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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우일 May 21. 2021

한국영화와 재난의 상상력

- 2000년대 한국 영화에 나타나는 재난의 서사들

  1. 포스트 팬데믹 사회와 파국의 정치       


  2020년 우리는 포스트 팬데믹(pendemic) 사회를 맞이하였습니다. 전염병과 감염병이 범지구적으로 유행하는 팬데믹 현상은 타인에 대한 공포와 혐오의 가능성을 형성하며 우리의 일상을 침투하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선진국으로 알려진 미국의 경우 2020년 현재 코로나19(COVID-19) 확진자만 540만 명이며 사망자의 경우 34만 명을 돌파했습니다. 그리고 유럽의 다른 국가들은 시민들의 자유로운 이동을 통제하거나 국경을 폐쇄함으로써 코로나19가 다시 국외에서 국내로 유입되는 경우를 차단하고자 합니다. 


  중국 무한에서 발병해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코로나19는 의도하지 않게 각각 국가들의 은폐되었던 진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코로나19의 확산을 막기 위해 경찰력을 동원해 시민들의 이동을 제한하고 무분별한 폭력을 행사해 통제하는 제3계 국가는 물론 시민들의 건강을 위한 보건복지시스템이 부재함으로써 코로나19에 대한 대응에 수동적인 자세로 임하고 있는 미국의 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지닌 심각한 결함이 전 세계의 뉴스 채널을 통해 알려지고 있습니다. 


  즉 코로나19로 인해 발생한 포스트 팬데믹 현상은 전 세계적으로 무수한 사상자들을 발생시키고 있지만 동시에 세계인들에게 자신의 삶을 다시 돌아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지금 당신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의 문제점들을 돌아보고 재인식하라고 말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하나의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 인류가 발전시켜온 문명의 방식이 올바른 방향이 맞는지 그리고 개인들을 규정하고 있는 사회적 제도들이 과연 올바르게 작동하고 있는지 질문해야 합니다. 이러한 사유의 출발할 때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파국(catastrophe)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파국은 위험사회가 만들어낸 재난이 일상화된 사회의 특징을 드러내는 용어입니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일상적 삶의 위기들로 인해 몰락에 처한 인간의 문명을 징후로 드러내는 용어로서 파국은 지금 감염병의 위기에 처한 인류의 상황을 명료하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물론 얼마간 시간이 흐른 이후에 코로나19에 대응하는 백신이 개발될 것이지만 지금과 같은 팬데믹 사례들이 반복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파국이 선사한 부정적 현실을 통해 지금 현재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사회적 현실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하고 성찰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코로나19와 같은 재난들이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았는지 생각해봅시다. 사실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인식하지 못했지만 얼마 전까지 재난은 국지(局地)적으로 일어나거나 일상적 삶의 현실과 무관한 사건들로 존재했습니다. 재난이란 TV를 통해 생중계되는 낯선 구경거리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다시 시뮬라시옹(Simulation)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뮬라시옹은 원본과 가상 사이의 구분이 사라짐으로써 가상적인 것이 더 현실적으로 경험되거나 반대로 현실적인 것이 가상적인 것으로 경험되는 현상을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예컨대 TV 채널을 통해 실제로 벌어지고 국가 간의 전쟁 상황이 각각의 가정으로 생중계되고 마치 해외에서 벌어진 전쟁이 흥미로운 가상의 이미지로 대체되는 현상과 같은 것입니다. 즉 전쟁으로 인한 죽음과 폐허의 현장은 사라지고 전쟁이란 각각의 가정에 가상의 FPS 게임처럼 이미지화되어 전달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일상적 재난은 지루한 농담처럼 나와 무관한 것으로 경험되어왔습니다. 


  그러나 포스트 팬데믹 현상은 과거의 재난과 다르게 경험되고 있습니다. 나와 무관하게만 보였던 재난의 경험이 주체의 일상적 경험을 무섭게 침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항상 착용하고 다녀야 하는 마스크는 재난의 일상화를 증명하는 경험적 상징입니다. 포스트 펜데믹 현상은 전 세계와 한국 사회의 동시성을 인식하게 했으며 국지적이고 가상적으로 경험된 파국의 경험이 주체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음을 알려주었습니다. 


