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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우일 Feb 24. 2016

최근 한국 영화의 키워드, 아버지

-이기욱 감독의 <아버지>  (2013)

  1. 아버지라는 기호 

    이기욱 감독의 작품 <살인자> (2013)는 상당히 흥미로운 작품입니다. 만약 “나의 아버지가 ‘연쇄살인마’라면 어떨까?”라는 자극적인 질문에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살인마라는 설정은 장준환 감독의 <화이> (2013)에서도 보여준 바가 있고, 국동석 감독의 <공범> (2013)에서도 아버지가 유괴살인사건의 용의자입니다. 곰곰이 생각하면 이것이 과연 우연인가라는 물음을 묻게 됩니다. 

    왜 이러한 현상들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이것에 대한 해명은 쉽지 않아 보입니다. 물론 최근 한국영화에 나타나는 ‘아버지’라는 기호를 한국사회의 현실과 밀착시켜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선 영화라는 텍스트에서 아버지라는 기호가 형상화되는 독특한 자질부터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앞서 작품들이 공유하는 하나의 특징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자신의 역할과 존재 가치를 자식에게 인정받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장준환 감독의 <화이>에서 아버지 석태(김윤석 역)는 자신의 아들 화이(여진구 역)가 자신과 같은 ‘괴물’이 되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아들은 아버지를 닮는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로서 석태는 자신을 혐오스러운 괴물로 바라보는 화이에게 분노합니다. 자신과 똑같은 괴물이 되라는 석태의 제안을 거부하던 화이는 영화의 말미에 이르러 아버지 석태를 살해하고 스스로 괴물이 됩니다. 그리고 도심의 어딘가로 사라져버립니다. 아버지를 부정하지만 화이는 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게 된 것이지요. 

   이기욱 감독의 <살인자>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연쇄살인마 주협(마동석 역)은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시골의 어느 마을에서 정체를 숨기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가 자신의 살인충동을 제어하게 해주는 안전장치는 자신의 아들 용호(안도규 역)입니다. 조용하게 일상을 살아가던 부자에게 시골마을로 이사 온 지수(김현수 역)가 끼어들면서 아버지와 아들은 위기를 맞게 됩니다. 지수가 주협의 정체를 알아차리게 되고 더불어 용호는 자신의 아버지가 연쇄살인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신의 아버지가 연쇄살인마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던 용호는 자신을 배려해주던 담임선생님의 신체를 상해하고 그 피를 흡혈함으로써 정화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목격한 주협을 살해하고 맙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를 닮을까봐 두려워하던 용호는 아버지를 살해함으로써 살인자가 됩니다.
  
    이 영화들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한 유형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표면적으로 아버지를 살해함으로써 아들이 아버지의 권위를 상속받았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물론 앞서 작품들은 아버지의 운명을 계승한다고 하는 편이 더 설득력 있겠지요? 그런데 <화이>나 <살인자>의 경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이야기 구조가 묘하게 전도되어 있습니다. 아버지의 권위가 두려워 거세공포에 시달리는 아들의 모습을 다루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아들 때문에 공포를 느끼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마치 “내가 더럽더라도 네 아버지란 말이야!”라고 고집을 부리는 것만 같습니다. 바로 <화이>나 <살인자>와 같은 영화에서 주목해야 하는 핵심은 아들의 거세공포가 아니라 아버지의 ‘인정욕구’ 혹은 ‘불안’입니다. 

  2. 불안의 일상화 
  
    이기욱 감독의 <살인자>에서 주협이 자신의 아들에게 선량한 아버지로 남기 위해 살인을 선택한다는 점에서 모순된 아버지의 욕망을 담고 있습니다. 타자에게는 연쇄살인마이지만 자신의 아들에게는 이상적인 아버지가 되고자 하는 이 모순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인간 욕망의 근원적인 모순성을 강조하는 것만으로는 설명되기 힘든 것 같습니다. 

    영화는 예술적 텍스트이기도 하지만 현실 사회를 반영하는 알레고리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영화는 분명 예술적 텍스트이지만 사회적 생산양식에 의해 상품으로 생산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영화는 현실을 그 자체 그대로 재현하지 않습니다. 현실의 일부를 작품 속에 다양하게 변주시켜 관계하도록 합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지금 현실 사회의 특징을 살펴보는 것은 결코 무의미한 환원론이 아니라 작품을 다양하게 이해하는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과거 아버지라는 존재가 가부장제에서 권위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단순한 제도적 차원이 아니라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다는 경제적 능력을 바탕으로 합니다. 가치 생산은 노동자가 공장에 노동력을 판매하고 보상을 받음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공장이나 회사에 자신의 노동력을 팔 수 없게 되면 노동자는 실업자가 되어버립니다. 일시적인 실업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다른 공장에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면 되니까요. 문제는 실업의 장기화가 노동자를 사회의 불필요한 잉여인간으로 전락시킨다는 것입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과거 제국주의 시기 자국의 잉여인간들을 식민지로 배출함으로써 인구과잉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식민지와 지구의 미개척지가 사라지면서 각 국가들은 자국의 과잉 인구를 통제하고 조절할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한정된 일자리에 비해서 인구는 과잉되고 덕분에 경쟁이 과열됩니다. 더 이상 노동자가 노동력을 공장에 판매하는 것이 어려워집니다. 이제 실업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만연하게 되어버립니다. 장기적인 혹은 영구적인 실업 상태의 인간을 ‘잉여인간’이라 부르게 됩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는 것에 성공한 노동자도 마냥 기뻐할 수 없습니다. 얼마든지 자신을 대체할 수 있는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언제 실업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만성적인 것이 되고 일상에 자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생각해봅니다. 과거 안정된 일자리와 정체성 속에서 살아왔던 아버지는 가정에서 가부장으로서 권위를 지닐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어떤가요? 언제 공장이나 회사에서 해고될지 모른다는 불안이 일상화된 현대 사회에서 아버지의 권위는 상당히 위축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가정을 책임지기 위해 노동력을 지속적으로 공장에 판매하려고 합니다. 덕분에 젊은 잉여인간에게 아버지는 자신들의 불안정성을 증가 및 지속시키는 불필요한 존재들입니다. 

