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심우일 Feb 24. 2016

불가능을 모르는 청춘들의 수다

-이호재 감독의 <잉여들의 히치하이킹> (2013)


1. 스스로 잉여(surplus)라 부르는 청년들 

   이호재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잉여들의 히치하이킹>은 잉여청년들의 유럽여행기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영화 타이틀에 붙은 ‘잉여’라는 단어가 의미심장하다. 이미 잉여는 소비 이후에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어떤 상태나 대상을 뜻한다. 있거나 없거나 무의미한 상황이나 존재라고나 할까? 그런데 ‘잉여’라는 단어와 ‘인간’이라는 단어가 더해질 때 자조적 정서가 스며들기 시작한다. 요즘 불투명한 미래의 젊은 세대들은 스스로를 잉여라고 자칭하며 희화하기 시작했다. 잉여에 대한 희화는 개그 프로그램을 시청하면 쉽게 접할 수 있다. 푸른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청년 백수, 어렵게 대학원까지 졸업했지만 일자리가 없어서 방황하는 박사 등등 잉여인간은 일상에서 무능력하고 불필요한 존재로 표현된다. 


    과연 수많은 잉여인간들이 사회적으로 소비될 수 있다면 자조적 정서로부터 벗어나 미래의 행복을 쟁취할 수 있을까? 사회적으로 효용가치를 인정받는 인간이 되기 위한 과정은 지난하기만 하다. 학점 • 학벌 • 자격증 • 토익 및 어학연수 등등 서류 통과 자격을 갖추는 데만도 숨이 벅찰 지경이다. 더구나 백수 탈출의 꿈을 이루고 사회로 진출해도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결국 환상에 불과하며 진퇴양난이다. 가만히 있자니 잉여인간이 될지도 모르고, 사회로 진출해도 무한경쟁 속에서 언제 정리해고 당할지 모르는 긴장감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이러한 현실적 상황 때문에 이호재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잉여들의 히치하이킹>에 눈길이 간다. ‘도대체 잉여인간들이 히치하이킹을 떠나서 뭐 어쩌겠다는 거야?’라는 물음이 솟아나온다. 호기심에서 영화를 관람하는 순간, 유럽 전역을 여행하고 뮤직비디오 한 편을 제작하여 한국으로 귀국한다는 무모한 계획에 동참하게 된다. 감독이자 주인공 호재와 나머지 잉여(surplus) 멤버들이 유럽 여행을 시작한 계기는 단순하다. 대학등록금이 비쌌고 더 이상 학비를 마련할 수 없기에 차라리 무전으로 유럽여행을 다녀오자고 한 것이 발단이다. 마침 영화과 출신인 잉여(surplus) 멤버들은 유럽여행기를 다큐멘터리로 제작하였고 그 결과물이 영화 <잉여들의 히치하이킹>이다. 


    그래서일까? 영화 <잉여들의 히치하이킹>에서 감독이자 주연을 맡은 호재는 자신들의 일상을 별다른 각본 없이 사실 그대로 기록하듯이 찍었고 거리의 노숙자와 다를 바 없이 생활하는 모습을 영상 속에 담아냈다. 덕분에 영화는 잉여(surplus) 멤버들이 일 년간 겪었던 일상의 단편들을 시간적 순서에 따라서 붙여놓은 느낌이다. 여행의 목적 자체가 일 년간 유럽여행을 하고 귀국 전에 뮤직비디오를 찍어서 돌아온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어떤 구도적 자세를 부여하는 제스처가 없어 신선하고 담백했다. 

    영화란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었다고 하더라도 몽타주의 편집 과정을 겪게 된다. 감독에 의해 이미지는 선택되고 배치되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다큐멘터리 또한 투명한 사실적 기록물이라고 볼 수는 없다. 우리는 영화의 형식적 차원에서 호재의 내레이션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편집된 영상에만 주목한다면 영화는 잉여(surplus) 멤버들의 일상적 단편들을 늘어놓은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영상의 전후 관계 그리고 그들 사이의 갈등을 해설해주는 호재의 내레이션이 없다면 영화는 여운을 품기 어려웠을 것이다. 보이스 오프(voice-off)된 호재의 내레이션에 따라 각각의 장면들이 결합하면서 영화는 하나의 드라마로 완성된다. 


