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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우일 Feb 24. 2016

거룩한 폐허의 삶, 선율의 바깥을 향하다

-영화 <불멸의 연인>과 <카핑 베토벤>을 중심으로


   베토벤에 관한 두 편의 영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하나는 버나드 로즈 감독의 <불멸의 연인> (1995)이고, 다른 작품은 아그네츠카 홀란드 감독의 <카핑 베토벤> (2007)이다. <불멸의 연인>이 베토벤의 유언장에 적힌 ‘불멸의 연인’의 정체를 추적하는 과정이라면, <카핑 베토벤>은 베토벤이 자신의 교향곡 9번 『합창』을 완성하고 죽음에 이르는 모습을 담았다. 두 작품에서 베토벤이라는 인물을 기억하는 방식은 상이하다. <불멸의 연인>은 완고한 베토벤의 이미지 뒤에 감춰진 인간적인 번민과 고뇌를 덧붙인다면, <카핑 베토벤>은 까칠하고 예민한 성격을 지녔지만, 주변의 도움과 보살핌이 필요한 인물로 바라본다. 물론 두 영화 모두 예술가 베토벤의 모습을 놓치지 않는다는 것이 공통점이라고 할까?   


  버나드 로즈 감독의 <불멸의 연인>은 베토벤의 죽음과 함께 시작한다. 그의 유언장에 적힌 재산상속자 ‘불멸의 연인’을 찾기 위해서, 친구이자 비서였던 쉰들러는 베토벤의 지인들을 만난다. 그들은 베토벤에 대한 각자의 기억을 털어놓으면서, 위대한 음악가로 알려진 베토벤의 이미지 뒤에 감춰진 모습들이 드러난다. 베토벤은 누군가에는 열렬한 자유주의자이고, 또 어떤 이에게 사랑하는 연인의 모습이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지독한 아집의 소유자로 그려진다. 베토벤이라는 인물은 하나의 고정된 이미지를 지니고 있지 않다. 기억하는 사람들의 관점에 따라 베토벤의 이미지는 변화한다. 진짜 베토벤의 모습은 그 많은 형상들 속에서 어떤 것일까? 우리는 알 수 없다. 다만 영화 속에서 베토벤이 고뇌와 번민에 휩싸일 때 흘러나오는 소나타와 교향곡들이 그의 부재를 메운다. 



   영화를 통해서 베토벤이라는 인물의 실재에 다가갈 뿐, 그의 삶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그 인격이 성장하고 변화하기 때문이다. 어떤 모습이 진짜 베토벤인가라는 물음은 영화를 이해하는 데 적합한 질문이 아니다. 위대한 음악가 베토벤이라는 이미지 뒤에 숨겨진 인간의 나약함을 수용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 더 적합해 보인다. 영화 속에서 베토벤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고 계속해서 고독해진다. 


   사실 베토벤의 장애는 청각의 결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사랑하는 방식에 있다. 그는 자신이 청혼했었던 여인과 스스로 파혼하고, 자신의 유일한 혈육이자 사랑하는 동생을 잃었으며, 끝내는 자신의 조카 칼에게 버려지는 상황에 처한다. 결과적으로 영화 속에서 베토벤이 누군가 사랑하면, 그들은 그의 곁을 떠나간다. 어찌 불행한 삶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시인 황지우는 「뼈아쁜 후회」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쓰지 않았던가.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페허다’라고 말이다. 사랑했던 자리마다 폐허가 되는 삶을 살아가는 베토벤의 음악은 위대할지 몰라도, 영화 속에서 그의 삶은 지독한 사랑의 실패로 황폐하기만 하다. 그렇다면 타인들로 하여금 무엇이 베토벤을 떠나게 한 것일까? 나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없었던 결여에서 원인을 찾고 싶다. 