    아버지는 이제 자신의 가정과 권위를 지킬 수 있을지 걱정하며 불안을 견뎌야 하며, 자신의 후속 세대에게 부정과 경쟁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복잡 미묘한 존재가 됩니다. 이렇듯 현대사회에서 아버지라는 기호는 과거와 같이 사회를 통제하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빅 브라더(big brother)로 단순하게 환원할 수 없는 복잡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3. 아버지-되기의 어려움 

   그렇다면 위의 맥락을 고려하며 이기욱 감독의 <살인자>를 살펴보도록 할까요? 이기욱 감독의 <살인자>뿐만이 아니라 앞서 소개된 다른 영화들 속에서도 아버지란 존재는 자식들에게 인정받고자 하지만 거부당하는 사람들입니다. 영화 <살인자>는 아버지가 연쇄살인마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괴로워하는 용호에게 주목합니다. 하지만 보다 작품이 흥미로운 것은 주협이 용호에게 만큼은 이상적인 아버지가 되고 싶어 한다는 점입니다. 주협은 이상적인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 노력하며, 동시에 자신이 연쇄살인마라는 사실이 밝혀질까 두렵습니다. 왜냐하면 진실이 밝혀지면 자신이 지향하는 이상적 ‘아버지-되기’에 장애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주협이란 존재는 강력한 힘(살인충동)을 소유한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가정이 파괴될까 두려워하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영화 속에서 주협이 타인을 살해하는 폭력은 자신이 상상하고 있는 이상적 가족 관계(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지키기 위한 불안의 표출에 가깝습니다. 혹은 ‘아버지-되기’가 장애받는 것에 대한 히스테릭한 반응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협은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을 꿈꾸고 ‘아버지-되기’를 욕망하기 때문에 그것에 장애가 되는 것을 파괴합니다. 하지만 주협의 판단은 자기 자신을 파괴하고 용호마저 살인자로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아버지-되기’의 이상을 위해 타인을 파괴하는 행위는 윤리적으로 인정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영화 속에서 주협이라는 인물은 단순한 연쇄살인마가 아니라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실패한 아버지’라는 형상을 취하게 됩니다. 


    라캉 정신분석에 따르면 우리는 상징적인 아버지의 법(기성의 언어적 질서)을 받아들임으로써 상징계(기성의 언어화된 사회체제)에서 자신의 위치와 정체성을 구축하고 정박하게 됩니다. 그런데 상징계가 주체에게 부여한 역할의 수행에 있어서 문제점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버지-되기’에 실패하고, 아들은 그런 아버지를 ‘가족’이 아니라 ‘적’으로 되돌립니다. 과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대변되는 근대적 방식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느슨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기욱 감독의 <살인자>를 비롯한 <화이>와 <공범>등의 영화에서 재현되는 ‘아버지-되기’의 실패와 불안감의 표출은 정신분석에서 전제하고 있는 근대적 ‘아버지-아들’ 관계의 역할 수행의 모델에 대한 재해석을 고민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이기욱 감독의 <살인자>는 한 연쇄살인마의 ‘아버지-되기’의 실패 과정을 통해서 아버지라는 기호가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견고한 권위를 지닌 존재로 상징화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버지는 더 이상 견고하거나 강하지 않으며, 과장된 힘의 과시로 자신의 나약함을 은폐합니다. 오히려 아버지라는 기호는 균열과 실패 그리고 불안으로 가득한 모순적 존재입니다. 이러한 아버지란 기호에 대한 해석은 고정되고 질서화된 사회적 경제체제가 점진적으로 해체되는 과정 그리고 유동적이고 액체화된 경제체제로 변화하는 현대화와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지적했듯 현대의 모더니티는 유동성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역할과 정체성이 고정되는 것을 거부하라고 요구합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정체성이란 변화 가능한 것이며 혹은 해야만 하는 상품이라는 환상을 심어줍니다. 영화 <살인자>에서 보여주는 ‘아버지-되기’의 실패와 불안은 주체를 고정시키고 정박하게 하는 근대적 사회체계의 해체와 그것에 대한 주체의 공포를 표현합니다. 앞서 영화들 속의 아버지들은 자기 자신의 역할과 정체성이 해체되는 것을 막고자 자식들의 인정이 필요로 하지만 아버지가 부정하다는 이유로 자식들은 거부합니다. 영화 속에서 연쇄살인마 주협이 자신의 살인충동을 억압할 때는 용호의 아버지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순간이라는 사실은 하나의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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