  이제 우리 세계의 종말이라는 화두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세계의 종말이라는 이미지는 가깝게 고대의 성경뿐만 아니라 북유럽의 신화에서도 무수하게 등장하는 이미지입니다. 성경의 종말이 주로 신과 약속된 구원의 실현을 의미한다면 북유럽 신화 속에서 종말은 우주의 끝 그리고 시간의 끝맺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 경우 똑같이 세계의 종말이라는 파국을 상상하고 있으나 성경은 현실 속에서 충족되지 못한 초월적인 이상향에 대한 인간적 욕망을 드러내고 있다면 북유럽 신화는 세계의 종말과 죽음에 대한 인정과 수용의 태도가 토대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세계의 종말로 상징되는 파국을 상상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은 다양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근처에 영화관을 방문하면 세계의 종말에 맞서 지구를 구원하기 위해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영웅들이 출현하고 있습니다. 세계의 종말과 구원이라는 이미지는 사실 우리의 일상의 미디어에서 속출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연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미디어 속에 이미지화되어 있는 재난과 파국의 경험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면서 현실에 없는 것을 욕망하거나 초월하고자 상상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영화 속에 나타나는 재난의 경험 혹은 파국의 이미지들은 일종의 알레고리로 작용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알레고리는 문학 작품을 포함해 다양한 작품들에서 사용되는 기법이자 사유의 방식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대상에 대한 의도를 비틀어 다르게 말하기 함으로써 작품 속에 나타난 외적 의미와 내적 의미를 이중화해 표현하는 기법입니다. 알레고리 기법은 의도적으로 독자가 텍스트를 재사유화하도록 유도함으로써 텍스트의 암시적 의미를 비판적으로 읽어내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글은 이러한 알레고리 기법의 관점에서 다수 재난 영화들에 나타나는 정치성을 분석하고자 합니다. 재난 영화들은 일차적으로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사회적 재난으로 인해 발생한 사회적 위험에 대해 경고하고 있으나, 이차적으로 재난 사건으로 인해 우리가 일상에서 망각하고 있었던 요소들을 소환하기도 합니다. 


  예컨대 많은 재난 영화들은 가족애, 사랑, 이기심, 계급, 민족, 타자 등등 무수히 많은 것들을 이야기의 주제로 다루고 있습니다. 극단적인 상황은 인간 본성의 실체를 상대적으로 왜곡 없이 드러내기 때문에 생존을 향한 인물들의 행위는 비교적 작품의 명확한 의도를 보여줍니다. 여기서 모든 재난 영화들을 다룰 수 없으나 2000년대 이후 몇몇 재난 영화들을 중심으로 몇 가지 주제들을 쟁점화해 논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영화 속의 공간을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하고자 합니다. 공간은 재난 영화 속에서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입니다. 영화에서 공간은 상징적으로 작용합니다. 폐쇄된 공간인가 아니면 열린 공간인가 혹은 공간을 가르는 경계가 무엇인가에 따라 그 작품이 의미하는 상징적인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재난 영화에 나타난 공간은 인물들의 행위를 규정하거나 제약하고 그들의 행위가 지닌 의미를 다양하게 해석하도록 합니다. 그렇기에 공간을 중심으로 재난 영화들을 살펴보는 것은 작품이 다루는 주제를 파악하고 그것들의 정치적 맥락을 살펴보는 데에 유용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 혁명의 실패 혹은 가능성      