   예컨대 동생의 아내에게서 조카를 뺏어와 아들로 키운 칼이 베토벤의 사랑과 기대에 부담스러워 자살을 시도하는 모습은 이 사실을 잘 드러낸다. 과거 법정에서 조카 칼에게 판관이 베토벤과 엄마 사이에서 누구와 함께 살겠냐고 물었을 때, 칼은 엄마 대신에 베토벤을 선택한다. 그 이유를 묻자 어린 칼은 “삼촌에게는 제가 필요하니까요.”라고 답한다. 베토벤은 귀가 들리지 않아 듣지 못했지만 어린 칼은 베토벤이 겉과 달리 자신의 돌봄이 필요한 나약한 사람임을 알고 있었다. 베토벤은 칼이 성인이 되기까지 그를 돌봐왔다고 믿겠지만, 역설적으로 칼은 베토벤이 그의 삶을 지탱하게 하는 욕망의 원인이 되어줌으로써 그를 돌보아왔다. 그런 칼의 자살 시도는 베토벤에게 자기 사랑의 실체가 타자에 대한 폭력과 집착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하는 사건이었다.   

   결국 말년의 베토벤은 자신의 모든 사랑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에야, 타자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먼저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드디어 『합창』교향곡이 연주되고 환상적인 이미지가 음악과 함께 포개어진다. 음악과 함께 불우한 유년 시절의 베토벤이 교차편집된다. 아버지의 폭력을 피해 집 밖으로 도망쳐 나온 베토벤은 보름달이 뜬 호숫가 앞에 도착한다. 그는 입고 있던 옷을 벗고 차가운 호수 속으로 들어간다. 그의 육체는 삶과 죽음의 경계 사이에서 호수의 수면 위를 떠다닌다. 하늘의 별들이 수면 위에 맺히며 호수는 우주를 비추는 거대한 거울이 된다. 


   카메라가 후면으로 트레킹 되면서 점차 그와 멀어진다. 수많은 별들이 늘어가고 베토벤은 육체는 사라져 하나의 별이 된다. 베토벤의 육체에서 한 점으로 그리고 무한의 우주로 나아가는 카메라의 움직임은, 인간의 관념과 상상력으로 포착될 수 없는 숭고한 무한의 이미지를 뇌리에 각인한다. 인간적 고뇌도 고통이 무화되고 성좌들의 운행이 있을 뿐 더 이상 유한한 인간의 시간 개념은 무의미해진다. 신의 영광과 인류의 대화합을 찬미한다는 베토벤의 『합창』교향곡에 담긴 정신과 함께 근원의 어둠 속으로 이미지는 흘러간다. 이것은 베토벤이 스스로에게 전하는 화해와 용서의 의미일까? 그렇게 무한과 우주를 표현하는 시각이미지는 베토벤의 교향곡이 생성하는 소리이미지를 포개어 놓으며, 우리에게 영원과 불멸에 대한 미지의 감각을 선사한다. 


   그렇다면 아그네츠카 홀란드 감독의 <카핑 베토벤>은 베토벤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영화 <카핑 베토벤>은 서사의 구조로 보아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전반부는 베토벤과 안나 홀츠가 함께 『합창』교향곡을 완성시키는 과정이고, 후반부는 안나 홀츠가 예술가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획득하는 내용이다. 전반부는 안나 홀츠의 눈으로 바라본 베토벤의 불행이 서사를 채우고 있다. 그의 예술혼은 주류 남성들의 세계 속에서 이해받지 못하고 있으며, 신체적으로는 청각장애를 앓고 있고, 조카 칼은 돈이 필요할 때마다 베토벤을 찾아올 뿐이다. 그의 불안한 심리상태는 아무렇게나 놓인 악보와 정리되지 않은 집의 모습을 통해 충분히 관객이라면 알아차릴 수 있다. 

   영화 속에서 남성 인물들은 타자를 이해하거나 공감하는 능력을 상실하고 있다. 베토벤부터가 광증에 시달리는 사람이며, 대체적으로 주변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까칠하다. 더구나 그는 조카 칼을 냉정하게 평가할 수 있는 눈을 상실하고 있다. 또한 오랫동안 베토벤의 악보정리를 도와주던 슐레머는 사흘간 함께 일한 안나 홀츠만큼 베토벤의 음악을 이해하지 못하며,  안나 홀츠의 남자친구로 등장하는 마틴 바우어는 기하학적 형식과 틀에 닫힌 인물이다. 이렇게 본다면 영화 속에서 남성 인물들은 성격의 결핍과 이해력 부족 그리고 자기의 틀 안에 갇혀 사는 불행한 존재들이다. 그렇다고 감독은 그들을 크게 동정하는 것 같지 않다. (물론 베토벤을 제외하고.)


