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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우일 Feb 24. 2016

일상의 반복과 무의미를 대하는 두 가지 방식

-영화 <스모크>와 <커피와 담배>를 중심으로

  담배를 소재로 하는 영화 두 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웨인 왕 감독의 <스모크> (1995)와 짐 자무쉬 감독의 <커피와 담배> (2003)이다. 이 영화들은 같은 담배라는 소재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 기호적 의미를 다루는 방식은 차이를 보인다. 웨인 왕 감독의 <스모크> (1995)에서 담배는 인생 그 자체의 상징이라면, 짐 자무쉬 감독의 <커피와 담배>에서는 언어와 침묵 사이를 연결하는 하나의 구두점 혹은 쉼표로서 사용된다. 이것은 담배라는 소재를 통해서 인생을 대하는 감독들의 태도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웨인 왕 감독의 <스모크>는 담배 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처럼 카메라 워킹이 느리다. 마치 천천히 거리를 둘러보는 산책자의 시선으로 각각의 인물들이 지고 있는 인생의 그늘에 슬그머니 스며든다. 그 여행이 아늑하고 편안하지만은 않다. 신중한 걸음만큼이나 무게를 더하는 삶의 아픔과 깊이가 무겁다. 일상의 표면에 감춰진 상처들을 우리는 얼마만큼 견뎌낼 수 있을까? 한 순간도 담배를 놓지 않는 인물들을 보노라면, 단순한 구강충동이 아니라 삶에 대한 애착이 느껴진다.

   교통사고로 아내를 잃은 폴, 자신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떠도는 라쉬드, 음주운전으로 왼팔을 잃고 불구가 된 라쉬드의 아버지, 무료한 삶을 사진 찍기로 견뎌내는 오기, 돈이 필요해 옛사랑 오기를 찾아온 루디 등등 형체가 없는 담배 연기의 이미지만큼이나 삶은 해답도 목적도 없는 고해가 아닐는지. 


   영화는 오프닝 씬에서 “담배 연기의 무게를 잴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통해서 주제의식을 함축한다. 담배에서 담뱃재의 무게를 뺀 값을 연기의 무게라고 말하는 폴의 대사를 나는 이렇게 들었다. “영혼이란 인생을 뺀 나머지라고.” 불에 타들어가고 남은 담뱃재처럼 시들해 보이는 것이 인생이라지만 그 과정이 없다면 영혼이란 무슨 가치를 지닐 수 있겠는가. 별로 다를 것 없어 보이는 일상은 사실 무수한 변화들 속에 그 표면을 유지하고 있다.


   매일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정확히 단 하나의 풍경 사진을 찍는 오기의 모습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은 작은 일상의 영역에서도 무수한 변화의 과정이 있다는 점이다. 무관심하게 오기의 앨범을 넘기던 폴이 천천히 살펴보라는 오기의 말에 그 태도를 바꾸는 순간 사진 속에서 폴은 아내를 발견한다. 무의미하게 보이던 사진이 폴에게 다른 차이를 만들며 다가올 때, 우리는 동일하게 보이던 일상이 간절한 의미가 됨을 알아차린다. 항상 같아 보이는 일상이지만 어느 시간과 공간에 자신도 모르는 아내가 존재했었다는 사실 그리고 나를 둘러싼 인지할 수 없었던 무수한 시간의 얽힘이 타자를 통해서 발견된다. 인생을 무엇이라고 잘라서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인생이란 결국 타자를 발견하는 만남의 지속이 아닐까? 그 만남의 과정 속에서 나를 돌아보고 성찰하는 과정 자체가 무수한 이론서들이 말하는 주체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웨인 왕 감독의 <스모크>에서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는 하나의 상징이다. 그것은 어떤 하나의 의미에 고정되지 않는다. 인생의 모호함일 수도 있고, 인물들의 고뇌일 수도 있고, 어떤 이에게는 충동 그 자체일 수도 있다. 담배 이미지가 주는 사유의 과정 자체가 관객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전언일 것이다. 인생이란 향방을 예측할 수 없듯이 영화 속의 담배 연기는 흩어져간다.  