  제2장에서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 (2013)와 연상호 감독의 <부산행> (2016)을 대상으로 분석을 진행하고자 합니다. 이 장에서 우선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기차라는 공간이 지니는 의미입니다. 일반적으로 한국 근대 문학에서 기차란 근대성을 상징하는 사물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근대란 무엇이라고 한마디로 규정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17세기 서구에서 증기기관이 발명되고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 인간의 물질문명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시기를 뜻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중기기관을 엔진으로 삼고 대륙을 횡단하는 기차는 인류의 근대 문명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기차가 근대성의 상징임을 고려한다면 영화 <설국열차>와 <부산행> 두 작품에서 기차라는 폐쇄된 공간을 중심으로 사건이 벌어지는 것은 우연이라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영화 <설국열차>나 <부산행>에서 기차라는 공간은 근대 물질문명 사회에 대한 축도(縮圖)이며 그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지금과 같이 고도화된 근대 사회에 대한 알레고리로 작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작품은 모두 근대 문명 사회가 지니는 비인간성과 폭력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특히 영화 <설국열차>의 경우 한국 사회뿐만이 아니라 보편적인 근대 사회의 구조 전체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합시다.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의 경우 기상이변이라는 재난으로 인해 인류는 빙하기를 맞이합니다. 그로 인해 세계는 폐허가 되었습니다. 오로지 희망이 있다면 설국을 횡단하는 거대한 기차뿐입니다. 그 기차는 계급에 따라 꼬리 칸부터 첫째 칸까지 구분되어 있으며 각각의 기차칸을 이동할수록 고도화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커티스 일행은 불평등한 기차 안의 세계에 저항하기 위해 꼬리칸에서 반란을 일으켜 맨 앞쪽칸을 향합니다. 그런데 맨 앞쪽칸에 도달했을 때 커티스는 설국열차라는 열차 안의 세상은 고도로 관리되고 있었으며 그들의 혁명도 열차 내부의 인원을 조절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 부분은 이 작품에서 굉장히 중요한 통찰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화 <설국열차>는 후기의 미셸 푸코가 언급한 바 있는 근대 물질문명의 발전이 고도화될수록 인간의 생명을 관리하는 고도화된 미시 권력 사회가 구성될 것이라는 전망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성의 정권에 반기를 드는 혁명도 인구의 무분별한 증식을 관리하기 위한 사회적 장치로 작용한다는 통찰은 인간의 문명에 어떠한 초월이나 변화의 잠재성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세계 내부는 변화가 불가능한 디스토피아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커티스 일행은 결국 설국열차를 폭파하고 기차 밖으로 나가는 것을 선택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은유이겠지요. 열차의 안과 밖의 경계에 대한 구분은 인간 문명의 안과 밖에 대한 은유로 볼 수 있습니다. 설국열차 내부에서의 혁명은 열차 안의 무엇도 해결하지 못하지만 열차를 버리고 밖으로 나가는 것은 적어도 새로운 사회에 대한 잠재적 가능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상징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 <설국열차>는 기상이변이라는 재난을 배경으로 가상의 열차를 통해 근대 물질문명 사회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과감히 열차를 폭파함으로써 근대 사회를 부정하고 그 외부에서 새로운 사회의 가능성을 찾자고 관객들에게 제안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은 봉준호 감독이 영화 <설국열차>를 통해 제안하고 있는 정치적인 비전일 것입니다. 하지만 영화 <설국열차>가 놓치고 있는 부분은 근대 사회에 외부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외부란 일종의 가상이거나 초월적인 비전에 불과합니다. 외부가 아니라 그 내부에서 우리는 사회적 배치들을 다시 재배치하는 방법을 사유할 때 사회는 점진적으로 나아질 수 있습니다. 근대 사회를 부정하고 해체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것은 현실 사회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제거하고 초월적 가상을 생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연상호 감독의 <부산행>은 근대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비인간성과 이기주의를 비판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알 수 없는 바이러스가 빠르게 한반도에 퍼지면서 사람들이 좀비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실 영화 속에서 좀비는 일반적으로 한 사회 내부의 타자를 표현하는 환유라고 이해됩니다. 사회에서 소외된 타자들이나 이방인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소재로 쓰이는 것입니다. 좀비라는 타자를 어떻게 바라보고 그들과 관계를 맺을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담은 다양한 할리우드 영화들에서 제작 발표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요즘 좀비라는 대상은 자본주의 사회에 얽매여 있는 일상적 주체의 상황을 표현하는 사회학적 의미로도 조명받고 있습니다. 자신의 영혼을 잃어버린 상태로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의문을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한 주체의 상태를 표현한다는 것입니다. 행위를 하지만 성찰적 능력을 상실한 주체성의 환유로서 좀비를 의미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한국 영화나 혹은 미디어 환경에서 좀비물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우연이라고 생각하기 힘듭니다. 작품마다 좀비라는 대상을 의미화하는 방식은 다를 수 있으나 미디어 시장을 둘러싼 환경적 요인들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돌아와 영화 <부산행>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영화는 애초에 시작부터 이 작품의 전개 방향이 무엇인지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좀비들에 쫓겨 피신하던 사람들이 몸을 실은 부산행 기차에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뒤섞여 있습니다. 그들은 기차 안에서 생존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열차 안에서 좀비들과 불편한 대치 상태에 처한 사람들의 마음에는 생존에 대한 강박과 이기심이 깃들기 시작합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 석우가 몸이 불편한 할머니에게 자신의 자리를 양보하는 수완에게 남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말라고 그러면 위험해질 것이라고 경고하는 장면은 사람들의 내면을 직설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영화 <부산행>은 전체적으로 직유의 방식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어떤 대상에 빗대어 우회적으로 말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인간의 비윤리성을 관객들이 목격하도록 구성하는 것입니다. 좀비들의 위협 때문에 제한된 공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반드시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하고 저마다 승객들은 다른 사람들을 희생물로 던져주면서 생존을 위한 사투를 벌입니다. 이미 많은 평론가들에 의해 지적된 바 있지만 영화 속 닫힌 문의 이미지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장벽 그리고 타자에 대한 불신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다. 좀비들을 피해 어렵게 안전한 구역에 도착했지만 먼저 피신한 사람들이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서 다시 위기에 처한 사람들의 모습은 인간의 비윤리성이 지닌 폭력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마치 영화 <부산행>은 생존이 희박한 위기 상황 속에서 인간의 연대는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좀비들이 득실거리는 부산행 기차 안에서 나라는 주체는 영화 속의 비윤리적인 인간들과 다를 수 있을지 누구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이 영화는 이성적으로 본다면 인간의 비윤리성과 개인의 생존이 우선인 한국 사회에 대한 비관적 성찰을 담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영화가 끝나지 않습니다. 부산행 기차가 전복되고 우여곡절 끝에 살아남은 수완과 성경은 자신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사람들의 희생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완과 성경이 나란히 어두운 터널을 통과해 부산의 경계에 도착하는 장면은 비관적 이성을 극복하는 의지의 낙관을 드러냅니다. 살아남은 자들의 연대에 대한 희망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처럼 영화 <설국열차>와 <부산행>은 기차라는 폐쇄된 공간을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환유로 활용함으로써 인간의 본성과 사회적 삶의 억압과 부조리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기성의 사회적 제도와 운영방식을 벗어난 새로운 사회의 가능성을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이 기성의 사회를 해체하는 혁명에 대한 옹호 혹은 비관의 이성을 극복하는 낙관적인 연대의 가능성을 시사하던 중요한 것은 우리의 주체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는 능력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앞의 작품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3. 위험사회의 도래와 역전된 일상     