   반면에 여성들은 베토벤의 음악을 이해하고 그의 예술에 깊이 공감한다. 예컨대 베토벤의 옆집에 사는 한 노파는 교향곡이 완성되어가고 있는지 안나 홀츠에게 묻고, 베토벤이 좌절하지 않고 작곡 작업을 계속해나갈 수 있도록 도우라고 조언한다. 영화 속에서 남성들은 타자와의 공감 능력을 상실하고 있다면, 여성들은 소통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대비된다. 이러한 대비적인 구성은 안나 홀츠가 베토벤의 곁에서 머무는 이유를 설득력 있게 강화하는 장치가 된다.    

 

  그녀는 베토벤의 악보정리를 도와주고, 어질러진 방을 질서 있게 정리하며, 베토벤이 지휘하는 오케스트라가 ‘조화’를 이루도록 도와준다. 이 과정을 통해 안나 홀츠는 단순한 조력자에서 베토벤과 교감을 나눌 수 있는 평등 존재로 상승된다. 드디어 『합창』교향곡이 울려퍼지고, 베토벤과 안나 홀츠는 서로를 나란히 마주보고 교향곡을 지휘하며 음악의 하모니를 끌어내는 데 성공한다. 영화는 『합창』교향곡이 주는 정동(affect)을 표현하기 위해 연주하는 장면의 사이마다 흔들리는 카메라로 베토벤과 안나 홀츠의 얼굴을 클로즈업함으로써 둘 사이의 교감과 격정을 표현한다. 


   공연이 끝난 후 베토벤은 그의 집에 방문한 안나 홀츠에게 “친애하는 안나 그대는 내 영혼의 천사이며, 시간의 파도를 넘어 내가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오.”라는 헌사와 함께 지휘했던 『합창』교향곡의 악보를 건네준다. 이 장면은 안나 홀츠가 베토벤에게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는 순간이며, 영화가 후반부로 넘어가는 장면이다. 안나 홀츠는 베토벤의 인정에 대한 기쁨을 느끼며, 용기를 내어 자신이 작곡한 작품집을 그에게 보여준다. 그러나 베토벤은 그녀의 작품이 마치 ‘방귀’소리 같다며 혹평한다. 마음의 상처를 얻은 그녀는 도망치듯 베토벤의 집으로부터 나와 수녀원으로 떠나버린다. 

  베토벤의 태도는 안나 홀츠에게 정말 무례하고 잔인했던 것일까? 베토벤의 인정은 어디까지나 안나 홀츠가 충실한 관객이 되었을 경우로 국한된 것으로 보인다. 헌사에 적힌 “내가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표현을 통해 충분히 알 수 있다. 즉 베토벤은 자신의 음악을 완전하게 이해한 감상자로서 그녀의 존재와 재능을 인정한다. 우리는 영화 속에서 안나 홀츠가 베토벤에게 자신의 작곡 능력을 증명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녀에 대한 베토벤의 혹평은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다.  


   안나 홀츠에게 18세기 비엔나라는 도시는 자신의 꿈을 현실화할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꿈이 억압당하는 좌절의 공간이기도 하다. 영화를 자세히 보면, 안나 홀츠 둘러싼 억압적 상황은 작품 속에서 암시되어 나타난다. 베토벤에게 돈을 뜯어내기 위해 찾아온 조카 칼이 그녀를 희롱하는 모습이나, 술에 취한 베토벤이 그녀의 장래희망을 듣고 비린내 나는 송어를 건네주며 비웃는 장면을 통해서 말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안나 홀츠는 자신의 재능을 인정해줄 사람이 필요했고, 그 사람은 바로 베토벤이다. 그래서 그의 곁에 남았고, 『합창』교향곡이 완성될 수 있도록 도왔지만 돌아온 것은 자상한 조언이 아닌 무례한 혹평이니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에 대한 실망감을 감추지 않는다. 실제 그녀는 베토벤을 원망하기 보다는 현실에서 아무런 소용이 없는 재능을 신이 내려준 이유를 묻는다. 

