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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우일 Feb 24. 2016

달콤한 고통 속에서 사랑을 기다리다

-김기덕 감독의 <뫼비우스> (2013)


1. 사랑을 갈망하고 구원을 기다리며 

   김기덕의 신작 <뫼비우스> (2013)를 둘러싸고 자극적이고 충격적이라는 소문들로 가득하다. 하긴 한 가정의 아내가 바람을 피운 남편의 남근(男根)을 거세하려다가 실패하자 자기 아들의 남근을 거세한다는 설정 자체가 유별나다. 김기덕 영화에 관한 수많은 소문들, 그러니까 자극적이며 도착적이라는 세간의 평가에 걸맞은 작품이 아닐까한다. 다양한 김기덕의 작품들이 있지만 어떤 일관성을 가지고 지속되어왔다는 생각이다. 김기덕 영화의 인물들은 끝없이 상처받고 사랑을 갈구하며 자꾸 일상적 삶으로부터 어긋난다. 

    김기덕의 영화는 인간의 본성과 구원의 가능성에 대한 탐구로 이루어져 왔다. 감독은 <나쁜남자> (2002), <빈집> (2004), <시간> (2007), <숨> (2007), <비몽> (2008) 등의 작품에서 사랑을 소재로 은폐된 인간의 욕망을 다루었으며,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2003), <사마리아> (2004), <활> (2005) 등의 작품에서는 죽음과 구원에 관한 물음을 던진 바 있다. 초기 <악어> (1996)에서부터 탈출구 없는 욕망의 늪에서 파국을 맞는 인물군상들의 고통을 관찰해왔던 김기덕 감독의 세계가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라는 작품을 계기로 구원의 문제로 조금씩 자리 이동하다가 최근 <피에타> (2012)에서는 두 문제의식이 결합하는 양상을 보인다. 

    전작 <피에타> (2012)는 인간성을 상실한 사채업자가 그의 어머니라고 주장하는 한 여인에 의해 모성을 깨우치지만, 그녀가 갑자기 그를 떠난 이후 그리움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자살하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주인공 사채업자 강도의 죽음은 모성 부재의 상황이 주는 끔찍한 고통을 보여준다. <피에타>는 인간의 숙명적인 불완전성의 문제와 상실된 인간성의 회복과 구원의 문제를 환기시킨다. 특히 <피에타>의 내러티브는 비극적이지만 적어도 강도라는 무정한 인물이 인간성을 회복한다는 설정은 회의적으로 인간을 바라보았던 감독의 시선이 변화했음을 말해준다. 

   김기덕 감독의 신작 <뫼비우스>는 <피에타>와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이 작품은 도착적인 인간의 욕망과 구원의 문제를 익명의 부르주아 가정의 가족관계를 통해 보여준다. 작품에서 익명적 가족 관계는 언어가 아니라 근친상간의 성적 욕망을 토대로 한다. 영화에서 인물간의 ‘언어’가 부재하기 때문에 그들의 욕망은 인물들의 행위를 통해 표현된다. 여기서 행위는 단순한 육체의 움직임이 아니라 극한의 폭발적 감정을 내포한 세밀한 근육들의 움직임을 포함한다. 



    <피에타>가 비교적 탄탄한 구성을 가진 내러티브에 의해 전개된다면, <뫼비우스>의 분위기는 화면의 어두운 채도, 그리고 폐쇄적인 공간성, 내부의 욕망을 그대로 발산하는 배우들의 액션에 의해 구성된다. 덕분에 주관적이고 추상적인 심리적 몽타주라는 느낌을 받는다. <뫼비우스>는 현실을 객관적으로 재현하는 카메라의 투명성을 지향하기 보다는, 현실을 토대로 감독의 인상을 덧칠하고 있다는 표현이 적절해 보인다. 덕분에 감독의 문제의식은 내러티브의 느슨한 인과성과 사건의 비약을 보여주지만 어색하지 않으며 감독의 작가의식이 직접적으로 노출된다. 



2. 가족? 혹은 캐릭터? 또는 그 무엇에 관한 


   영화는 남편이 아내의 목을 조르거나, 아내가 아들의 성기를 씹어 먹는 충격적인 시퀀스들을 통해서 물러설 수 없는 감정의 대립을 시각화한다. 배우의 과잉된 정서 표출이 주는 기묘한 울림은 영화의 독특한 분위기 형성한다. 정서적 과잉과 어둡고 건조한 이미지들이 반복되면서 영화적 사건의 리얼리티는 추상적인 관념의 색채를 띤다. 