 

  제3장에서는 도시 공간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진행하고자 합니다. 한국 사회는 1960-70년대 산업화로 인해 많은 공간들이 도시화 되었습니다. 특히 서울의 경우 한반도 인구의 절반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도시화는 생활의 편의를 제공하지만 더불어 생각지도 못했던 재난의 위험도 증가시키고 있습니다. 교통사고는 물론 도심의 일상에서 각종 사고가 발생합니다. 최근에는 테러의 위협과 방화로 인한 참사 등등의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으며 좁은 도시 면적에 비해 많은 수의 인구가 밀집해 있는 대도시는 감염병과 유독물질의 유출에 취약한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영화 <더 테러 라이브> (2013)와 <액시트> (2019)는 이렇듯 재난에 취약한 대도시 환경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영화 <더 테러 라이브>는 테러의 위협을 생중계한다는 독특한 설정의 작품이며 한 개인의 억울함을 풀어주지 못해 다수 시민들을 희생양으로 삼는 국가의 무능력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또한 영화 <액시트>는 화학적 테러로 인해 발생한 재난 상황에서 사회에서 낙오한 백수 청년이 가족들을 구함으로써 다시 기성의 사회에서 복귀한다는 내용을 다루고 있는 작품입니다. 


  먼저 영화 <더 테러 라이브>를 살펴보도록 합시다. 이 작품은 사회의 부조리로 폭탄 테러를 준비한 테러범의 협박을 생방송하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처음에 방송사에서 생중계하고 싶었던 것은 폭탄 테러범의 협박과 테러가 주는 긴장감이었지만 갈수록 영화가 생중계하는 것은 시민들의 안전과 생명이 달렸음에도 그것을 해결하지 못하는 국가의 무능입니다. 즉 영화가 사실 생중계하고 싶었던 것은 21억의 보상금과 대통령의 사과라는 어렵지 않은 요구에도 응하지 않는 정치인들의 오만입니다. 다수 시민이 위험에 처했음에도 테러를 막기보다 오히려 자신들의 잘못을 감추고 책임을 지기 싫어서 방관하는 정치인들의 모습은 궁극적으로 한국 사회의 부조리와 정치적 무능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대중예술에 나타나는 정치인들의 무능력은 현대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정치적 버전이라고 지적할 수 있습니다. 슬라보예 지젝에 따르면 현대 자유민주주의의 최대 관심사는 근본적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며,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무마하는 일이라고 비판합니다. 그 이유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란 허위일 뿐이라고 소문이 나는 바람에 현대 사회의 주체는 진정한 삶에 대한 고민 대신 모두가 그저 그런 삶을 살자고 택했기 때문입니다. 그저 나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자자손손 무사하게 살아가는 것이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정치적 이념이라는 사실을 조롱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정치적 이념인 무사안일주의와 그저 그런 삶의 추구는 정치적 영역에서 어떠한 책임도 지기 싫어하는 정치인들의 무능력으로 극단화되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작품은 도입부에 테러범의 협박을 일종의 유희와 볼거리로 인지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마포대교에 실제 폭탄이 터지고서야 유희는 공포로 전환되면서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던 일상은 균열이 발생합니다. 영화 속의 폭탄은 단순히 도시가 위험에 취약하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폭탄을 쥐고 자폭하는 테러범을 만드는 사회의 부조리를 겨냥하고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소외된 타자가 자신의 삶을 비관하고 사회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기 위해 폭탄을 쥐고 테러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사회의 부조리를 향한 것입니다. 