   안나 홀츠는 수녀원장에게 신이 음악적 재능을 내려준 이유가 무엇인지 묻지만 “신을 찬양하는 데 재능을 쓰라”는 대답만 듣는다. 그녀는 단호히 대답한다. “그것은 제 소명이 아닙니다.”라고 말이다. 신의 찬양이 아닌 무엇을 위해 그녀는 자신의 재능을 쓰고 싶은 것일까? 그녀는 베토벤과 같은 음악가로 성공하는 것을 꿈꾸는 것이리라. 영화에서 베토벤은 계속 그녀에게 자신을 닮으려 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베토벤과 닮으려는 동일성의 욕망을 벗어나지 않는다면 평생 자유로운 자신의 음악을 완성할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후반부에 있어서 하나의 반전이라면, 자존심이 강한 베토벤이 수녀원으로 안나 홀츠를 찾아와 무례를 사과하는 장면일 것이다. 베토벤이 안나 홀츠의 재능을 인정하고, 자신의 무례를 사과하면서 문제는 봉합된다. 드디어 안나 홀츠는 자신에 대한 확신 그리고 음악가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사건을 마주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몇 가지 의문이 남는다. 우선 안나 홀츠에 대한 베토벤의 인정이 갑작스럽다. 영화 속에서 그녀는 자신의 재능을 충분히 증명할 기회가 없었고,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또한 남성인 베토벤의 인정을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획득한다는 점에서 주체적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그리고 베토벤이 그녀의 재능을 인정했다는 사실과는 별개로 그녀를 둘러싼 현실과의 싸움에 직접적으로 뛰어들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그녀의 활동 반경은 베토벤과 함께 하거나 혹은 수녀원이라는 안정된 공간에 한정되어 있다. 

  표면적으로 <카핑 베토벤>은 안나 홀츠의 시선으로 바라본 베토벤의 일대기처럼 보인다. 하지만 작품의 결말에 도달하면, 안나 홀츠가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획득하는 성장드라마로 끝맺는다. 베토벤이라는 인물을 새롭게 조명하기 위한 관찰자로 안나 홀츠가 등장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안나 홀츠를 예술가로 성장시키기 위한 조력자로서 베토벤이 등장한다고 보는 편이 더 설득력을 가진다. 영화의 결말은 이 같은 관점에 힘을 실어준다. 베토벤이 죽고 난 이후 카메라는 오두막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안나 홀츠의 뒷모습을 보여준다. 즉 영화는 지금까지 안나 홀츠라는 여성 예술가의 내면이 어떠한 경험과 사건을 통해 형성되었는지를 보여준 것이다.   


   영화의 엔딩은 안나 홀츠가 오두막의 닫혀있던 방의 문을 열고 나와, 풀들이 우거진 길을 따라서, 빛나는 태양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는 장면으로 끝난다. 감독의 연출 의도는 안나 홀츠가 내면의 억압을 극복하고, 태양으로 상징되는 희망을 향해 묵묵히 나아가기로 결심했음을 암시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우리는 안나 홀츠가 세상의 억압과 어떤 방식으로 맞서고 싸워왔는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의 미래를 우리가 지지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우리는 베토벤을 소재로 삼은 영화 두 편을 살펴보았다. 버나드 로즈 감독의 <불멸의 연인>은 베토벤이란 음악가의 감춰진 불행한 생애를 다루며 화해와 용서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면, 아그네츠카 홀란드 감독의 <카핑 베토벤>은 안나 홀츠가 베토벤과의 만남을 통해 예술가로 성장하는 드라마를 보여준다. 두 영화는 베토벤이란 인물에 대한 역사적 기억을 각각의 관점과 스타일에 따라서 재배치하였다. 이 과정에서 영화의 내용은 실제 베토벤에 대한 삶과 멀어질 수도 있으나, 두 감독 모두 나름의 관점에서 ‘사실’ 대신에 어떤 예술적 ‘진실’을 담으려고 했으리라 짐작한다. 두 편의 영화는 베토벤이라는 인물의 삶을 흥미롭게 조명하고 있으며, 중간에 삽입된 다양한 음악만으로도 충분한 즐거움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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