2. 낯선 만남을 통해 성장하기 

   영화의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은 드라마를 연출해낸다. 처음에는 낯선 유럽에서의 고난, 다음에는 그들의 사정을 전해 듣고 아무런 대가없이 도움을 주는 현지인들의 호의, 그리고 잉여(surpius) 멤버들이 제작한 호스텔 영상이 인기를 얻는 과정 마지막으로 유럽의 호스텔에 무료로 숙식하며 여행을 지속하게 되는 사연까지, 다큐멘터리임에도 불구하고 믿기지 않는 일들이 벌어지며 잉여청년들의 도전은 흥미로운 드라마가 된다. 


    영화는 낯선 만남이 얼마나 어렵고 힘겨운지 잘 담아낸다. 한국을 떠나 밟은 이국(異國)땅에서 느끼는 낯설음이 영화 초반의 고난을 통해 충분히 드러난다. 영화에서 호재, 하비, 현학, 휘 네 명을 제외한 동료들이 고통을 호소하며 한 달 뒤에 귀국하는 시퀀스가 있다. 아쉽지만 한국으로 귀국하기로 마음먹은 그들을 비난할 수 없다. 한 달 동안의 노숙생활과 호스텔 홍보영상을 찍어주고 무료숙식을 제공받겠다는 계획이 엉망이 된 상황에서 귀국은 특별한 목적과 결기가 없는 이상 납득할 만한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상은 많은 부분 보이지 않는 네트워크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회의 다양한 계기들과 접속되어있다. 우리는 사회적 네트워크를 통해 공동체를 형성하고, 생존하며, 어떠한 대상에 대한 가치를 판단한다. 국가 • 민족 • 인종 • 계급 등등의 상징적 매개를 통해 사회적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살아가는 우리들은 네트워크로부터 분리되는 고통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보이지 않는 네트워크로부터 분리되는 경험의 대표적 사례가 낯선 이국의 땅에 남겨지는 것 아닐까? 네트워크로부터 분리된다는 것은 두 가지 계기를 함축한다. 하나는 공포이고, 또 하나는 새로운 창조이다. 

    지속되는 여행에서 귀국을 선택한 사람들은 네트워크로부터의 분리가 동반하는 고난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었다. 이것은 호재 • 하비 • 현학 • 휘를 남겨두고 눈물을 흘리거나 “부디 살아 돌아와!”라고 외치는 장면에서 충분히 나타난다. “부디 살아 돌아와!”라는 말은 네 명의 잉여청년들에 대한 염려이기도 하지만 자신들의 둘러싼 네트워크와 분리된 경험의 두려움을 함축한다. 만약 잉여(surplus) 멤버들이 계획한 프로젝트가 충분히 여유 있는 자금을 가지고 수행되었다면 그들은 결코 “살아서”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동료들이 떠나고 잉여(surplus) 멤버들이 자신들의 여행을 완수할 수 있었던 것은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한 우연한 기회 때문이다. 남겨진 호재와 친구들은 잉여(surplus)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호스텔 영상을 만들었을 뿐이다. 그런데 네티즌의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덕분에 입소문이 세계 각국의 호스텔로 퍼져나가게 된다. 그들이 창조한 것은 호스텔 영상이 아니라 새로운 네트워크이다. 이 순간 영화는 다큐멘터리에서 서사를 가진 드라마로 전환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잉여(surplus)멤버들은 잉여인간에서 콘텐츠 생산자로 보이지 않는 상징적 위치 이동을 하게 된다. 그리고 영화는 말미에 이르러 영국의 밴드 아르코의 뮤직비디오를 제작하는 과정까지 도달한다. 이것을 계기로 호재와 친구들은 보이지 않는 갈등을 겪게 되지만 곧 화해와 함께 봉합된다. 갈등을 극복하면서 잉여(surplus) 멤버들은 잉여청년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지키는 어른으로 성숙하게 된다. 어느 사이 영화는 잉여청년들의 ‘유럽여행기’가 아니라 ‘유럽호스텔평정기’로 변모한다. 이들에게 잉여라는 말이 적절할까? 만약 영화 속에서 모든 계획이 결국 실패했다면 어떨까? 그들이 잉여로 남았다면 우리는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까? 궁금한 일이다. 



