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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우일 Feb 24. 2016

분노의 역학

-이재규 감독의 <역린> (2014)

 1. 플래시백 기법의 활용과 그 의미 

   최근 이재규 감독의 <역린>(2014)이 개봉했다. <역린>은 정조 암살 사건을 둘러싼 인물들의 욕망과 사연을 통해 역사에 대한 흥미로운 해석을 제시하는 작품이다. 본래 ‘역린(逆鱗)’은 용의 목에 있는 비늘을 의미한다. 산해경(山海經)을 살펴보면 용이란 본래 온순한 짐승이어서 사람이 등 위에 올라탈 수도 있다. 그런데 용의 목에는 거꾸로 선 비늘이 하나있는데 이것이 바로 역린이다. 역린은 용의 심장을 보호하기 때문에 사람이 손으로 만지게 되면 용은 그 사람을 바로 찢어 죽인다. 예로부터 용은 임금이나 제왕을 상징하기에 역린은 왕의 분노를 의미하는 말이다. 


    최근 드라마 <이산>(2007), <바람의 화원>(2008), <성균관 스캔들>(2010), <무사 백동수>(2011) 등의 작품들을 통해 정조에 대한 재해석이 지속적으로 시도되어왔다. 영화 <역린> 또한 이러한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실존했던 정조라는 인물을 둘러싼 역사적 사건 자체가 드라마적으로 무척 매력적이다. 왕위와 자신의 목숨을 지키려는 정조 이산과 정순왕후를 지지하는 노론 세력의 대결은 흥미로운 정치드라마를 만들어내기에 적절한 소재이다. 

    영화 <역린> 또한 포맷에 있어서 기존 드라마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긴 호흡을 특징으로 하는 일반적인 TV드라마와 다르게 영화는 장르적 특성상 제한된 시간 안에 서사를 효율적이고 흥미롭게 풀어내야 한다. 더구나 <역린>의 시놉시스는 정조의 암살을 둘러싼 단 하루 동안의 사건을 다루기 때문에 시공간의 제약이 따른다. 그렇기에 더욱 섬세하게 시퀀스의 배치에 신경을 써야 한다. 또한 정조 암살 시도 사건의 긴장감 넘치는 전개도 중요하지만 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고,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 관객을 납득시키는 작업도 해야만 한다. 


    그래서 영화 <역린>은 플래시백(flashback)기법을 활용한다. 플래시백 기법은 주로 현재 시점에서 과거를 추억하거나 회상하는 일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 기법이다. 영화 <역린>에는 정조뿐만이 아니라 그를 보필하는 내관 상책 갑수와 의금부를 통솔하는 홍국영, 정조의 암살을 지시하는 정순왕후, 정조를 암살하기 위해 월담하는 살수 을수 등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들에게는 정조를 암살하거나 혹은 지켜야만 하는 사연과 목표가 있다. 영화는 플래시백 기법을 통해 인물들의 과거로 돌아가 숨겨진 사연을 소개한다. 우연적인 에피소드들이 하나씩 소개되고 쌓여가면서 그것은 정조 암살 시도라는 사건을 형성한다. 

   영화의 플래시백 기법의 잦은 사용에 대해 대중들의 반응은 호불호가 엇갈린다. 영화 <역린>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다음과 같다. 우선 영화의 속도감이 떨어져서 몰입이 쉽지 않고 또한 많은 인물들의 사연이 소개되어서 그 구성이 난삽하다는 것이다. 영화의 속도감은 인과적이고 시간적 순서에 따라서 막힘없이 사건이 전개되는 데서 찾아진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인지구조는 시간적 순서의 배열에 가장 익숙하기 때문에 플래시백 기법의 잦은 사용은 인지과정의 제약을 불러온다. 그 결과 영화의 전개가 지루해지기 십상이다. 

    그렇다면 만약 영화 <역린>에서 플래시백 기법의 사용을 자제하고 각각 인물들의 욕망과 사연이 깊이 있게 소개되지 않은 상태로 하루 동안 일어나는 궁궐 내부의 움직임을 집중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면 어땠을까?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까? 그랬다면 영화는 오히려 단순한 스릴러로 전락했을 것이다. 예술에 있어서 형식은 내용이다. 이 영화를 흥미롭게 하는 것은 각각의 욕망과 사연을 담은 에피소드가 모여서 하나의 필연적 사건을 구성하는 데에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詩學)에서 예술이란 인간이 지닌 모방 욕망의 표출이라고 말한 바 있다. 무대 위에 인간의 삶을 모방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운명을 결정짓는 필연적 사건임을 전제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꽤 흥미로운 성찰이다. 우연적 사건들의 나열이 하나의 필연적 사건을 구성하도록 의도된 영화적 구성은 주목된다. 실제의 삶 또한 그렇지 않은가? 우연적인 일상들이 모여서 개인의 삶을 구성하고, 그 삶들의 과정과 선택이 모여서 역사의 필연을 구성한다. 바로 영화 <역린>의 구성은 형식 자체가 인간의 운명을 모방하고 있다. 