    자동차에서 섹스 하는 남편과 내연녀를 멀리서 바라보는 아내, 우연히 그것을 훔쳐보게 된 아들의 모습을 교차시키는 편집은 시간적 선후 관계에 따른 인과적 배치로부터 어긋난다. 감독의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편집이다. 그리고 점차 영화 <뫼비우스>는 이해할 수 없는 도착적 관계들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기묘한 세계로 변모해간다. 



    영화 <뫼비우스>는 한 가족의 파국을 다루고 있는 이야기인지 불확실하다. 영화 속에서 분명 많은 인물이 등장하지만 그들의 내면을 수렴시키는 것은 성적 욕망 혹은 사랑이라는 모호한 열정이다. 각각의 인물이 지니고 있을 복잡하고 다양한 욕망들은 거세되어 있다. 영화 속에서 진짜 거세된 것은 몇 그램도 되지 않는 남근이 아니라 인물들의 복잡한 내면이다. 



    영화 속에서 불량배 리더가 슈퍼마켓에서 일하는 여자를 강간했을 때 남근은 사랑을 왜곡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곧 여자의 참혹한 복수에 의해서 불량배 리더의 남근은 거세되고 만다. 이후 그들이 다시 만났을 때 남근에 의해 왜곡된 성적 욕망에서 벗어나 사랑이라는 모호한 열정에 사로잡힌다. 기이한 사랑의 열정은 강간법과 피해자라는 사회적 관계를 넘어서 한 남자와 여자의 순수한 사랑으로 초월된다. 



   잘려진 남근을 대신하는 차가운 비수(匕首)를 어깨에 내리꽂 은 남자의 고통과 서로를 탐닉하는 남녀의 모습은 상식으로 이해되기 힘들다. 남근이라는 성기에 집중된 성적 리비도가 온몸의 전신으로 퍼져나갈 때, 그것은 정상성에서 벗어난 도착증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항변하는 것만 같다. 이러한 항변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성적 욕망과 사랑을 구분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나약한 인간에 불과하다. 그들은 남근을 잃고서야 비로소 사랑이라는 어떤 초월적 관념의 세계에 도달한다.



    또 하나 물음을 던져보자. 그럼 영화는 남편의 불륜에 의해 위기에 빠진 한 부르주아 가정에 관한 이야기인가? 남편의 불륜을 목격한 아내가 남편의 남근을 자르려다가 실패하자 아들의 남근을 거세한다. 아들은 영문도 모르고 잘려나간 남근으로 인해 주변 사람들의 놀림감이 된다. 보다 못한 아버지가 아들에게 자신의 남근을 이식해준다. 아들은 사라졌던 남근을 다시 획득했지만 발기되지 않는다. 집을 나갔다가 돌아온 엄마의 젖가슴을 보고서야 아들의 숨죽어있던 남근이 발기한다. 남근에 의해 근친 욕망은 발동한다. 



    영화에서 그들이 누구인지, 가족 관계가 어떠한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명확하지 않다. 아버지, 아내, 아들은 모두 익명적 존재이며, 그들에게는 보편적인 가족관계는 있을지 모르나 그들만의 특수한 ‘시간’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 영화 <뫼비우스>가 아버지, 아내, 아들의 성적 근친 욕망의 범주로 밖에 표현되지 못한 것은, 세계를 인식하고 구성하는 요소인 ‘시간’의 축이 뭉텅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영화 <뫼비우스>에서 보여주는 부르주아 가정의 모습은 실제 현실의 반영이 아니라 감독의 추상적 세계관을 표현하기 위한 장치로 보는 것이 더 합당하게 보인다. 



    영화 <뫼비우스>가 실제 부르주아 가정의 위기를 재현하는 것이라 보기 어렵고, 개성적인 캐릭터의 복잡한 욕망을 보여준다고 말하기도 어렵다면,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행위는 어떠한 의미는 지향하는가? 이러한 물음을 던지게 되는 과정 자체가 영화 <뫼비우스>의 진짜 의도인지도 모른다. 



