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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우일 Feb 24. 2016

당신은 복수할 권리가 없다

-이정화 감독의 <방황하는 칼날> (2014)

  1.


   일본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이정호 감독의 영화 <방황하는 칼날> (2014)이 개봉하였다. 영화는 잔혹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소년들에게 딸을 잃은 피해자의 아버지가 다시 복수한다는 내용이다. 이미 <방황하는 칼날> 이외에도 김용호 감독의 〈돈 크라이 마미〉 (2012)는 비슷한 주제로 청소년 범죄의 어두운 이면을 드러낸 바가 있다. 피해자가 다시 가해자가 되는 악순환의 과정을 통해서 진지하게 청소년 범죄에 대해 논의해봐야 할 것임을 주지시킨다. 


    수진은 버려진 동네 목욕탕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고, 아버지 상현은 경찰로부터 자신의 딸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누가 자신의 딸을 살해하였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무기력하게 경찰서 한 구석에 앉아있던 상현의 휴대폰으로 문자 한통이 날아든다. 문자에는 수진을 살해한 범인들의 거주지와 이름이 적혀있다. 범인의 집으로 찾아간 상현은 그곳에서 수진이 납치 및 강간을 당하고 살해되는 과정이 담긴 동영상을 발견한다. 마침 집을 나갔다 돌아오던 철용은 상현이 내려치는 야구방망이에 맞아 살해당한다. 이후 상현은 수진의 죽음에는 철용뿐만이 아니라 다른 공범 조두식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추적을 시작한다.

    영화 <방황하는 칼날>은 상현이 자신의 딸을 살해한 범인 조두식을 뒤쫓는 과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상현이 조두식을 쫓는 과정에서 청소년 범죄가 사회적 환경의 모순에 의해서 발생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의 표면은 상현이 조두식을 쫓는 과정을 긴장감 있게 연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만 상현이 정작 발견하는 것은 현실의 모순된 구조이다. 


    강릉에 거짓으로 학원을 차려놓고 가출한 청소년들을 데려다가 불법적인 성매매를 알선하던 포주를 상현이 살해하는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아직 미숙한 청소년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범인에 대한 처벌은 가볍게 하면서, 보호해야 하는 청소년들을 불법적인 사회적 환경으로부터 방치하는 모순된 사회구조가 뼈아프게 그려진다. 이처럼 우리 사회에서 “청소년을 보호해야 한다.”라는 구호가 얼마나 빈 수사에 불과한지 보여준다. 

    또한 영화는 상현에 의해 죽음을 당한 철용의 부모들을 통해 피해자가 된 가해자의 부모들의 태도를 보여주고, 다시 철용과 두식에게 강간을 당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녀를 둔 부모의 오열하는 모습을 대비시킴으로써, 누가 가해자이고 피해자인지 관객에게 되묻는다. 분명 현실적인 법의 잣대로 보았을 때 상현이 철용을 사적으로 살해한 것은 불법이다. 하지만 자신들의 범죄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고, 경찰에게 체포된다고 해도 6개월 안에 다시 풀려나는 현실 앞에서 복수를 선택하는 상현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영화는 지속적으로 극단적인 윤리적 선택을 문제 삼으며 관객들에게 묻는다. “당신이라면 어떠한 선택을 할 것인가?” 이것은 어쩌면 더 이상 사회가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지도 모른다. 사건이 일어나고 그 사건에 대해 합리적인 해결이 불가할 때 개인은 사회에서 용인되지 않는 극단적 선택을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2.

    영화 <방황하는 칼날>에서 연출은 추격이나 액션의 긴장감보다 상현의 내면에 더 맞춰져 있다. 오프닝 씬에서 부터 설산(雪山)에 공허한 표정으로 서있는 상현의 얼굴을 클로즈업(close-up)하여 보여줌으로써 이 영화가 화려한 액션보다는 딸을 잃은 아버지의 내면을 다룰 것임을 암시해주고 있다. 영화는 상현의 추적 과정에서 부조리한 사회의 병폐와 딸을 잃은 아버지의 고통을 보여주려 노력한다. 모든 것을 잃은 얼굴을 하고 범인을 추격하는 상현의 모습은 관객들에게 공감을 주지만 두 시간의 런닝타임 동안 진전되지 않는 이야기가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제임스 완 감독의 영화 <데스센텐스> (2007) 또한 자신의 아들을 갱스터에게 잃고 분노한 아버지가 직접 갱스터들을 소탕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법에게 심판을 맡기기 보다는 아들을 죽인 범인을 찾아가 직접 복수한다는 설정 자체가 자극적이다. <방황하는 칼날>이나 <돈 크라이 마미>등과 설정은 비슷하지만 미국에서 제작된 영화답게 특수부대 출신의 아버지의 액션이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 작품은 미국 사회에서 폭력이 얼마나 일상화되어 있고 이에 대한 법의 대응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술한지 보여준다. 이러한 상황에서 직접 아들의 복수를 하기로 선택한 아버지의 윤리적 선택은 의심 없이 정당화된다. 