   반면 짐 자무쉬 감독의 영화 <커피와 담배>는 한정된 공간에서 무의미한 대화를 지속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각각 무슨 사연이 있는지 그들이 왜 낡고 한적한 커피숍에서 만나기로 했는지 알 수가 없다. 추측할 단서는 얼간이처럼 말장난을 하고 있는 인물들의 대화를 통해서이다. 치과의사를 만나러 가야 한다. 혹은 엘비스 프레슬리에게 못된 동생이 있다는 등의 알 수 없는 소리만 하는 인물들의 대화가 이어진다. 

   그들의 대화에서는 어떤 목적을 발견할 수가 없다. 다만 그들이 만났고, 대화를 했고, 담배를 피우며, 커피를 마시고 있다는 지독한 사실의 확인이 반복된다. 담배와 커피는 그들 사이의 대화거리가 떨어졌을 때 그 휴지(休止)의 시간을 메우는 구실을 한다. 그것은 말과 말 사이를 잇는 숨표나 혹은 구두점 같은 것이다. 마치 그들은 사람을 만나면 무엇인가 말을 해야 한다는 강박 속에 놓여있는 것만 같다. 담배와 커피는 그 강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잠깐의 틈을 만드는 구실을 한다. 


   영화 속에서 만남과 대화의 과정이 무수하게 대상을 바꿔가며 반복된다. 계속 같은 장면들이 반복될수록 그들의 대화가 무의미해진다. 이때 발생하는 어떤 지루함의 감정들 그리고 속내를 털어놓지 않는 인물들의 방향성을 잃은 무의미한 말의 연쇄가 영화의 내용을 대체한다. 쉽게 말하면, 형식의 연쇄가 곧 내용이라고 할까? 난 이 영화를 짐 자무쉬 감독의 진지한 농담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것이 진지한 이유는 영화 속에서 내용이 사라지고 인물들의 만남 모두를 형식적 관계들로 환원한다는 점 때문이고, 그것이 농담인 것은 그들의 대화가 서로 각자의 말만 하고 답하는 과정에 불과하다고 과장하기 때문이다. 


   어떤 점에서 이 영화는 우리들에게 아이러니한 감정을 준다. 영화 <커피와 담배> 속의 세계는 기다림과 목적을 잃은 만남으로 가득하다. 예컨대 영화의 제1막에서 치과에 가기 싫은 한 남자가 커피숍에서 만난 사람에게 대신 치과에 가달라고 부탁을 한다. 그런데 무료한 일상에 지쳐보이던 부탁받은 남자는 치과 주소까지 받아들고 ‘무엇인가 할 일이 생겼다’는 듯이 기쁜 표정으로 고맙다는 말을 남기며 커피숍을 나선다. 그러자 치과에 대신 가달라고 부탁했던 남자는 무엇인가 빼앗겼다는 표정으로 앉아서 뒤돌아보기만 한다. 말도 되지 않는 부탁을 하는 사람이나, 그 부탁을 오히려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나 일상이 지루해 답답하고 미칠 지경이다. 


      


    영화는 삶의 무목적성에 지친 사람들의 무료한 일상과 그 속에서 동상이몽(同床異夢)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감독의 태도는 마치 일상의 삶을 소극으로 보는 것 같다. 이런 맥락에서 웨인 왕 감독이 <스모크>에서 일상을 대하는 태도와는 대비된다. 웨인 왕 감독에게 일상의 삶이란 평범해 보이지만 우리가 인지할 수 없는 시간의 운동이 복잡하게 얽히며 지속되는 것이라면, 짐 자무쉬 감독에게 일상이란 서로 다르게 보이지만 동일한 것의 무수한 반복과 연쇄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은 각자의 세계에 빠져서 무의미한 말들을 주고받으며, 커피와 담배를 벗으로 삼아 자위하고 있지 않은가. 


   벌써 두 편의 영화는 오랜 시간이 지난 작품들이다. 하지만 현실의 일상적 삶 속에서 감춰진 잠재적 역동성을 어떻게 발견하느냐, 그리고 무의미한 삶의 반복되는 연쇄를 어떻게 단절할 것인가라는 물음은 결코 가벼워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일상의 삶을 바라보는 두 가지 양태에 불과하다. 물론 그 경계 사이에서 다양한 물음과 답이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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