3. 소리와 언어의 단절 

   <뫼비우스>는 기묘한 작품이 아닐 수 없다. 건조한 화면과 소리는 존재하지만 대사는 없는 연출 자체가 인상적이다. 이 영화에서 거세되는 것은 ‘언어’이지 ‘소리’가 아니다. ‘소리’는 존재하지만 ‘언어’가 부재하는 상황. 이것이야 말로 <뫼비우스>의 독특한 자질이다. 소리는 날 것이지만 언어는 의미를 지니고 존재를 왜곡하기 마련이다. 영화는 언어를 배제함으로써 배우들의 표정과 몸짓에 주목하게 만든다. 



    스크린 위로 절개된 이미지들은 어떤 거짓을 말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이다. 직접적이고 극단적 행위로 감정을 표현한다. 배우의 얼굴과 몸으로 표출되는 감정은 후퇴를 모른다. 후퇴 없는 감정들 혹은 욕망들은 결코 언어라는 중립지대 아래 이해의 가능성을 고려치 않는다. 총으로 아내를 쏘아죽이고 자살 한 남편과 아버지가 남긴 총으로 자신의 성기에 총알을 박아 넣는 결말이 피할 수 없는 필연적 결과로 보이는 이유다. 



    일상적 현실에서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일은 드물다는 점에서 언어의 부재는 영화가 현실의 일상성을 교묘하게 비틀어놓은 가상공간임을 짐작하게 한다. 카메라는 현실을 모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화적 리얼리티를 더해줄 언어를 배제한다. 덕분에 영화의 소재부터, 인물들의 이해할 수 없는 비일상적인 행위들이 낯설지만 그렇다고 이상하지도 않다. 영화가 가상의 산물임을 드러내고 있는 바, 감독의 의도에 따라 배치된 영화의 작위성은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언어의 부재가 영화의 분위기를 만든다고 할까? 



    영화는 첫 시퀀스부터 과장된 배우들의 연기와 행위의 낯설음을 통해 언어 부재 상황을 나타낸다. 언어가 부재하기에 모를 여자에게서 걸려온 남편의 전화기를 뺏으려고 치열하게 바닥을 뒹굴면서 몸싸움을 벌이는 아내의 분노가 과장되게 표현된다. 더구나 남편이 외도하는 여자와 아내는 배우 이은우가 일인이역으로 연기하였다. 얼굴이 같고 두 역할의 분위기만 다르기 때문에 인물을 인식하는데 있어서 기묘한 혼란을 준다. 영화에서 남편은 아내와 불륜녀의 얼굴이 같다는 사실을 인지 못하며, 아들 또한 불륜녀의 얼굴이 자신의 친모와 같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특히 남편의 불륜 현장을 목격한 아내가 불륜녀의 슈퍼마켓에 돌을 던지는 시퀀스는 눈여겨 볼만하다. 둘은 깨어진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바라본다. 아내와 내연녀는 스타일만 다른 상태로 서로 얼굴을 마주본다. 외관상 차이가 없는 두 여자는 한 남자를 사랑한다는 같은 욕망을 공유하고 있으면서도 둘은 얼굴이 아니라 역할로 구분될 뿐이다. 유리창 하나를 겹쳐놓고 바라보는 둘의 차이는 단지 역할뿐이다. 



    과거 무성영화 시기 배우의 얼굴은 언어 대신 의미를 표현하는 하나의 중요한 기호였다. 배우의 주름 잡힌 표정과 감정은 언어를 대신할 아포리아를 지니고 있었다. 얼굴의 이미지는 언어적 설명이 주지 못하는 날 것의 다양한 감정을 표현해냈다. 이때 중요한 카메라의 테크닉이 얼굴의 감정을 잡아줄 클로즈업 숏(close-up-shot)이다. 마찬가지로 김기덕 감독은 클로즈업 숏을 통해서 두 여인의 분노와 놀람의 감정이 담긴 얼굴을 연결시킨다. 그런데 김기덕의 <뫼비우스>에서는 얼굴이 주는 아포리아가 축소된다. 



    카메라에 의해 잡히는 것은 분노와 놀람의 감정이지만 감독의 클로즈업 숏에 의해 연결된 배치의 인위성은 얼굴에서 비롯한 감정의 순수성을 흩어놓는다. 배우가 표현하는 감정이 영화 속 캐릭터가 느끼는 진정성이라고 생가하기 어렵게 만든다. 배우가 얼굴을 통해 표현하고 있는 캐릭터의 감정은 단지 둘이 서로를 다른 존재로 인식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장치로 축소된다. 그럼에도 영화는 두 인물을 관객들이 착각하도록 유도하고, 남근이 부재한 상황에서 내연녀를 강간하는 아들을 모습을 통해서 근친의 성적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4. 달콤한 고통이여! 