3. 잉여들의 유럽여행기는 유럽호스텔평정기로 


   영화는 아르코의 뮤직비디오를 완성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면서 절정에 도달한다. 아르코의 뮤직비디오를 완성하면서 잉여(surplus) 멤버들은 더 이상 잉여인간으로 규정되기를 멈춘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책임을 어른스럽게 완료하면서 내면의 성장을 이루고 영화는 마무리된다. 다큐멘터리 영화 <잉여들의 히치하이킹>은 우회로를 통해 무모한 목표로 보이지만 도전하면 이루게 된다고 말한다. 그 증거는 잉여(surplus) 멤버 자신들이다. 단순하면서도 간결한 메시지이다. 어려움이 있었지만 멤버들 간의 신뢰를 통해서 청춘들의 무모한 도전은 결국 성공했고, ‘잉여’라는 단어는 어쩌면 우리 내면의 도전정신이 퇴색되면서 나타난 단어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우리는 조금 냉정해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 영화 <잉여들의 히치하이킹>의 메시지는 일견 타당하지만 시중에 깔려있는 자기개발도서에 나오는 메시지와 유사하다. 자신의 자아를 긍정적 마인드(mind)로 변화시키고 현실에 주어진 고난들을 직면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면 언젠가 그 꿈을 이루게 될 것이라는 수많은 희망 도서의 메시지와 다를 바가 없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자기개발도서가 환상을 팔며 미래를 상품화하지만, 잉여(surplus) 멤버들은 실제로 그것을 이룩하는 과정을 보여줬다는 점뿐이다. 


    그들이 다시 한국에 돌아온다고 하여도 실제 현실 사회의 구조는 달라지지 않는다. 영화 <잉여들의 히치하이킹>은 스스로 잉여라 칭하며 자조하는 청춘들에게 무기력과 냉소로부터 벗어나게 도와주는 해독제일는지 모르지만 영화가 담고 있는 자기긍정의 과잉 또한 불편하게 보인다. 아무리 잉여(surplus) 멤버들의 개인적이고 우연적인 체험이 드라마틱한 다큐멘터리의 형식으로 구성된다고 해도 그것은 결코 리얼한 세계상이 아니다. 일부 자신들의 사례를 들어 성공담을 말한다고 세계의 근본적 구조들이 변하지 않는다. 잉여(surplus) 멤버의 호스텔 영상이 주목받고 유럽의 사회적 네트워크 내부로 접속하는 순간 더 이상 그들은 잉여가 아니었다. 그 순간부터 그들은 영상 콘텐츠 제작자의 입장에서 여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잉여인간이기에 겪을 수밖에 없는 초반부의 고난들이 영화를 모두 감상하고 나면 망각되는 것도 그 이유이다. 잉여(surplus) 멤버들의 드라마틱한 경험이 관객에게 인상적으로 남겨질지 모르지만 고통을 통해 얻는 성찰의 힘은 다소 부족하게 보인다. 호재와 친구들 사이의 드라마로 다큐멘터리가 급격히 전환되는 것은 이러한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잉여적 일상의 고통이 사라진 이상 자신들의 욕망을 실현하는 과정이 더 중요하게 된다. 영화는 자연스럽게 드라마가 생겨나고 말미에 호재와 친구들의 갈등은 극적으로 해결된다. 영화 <잉여들의 히치하이킹>은 잉여인간들의 유럽여행기를 소재로 청춘들의 도전정신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 분명하다. 하지만 잉여인간으로서의 삶이 지닐 수 있는 무게가 다소 진지하게 드러나지 않았고 개인적인 자기 내면의 승화를 통해 현실을 극복한다는 점에서 관념적이고 낭만적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영화 내부에서 충분히 보여준 것처럼 감독의 도전이 계속될 것이라 믿으며 다음 작품을 기대해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달콤한 고통 속에서 사랑을 기다리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