    영화는 정조의 복수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지 않는다. 영화는 계급이나 혈통의 존귀를 따지지 않는다. 우리는 영화 <역린>에서 정조 또한 역사 속에서 하나의 비극적인 에피소드를 지닌 상처받은 인간임을 주목해야 한다. 


  2. 나의 선(善)에 분노하라

   영화 <역린>은 화려한 이미지의 운동성으로 승부하는 작품이 아니다. 카메라가 테크닉하게 사용되는 마지막 궁궐에서의 전투씬을 제외한다면, 대부분 카메라의 시선은 정적이고 건조하다. 아무래도 궁궐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촬영되고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납득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영화 <역린>은 이미지의 운동성 보다 서사의 운동성에 기대고 있다. 덕분에 감독이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비교적 강하게 제시된다. 플래시백 기법의 잦은 사용은 작품에서 소설적인 서사성의 강화로 이어지고 보다 작가의 개입을 용이하게 한다. 

    특히 영화의 모티프인 중용(中庸) 23장은 감독이 관객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압축하여 제시하는 오브제의 기능을 한다. 짧은 시간이지만 영화의 전반부 상책 갑수에 의해서 제시되는 중용 23장은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결국 세상은 바뀐다.’라는 전언을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그리고 후반부에 어린 아이들을 납치하여 살수로 키우는 광백을 처단하고 궁으로 돌아가던 정조가 마상(馬上)에서 중용 23장을 외우는 장면은 영화의 메시지를 강조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는 자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전언은 관객들에게 의미 있게 다가올 수 있다. 하지만 영화의 제작 의도를 노골적으로 강조한 것은 좋은 선택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아쉬운 마무리이다. 


    영화 <역린>은 변화에 대한 갈망을 담고 있다. ‘역린’이 ‘왕의 분노’를 뜻하지만 정조는 자신을 죽이라 명령한 정순왕후를 용서한다. 어쩌면 그의 분노는 정순왕후가 아니라 다른 곳을 향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정조의 분노는 변화의 갈망을 잃어버린 우리들의 냉소적인 내면을 향하는 것은 아닐까? 

    스피노자의 <에티카>에 따르면 인간은 이성과 정서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존재이다. 인간은 신체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감각에서 비롯되는 분노와 슬픔의 정서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은 합리적인 이성을 지니고 있기에 정서를 이성의 법칙에 따라 다스리면 기쁨을 증진시키고 지복(至福)을 누릴 수 있다. 

    분노나 슬픔은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이성에 의해 지양되어야 하는 정서이다. 그렇지만 분노와 슬픔은 기쁨의 감정과 뒤섞여 인간의 정서를 구성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이런 맥락에서 스피노자는 분노나 슬픔의 감정을 지양할 것으로 보지만 그것의 가치를 평가절하하지 않는다. 분노의 감정은 무의미하지 않다. 분노는 분명 악한 것이지만 동시에 대상을 부정하는 판단력이기도 하다. 대상을 부정하고 해체하는 분노의 감정은 인식의 비판적 판단력을 증진한다.

    발터 벤야민이 <독일 비애극의 기원>에서 우울의 감정에 주목하고 그것이 대상에 대한 회의와 번민에서 비롯됨을 인식하듯이, 분노는 대상에 대해 부정성을 획득하고자 할 때 발생한다. 오히려 사회의 내부적 동력이 운동성을 잃는 순간은 회의와 분노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선량한 인간들로 가득할 때이다. 이것은 역설이다. 선량한 인간은 무엇이 선(善)인지 물을 수 있는 메타적 위치를 확보하지 못한다. 그의 선량함은 개인적 안정과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지만 선함의 가치에 대한 비판적 물음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영화 <역린>은 정조라는 인물의 입을 통해서 중용을 말한다. 그리고 중용의 진리를 통해서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는 냉소로 가득한 우리의 마음을 치유하라고 권한다. 우리가 지금 분노해야 할 대상은 자기 자신이다. 세상에 대한 실망 때문에 자신을 동정적으로 위로하고, 나약함을 냉소로 위장하는 우리들 내면의 선함에 대해 분노해야 한다.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하라. 이 잠언의 참뜻은 아무리 사소하게 보이는 작은 일도 세상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아닐까? 세상에 작은 일이란 없다. 그렇게 보일 뿐. 혹은 그렇게 믿고 싶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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