    김기덕 감독은 육체적 절단이나 상처 또는 자해를 통해 이별의 고통이나 그리움 혹은 사랑의 감정을 토로해왔던 것 같다. 그것은 때로 상상하지 못했던 충격적인 방식이기도 했지만 상처를 통해 새기는 극단적인 감정들의 흔적이기도 했다. 자신이나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는 방식은 기억을 넘어서 인간의 육체에 시간성을 부여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인간의 기억은 의식의 표면으로부터 사라질 수 있지만 육체에 새겨진 시간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상처는 잠재된 과거의 기억을 현재의 삶 속으로 견인한다. 이것은 새로운 창조적 시간을 우리 인간의 삶에 부여하며, 기억에 의해 재생되는 육체적 감각은 우리의 몸에 새로운 경험적 삶의 두께를 부여한다. 
  
    김기덕의 신작 <뫼비우스>는 남성이 지니고 있는 남근을 거세하고 상처 입힌다. 친모에 의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들의 남근이 거세된다는 것 자체가 엽기적이다. 남편에 대한 원망을 자신의 아들에게 되갚아주는 뒤틀린 욕망은 끔찍스럽다. 영화는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뒤틀고 있다. 거세 공포가 ‘위기’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제 ‘현실’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 거세된 자들의 욕망은 사라지지 않고 지속된다. 남근을 잃은 자들의 육체는 하나의 묘비처럼 존재하고, 상처라는 방식으로 쾌락을 향유하고자 한다. 육체의 고통과 쾌락이 상처를 통해서 동시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영화 <뫼비우스>에서 발등이나 손등을 긁어서 얻는 고통을 성적 오르가즘으로 전도시키는 장면은 욕망의 향락(Jouissance)을 보여준다. 또한 영화에서 비수는 남근을 대신하여 고통과 함께 성적 오르가즘 얻게 하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으며, 향락에의 추구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오브제(objet)이다. 향락이란 고통을 지속시키고자 하는 것. 혹은 고통이 주는 육체적 쾌락을 뜻한다. 영화 속에서 거세된 자들이 쾌락을 얻기 위해 행하는 도착적 행위들은 고통스럽지만 운명적이라는 인상을 남긴다. 영화는 상처 입은 인간들의 도착적인 사랑 방식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그리고 점차 사랑의 정상성에 대한 관념 자체가 들어서기 힘들어 진다. 마치 영화는 우리의 모든 사랑의 근본에는 도착 욕망이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는 것만 같다. 


    보편적 사고방식으로 이해하기 힘든 인물들의 행위와 그들의 욕망이 카메라를 통해서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동안 우리의 육체를 상징적으로 억압하던 ‘정상성’에 대한 감각은 저 멀리 사라진다. 서로에게 상처 입히며 고통을 향유하는 자들의 사랑은 일견 경건하게 보이기까지 하다. 그들은 쾌락을 독점하고 있던 남근이라는 고정점을 벗어나 새로운 사랑의 방정식을 스스로 구성한다. 앞서 비수를 어깨에 내리꽂고 나누는 성행위와 같은 것들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남근 부재로 인해 사라진 쾌락을 복원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새로운 방식의 쾌락을 재창조하는 순간이라 보는 것은 무리인가. 


    영화 <뫼비우스>에서 인물들의 도착적 행위가 의미가 있다면, 새로운 사랑 그리고 주체 자신의 정체성을 변화시키라고 요구한다는 점이다. 자신을 강간하고 이것에 대한 복수로 남자의 남근을 거세한 여자가 다시 자신을 찾아온 남자를 연민의 감정으로 받아들이는 시퀀스가 이를 잘 설명한다. 처음 그들의 성행위가 타자에 대한 폭력과 성적 쾌락에 목적을 둔 것이라면, 남근이 거세된 이후 나누는 성행위는 기묘한 도착을 동반한 사랑으로 승화된다. 사랑이 일으키는 고통은 화해의 방식이며, 서로를 공감하고 이해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어찌 이 고통을 달콤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 



5. 욕망은 초월될 수 있는가? 

