 여성성을 감추기 위해 타자들이 욕망하는 남성성을 더욱 완벽하게 재현하며 살아온 지욱(차승원 역)이라는 인물을 통해 남성적 세계라는 것이 하나의 허구적 가상에 불과함을 암시한다. 

   영화 <하이힐>에서 장진 감독은 자신의 주제의식을 지속적으로 끌어가기 위해서 인물의 개인적 내면세계로 빠져드는 모험을 시도한다. 영화는 지욱의 내면세계를 관객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플래쉬 백(Flash-Back)기법을 사용한다. 갑작스러운 사고 이후에 무의식에 감춰진 기억이 의식의 표면으로 솟아나는 꿈의 형식으로 지욱이 과거 소년 시절 겪었던 아픈 첫사랑의 기억이 영화에 삽입된다. 이야기를 지루하게 하는 측면이 있지만 지욱이라는 캐릭터를 이해시키는데 효과적이다. 

    문제는 영화 <하이힐>이 지욱이라는 인물의 개인적 내면으로 빠져들수록 세계의 부정성은 희석된다는 점이다. 지욱이라는 인물이 남성적인 범죄의 세계로부터 계속 벗어나고자 할수록 지욱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의 냉혹함은 부차적인 것으로 된다. 지욱이 자신의 정체성을 감추고 드러날까 고민하는 과정이 관객들에게 영화를 관람하는데 있어서 흥미를 제공해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를 감싸고 있는 세계의 냉혹함이 희미해지면서 지욱이 굳이 강력계 형사로 등장해야 하는 이유 자체도 의문스럽게 된다. 

    영화 초반 화려한 액션은 지욱이라는 캐릭터에 대한 관객들의 관심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카메라가 지욱의 성정체성 문제를 깊게 파고드는 동안 세계의 부정성은 마지막 하이라이트인 액션 신을 위해 피상적 배경으로 존재하는 듯하다. 즉 지욱을 둘러싼 세계는 배경일 뿐 한 인물과 필연적 관계를 맺는 환경으로 전환되지 못하는 한계를 노출한다. 그럼으로써 지욱이 아무런 미련 없이 고국을 떠나려 시도한다는 내러티브의 전개가 가능하게 되었고, 덕분에 지욱을 둘러싼 세계의 성격은 무화(無化)되고 느와르 영화로써의 장르성이 헐거워진다. 어쩌면 영화 <하이힐>은 느와르 장르에 대한 장진 감독의 뒤집기라고 할 수 있지만 유쾌하게 볼 수 없는 이유이다. 

    장진 감독은 느와르 영화들이 보여주는 남성적 세계의 진지함을 일종의 허세로 보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은 배우 오정세가 맡은 허곤이라는 캐릭터가 대변해준다. 최대 범죄 조직의 보스인 허곤에게 부정적 세계의 냉혹한 법칙에 통달한 진지함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가 지욱에 대한 남성적 동경심을 지녔다고 하더라도 범죄 조직을 이끄는 수장이 지녀야 하는 카리스마를 찾기 힘들다. 대신 냉혹한 세계의 부정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사춘기 소년이 자리한다. 이렇게 장진 감독의 <하이힐>은 기성의 느와르 영화들이 보여주었던 남성적 세계를 사춘기 소년들의 허세로 축소한다. 

    이미 밝혔듯 느와르 영화의 세계는 사춘기 소년들의 허세나 혹은 남성들의 낭만적 의리를 재현하는 버디 무비도 아니다. 느와르 장르는 세계에 대한 냉정하고 사실적인 관찰 그리고 극단적인 하드보일드(hard-boild)한 스타일로 세계의 부정성을 냉소와 환멸의 태도로 표현하는 장르이다. 이런 맥락에서 박상준 감독의 <황제를 위하여>는 느와르 장르를 상투적인 남성적 판타지로 축소시키고 있으며, 장진 감독의 <하이힐>은 느와르 장르의 공식을 뒤집으려 시도하고 있지만 지욱이라는 인물을 둘러싼 세계가 필연적 환경이 되지 못하고 배경으로 머물게 됨으로써 세계의 부정성은 부차적인 문제로 되어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어떤 방식이던 존재자는 세계와 교섭하고 그럼으로써 의미를 획득한다. 세계 속에 던져진 한 인간의 운명은 세계가 제공하는 가능성과 제약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나간다. 이러한 인간의 성공 혹은 실패 과정을 카메라라는 매개로 냉정한 관찰의 방식으로 모색하는 것이야 말로 영화의 근본적 존재 방식이지 않을까? 남성적 판타지를 통해 관객들의 환상적 욕망에 만족감을 주고, 기존 영화 장르의 문법에 도전하는 것도 대중예술로써 영화가 지닌 나름의 미덕이겠지만, 존재자와 세계가 관계하고 의미를 생성하는 방식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그것은 정말 눈에 보이는 거짓말이지 않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남자라는 추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