    영화 <데스센텐스>가 보여주는 할리우드 방식의 내러티브와 연출 방식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야기를 분명하게 지루하지 않도록 관객에게 전달한다는 점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방황하는 칼날>은 소재가 새로운 것이라고 보기 힘들며 주제 자체가 무겁다. 내러티브의 전개에 있어서도 진전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가해자 가족들의 이기심이나 법집행의 문제 그리고 청소년 범죄를 유발시키는 사회의 부조리들이 디테일하게 다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상현이라는 인물의 내면에 초점을 맞추고 연출했기 때문일 것이다. 짧은 이야기에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하였다. 아쉬운 지점이다. 


    영화 <방황하는 칼날>이나 <돈 크라이 마미>의 경우 피해자로서 가해자에게 복수하는 행위의 당위를 의심하지 않는다. 덕분에 관객들은 피해자인 상현에게 쉽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다. 우리는 상현의 관점에 따라 법의 불합리성과 범죄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소년들의 모습에 분노하게 된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복수하는 것이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이 될 수 있을까? 딸을 잃은 아버지의 심정은 이해한다지만 영화는 상현의 내면에 초점을 맞춰 연출하다보니 문제의 본질이 흐려지고 관객들을 감성적인 판단으로 이끈다. 

    다니엘 그로우 감독의 <세븐데이즈> (2013)와 강이관 감독의 <범죄소년> (2012) 경우는 다른 관점을 제시해주고 있다. 영화 <세븐데이즈>는 한 남자가 자신의 딸을 강간하고 살해한 소아성애자를 납치하고 7일간 고문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딸의 죽음에 분노한 아버지의 냉정한 복수는 잔혹하기만 하다. 망치로 범인의 무릎을 파괴하는 것은 물론이고, 성기를 절단하는 과정까지 끔찍하고 잔혹한 고문이 지속된다. 영화는 범인의 육체가 파괴되는 과정을 통해 딸을 잃은 고통의 깊이를 관객에게 전달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행위는 복수가 아니라 단순한 물리적 폭력으로만 보인다. 범인의 육체가 파괴되어갈 때마다 고문하는 주인공의 정신도 같이 황폐해져 간다. 복수가 문제의 해결점이 아니라 사건의 연장일 뿐이며 어떠한 해결책도 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타자의 파괴를 통해서는 어떠한 보상도 주어지지 않으며 자신의 자아를 파괴할 뿐이다.


    영화 <방황하는 칼날>은 복수에 있어서 비교적 손쉬운 입장을 취한다. 영화 중간에 상현의 심정에 공감하면서도 그의 뒤를 쫓는 형사 억관이 “범죄에 애, 어른이 어딨어? 좆같은 새끼들만 있는 거지.”라고 툭 내뱉는 말은 감독이 관객에게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로 보인다. 더구나 상현이라는 인물의 내면을 중심에 두고 전개되고 있으니 더욱 설득당하기 쉽다. 그렇지만 이것은 너무 손쉬운 판단 방식이 아닐까? 

    강이관 감독의 <범죄소년>은 청소년 범죄라는 것이 사회적인 악순환에 의해서 범죄 소년이 탄생하는 과정을 다룬다. 어머니에게 버려져 할아버지 손에서 자라며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다가 절도죄로 소년원에 들어간 소년이 자신을 버린 미혼모 엄마를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영화는 사회적 약자에 불과한 평범한 소년이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 범죄소년으로 낙인찍히고 생산되는 과정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만약 영화 속의 소년에게 사회적인 관심과 호의가 있었다면 그가 범죄소년이 되는 일은 충분히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영화 <방황하는 칼날>이 문제적인 것은 범죄소년들의 잔혹한 범행과 피해자들의 괴로움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이 모든 것들은 범죄가 발생된 이후에 벌어지는 사후적 문제들이다. 영화는 사건이 발생하고 그것이 가져오는 피해자들의 고통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면서도 범죄소년들이 어떻게 탄생하고 왜 그들이 자신의 범죄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지 집요하게 질문하지 않는다. 단순히 소년들이 범죄를 저지르고도 태연한 것은 그들이 과거에 비해서 영악해졌기 때문인 것일까? 본질적으로 무엇이 그들을 범죄소년으로 생산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하지 않을까? 이런 맥락에서 영화 <방황하는 칼날>은 새롭거나 긍정적인 성찰의 시선을 보여준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영화는 윤리적 테마를 다루고 자극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지만 오히려 질문의 자극성을 흥행의 요소로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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