   영화의 전반부에 부처상 앞에서 절을 하는 스님과 아들의 남근을 거세하고 어두운 거리를 방황하던 여자가 무엇에 홀린 표정으로 그를 따라나서는 시퀀스가 등장한다. 경건한 종교음악과 함께 어두운 색채 그리고 사람이 없는 길거리 등은 전체적으로 신비주의적 분위기를 연출한다. 정신병자의 표정으로 거리를 방황하는 영혼의 고독은 일견 독일의 표현주의적 스타일의 연출로 보이기도 한다. 앞서 영화의 시퀀스는 감독의 연출에 의해 심리적으로 편집되었다. 시퀀스의 배치에 있어서도 전후의 인과적인 편집을 염두에 두면, 전체적으로 돌발적이고 갑작스럽다. 이에 대한 비밀은 영화의 후반부에 드러난다. 


    영화에서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된 가족들의 운명은 파국을 맞이한다. 아내와 아들의 근친상간에 분노를 느낀 남편이 아내를 권총으로 살해한 후에 자살한다. 총소리에 놀라 방 밖으로 나온 아들은 부부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죽어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아들은 죄책감에 스스로 자신의 남근을 권총으로 쏘아 거세한다. 이후 갑자기 스님의 복장을 한 아들은 거리의 부처상 앞에서 경건하게 절을 올린다. 마지막으로 카메라는 스님이 된 아들의 미묘한 얼굴 표정을 클로즈업 하고 마무리된다. 


    영화의 전반부와 후반부의 시퀀스는 서로 호응하고 있다. 전반부의 편집은 이미 후반부의 결말을 염두에 둔 시퀀스 배치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두 시퀀스가 영화의 주제 의식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음을 말해준다. 어떻게 정의하는가에 따라 편차는 있지만 두 시퀀스는 ‘절대성에 대한 추구’ 혹은 ‘순수한 초월의 관념’을 내포한다. 


    영화는 남근을 잃고 성적 오르가즘을 얻기 위해 자신의 육체를 상해하는 도착적 사랑을 지속적으로 상연해왔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 사랑이 오히려 남근의 부재를 통해서 완성된다는 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김기덕 영화의 섹슈얼리티의 핵심에는 남근은 모든 문제의 시발점이라는 관념이 전제되어 있으며, 남근 부재를 통해서 동물적인 성적 욕망을 초월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남근은 어떤 의미에서 소리의 중심을 점유하고 있는 언어의 위상과 유사하다. 영화에서 남근은 사랑을 하나의 생식적 욕구 혹은 말초적 쾌락의 욕구로 축소하는 중심된 경로다. 존재를 비틀고 왜곡한다는 점에서 언어와 남근은 유사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언어가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 없듯이 남근 또한 주체와 밀접히 관계하지만 의지로 통제할 수 없는 무엇이다. 영화에서 생식기로써 페니스(penis)는 일종의 상징적 남근(phallus)으로 기능하며 인물들 사이를 옮겨 다닌다. 그 운동성이 인간들의 욕망을 생산한다. 또한 남근은 영화 속에서 배제된 언어 대신 인물들을 독점하고 규정한다. 감독이 영화의 연출에서 소리를 남겨두되 언어를 배제해버렸듯 영화의 내러티브에서는 남근을 거세하려고 한다. 그러데 남근 부재를 통해 순수한 초월적 세계 도달하게 되는 감독의 시선은 과연 설득력을 가지고 있을까? 


    현실적 욕망의 극복이나 초월은 남근의 거세,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욕망의 포기’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다. 욕망은 포기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승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마치 모든 세속적 욕망을 파국의 원흉으로 매도하는 방식은 손쉬운 이분법이 아닌가 싶다. 욕망은 삶의 다양한 국면을 창조하는 기초적 토대이다. 포기되어야 할 것은 욕망이 아니라 그것의 승화를 가로막는 왜곡된 상징 형식들이다. 이런 맥락에서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해탈(解脫)이나 초월의 포즈들은 전혀 비장하지 않으며 영화의 긴장을 급격히 떨어뜨린다. 


6. 파격과 전복 사이 


   이번 작품은 김기덕 감독에게 있어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하나의 쉼표이지 않았나 싶다. 아들의 성기를 거세하고 집을 나간 아내, 그리고 아비 된 도리로 자신의 성기를 아들에게 이식해주었지만 성적 욕구를 참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남편의 모습, 그 이후 다시 돌아온 아내와 아들의 근친을 목격한 남편이 아들의 성기를 거세하려는 장면은, 영화의 시나리오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토대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관객들에게 영화는 충격적일 수 있으나 상상력 그 자체는 새롭다고 보기 어렵다. 


    무엇보다 파격적인 시놉시스(synopsis)만큼이나 감독의 구도자적 태도가 영화 속에 너무 크게 자리한다. 아내가 외도한 남편의 남근을 거세하기 위해 칼을 숨겨놓았다가 꺼내는 곳이 부처상 바로 밑이라는 것은 상징적이다. 세속적 욕망 초월하기라는 문제의식이 한 쇼트 내부에 압축되어 있다. 이미 앞장에서 언급한 비장미(悲壯美)를 느끼게 하는 종교음악과 남근을 스스로 거세하고 취하는 해탈의 포즈는 김기덕 감독의 문제의식을 더욱 강하게 노출한다. 


    영화 <뫼비우스>가 불편해지는 순간은 감독의 의도와 메시지가 직접적으로 노출될 때이다. 감독은 시퀀스의 배치와 상징적인 오브제(부처상, 칼) 그리고 배경음악(종교적 신비주의를 연상시키는 음악)의 사용을 통해서 영화가 담고 있는 의미를 관객에게 강요한다. 외도한 남편에 대한 복수로 엄마가 아들의 남근을 거세한다는 시놉시스는 결과적으로 감독의 구도자적 태도를 강렬하게 보여주기 위한 파격적 장치로 사용되었으며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지 않는다. 


    전작 <피에타>가 공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감독의 문제의식이 상대적으로 비약하지 않고 절제될 수 있는 ‘내러티브’라는 장치가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뫼비우스>는 추상적이고 심리적인 연출을 통해서 드러나는 감독의 문제의식이 직접적으로 노출되는 것을 막아줄 장치가 없었던 것 같다. 덕분에 손쉽게 영화는 세속적 욕망의 초월이라는 문제로 비약한다. 상상력을 절제시켜줄 심리적 장치가 없는 경우 과잉된 관념의 노출이나 혹은 중간 단계가 빠진 논리적 비약으로 흐르기 쉽다. 영화 <뫼비우스>에서 감독은 이러한 함정에 빠진 것 같다. 


    전체적으로 <뫼비우스>를 구성하고 있는 많은 요소들은 파격적이었지만 전복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가장 큰 이유는 현실의 세속적 욕망의 문제들이 초월자의 시선으로 보자면 무의미하고 헛된 기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세속의 욕망을 버린다는 관념과 태도는 물론 중요하지만 모든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는 절대적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현실의 새로운 문제에 질문을 던지기 위한 한 가지 조건일 뿐이다. <뫼비우스>가 아쉬웠던 것은 현실과 치열하게 대결하던 감독의 문제의식이 많은 부분 긴장감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7. 초월이 아닌 열림으로 


   영화 <뫼비우스>가 아쉬움을 남기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감독은 인간의 본성에 관한 탐구와 구원의 문제에 대한 고뇌를 게을리 하지 않아왔다. 많은 평론가들 그리고 김기덕 감독의 영화에 관심을 가지는 관객들의 신뢰는 바로 여기서 나오는 것이다. 분명 김기덕 감독의 성실함이라면 더 파격적이고 전복적인 작품으로 관객을 찾을 것이라 믿는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감독의 작품 세계가 <아리랑> (2011)에서부터 <피에타>, <뫼비우스>를 거치면서 서서히 새롭게 자리이동을 해가는 중이라는 것이다. 세 작품의 표현 방식은 분명 차이가 있지만 인간에 대한 이해와 세속적 욕망 그리고 초월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커다란 총체적 세계를 구성해나가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그 과정에서 분열되어 있던 김기덕 감독의 문제의식들이 융합되면서 많은 충돌을 빚고 있는 것 같은데, 그 무의식적인 표현이 영화 <뫼비우스>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보면 욕망과 그것의 초월이라는 문제 사이에서 번민하는 감독의 내면을 알아차릴 수 있다. 다만 세속적 욕망이 쉽게 포기되고 초월된다는 느낌이다. 욕망이란 거세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새로운 도약과 열린 창조의 순간이라는 사실을 감독이 고려해줬으면 좋겠다. 그래서 감독의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뫼비우스>에서 노출된 김기덕 감독의 문제의식이 어떤 방식으로 변모하는지 과거의 작품들과 비교하며 지켜보는 것은 한 명의 관객으로서 즐거운 일이기 때문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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