  작품의 결말에 주인공인 윤영화가 테러범이 터트리고자 했으나 실패한 폭탄 기폭 장치 버튼을 누르고 죽음을 감수한 것은 이 작품이 비윤리적인 세상에 분노한 개인의 윤리적 비전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의 죽음을 감수하고서라도 부조리한 세상을 폭파하는 것이 윤리적이며 새로운 사회적 구성의 가능성을 여는 것이라고 영화는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현대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주체들은 진정한 삶에 대한 고민보다 그저 그런 삶에 대한 추구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윤영화가 폭탄의 기폭 장치 버튼을 누르기로 선택한 것은 기성의 그저 그런 삶 대신 사건을 주체로서 마주하는 진정한 삶에 대한 추구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의 선택은 개인의 윤리적 결단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컨대 영화 <매트릭스> (1999)를 기억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파란 약과 빨간 약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파란 약을 먹으면 기성의 현실에 취해서 고민없이 살아갈 수 있으나, 빨간 약을 선택하면 우리는 삶의 감춰진 진실을 마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화 속에서는 그 진실이란 인간은 매트릭스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소모되는 건전지라는 사실입니다. 작품의 주인공 레오처럼 우리는 남들이 모르는 무엇인가를 알아차리는 순간 사건의 주체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윤리적 선택을 해야 합니다. 사건을 외면할 것인가, 아니면 사건의 주체가 될 것인가. 이러한 상황을 단순히 영화적 이미지일 뿐이라고 바라볼 수 없습니다. 조금만 현실에 눈을 돌린다면 무수한 일상의 선택이 우리 앞에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영화 <액시트> (2019)에 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작품은 위험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위험이라는 개념을 정의하기 쉽지 않지만 주로 손실을 어떻게 규정하고 평가해야 하는지와 관련되어 있으며 불확실성의 요소 혹은 확률 요소를 어떻게 설명하며 그 요소의 비중을 어떻게 강조하는지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즉 위험이라는 개념은 근대가 시작되면서 과학적인 세계관이 세상을 지배하면서 만들어진 확률적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근대적 사고방식은 위험이란 관리가 가능하고 선택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냅니다. 하지만 사회가 고도화되고 복잡화된 사회의 현실에서 위험을 완전히 통제하고 관리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이 작품은 도심에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화학 폭탄 테러가 발생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유독물질이 대기의 운동에 따라 순식간에 퍼져나가면서 공기를 흡입한 사람들이 순식간에 죽임을 당하는 참사가 발생합니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 주인공 용남은 자신을 희생해 위기에 처한 가족들의 목숨을 구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용남은 화학테러라는 재난이 일어나기 전까지 가족들 사이에서 인정받지 못하던 존재였습니다. 명문대를 졸업했지만 몇 년째 취업하지 못한 용남은 가정에서 눈칫밥을 먹고 사회에서 낙오자 취급을 당합니다. 


  이 작품이 기성의 재난 영화들과 다른 지점은 참사의 비극이 가족애나 안전 사회에 대한 욕망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대두되고 있는 청년 실업이라는 사회적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입니다. 용남에게는 기성의 사회적 상황의 관점에서 보자면 청년 백수에 사회적 낙오자라는 낙인이 찍혀있습니다. 마치 취업하지 못한 용남의 상황이 죄처럼 다루어집니다. 그러나 재난이 발생한 시점부터 의미의 역전이 발생합니다. 무능력하게 보였던 용남의 재주가 가족의 생명을 지키는 힘이 됩니다. 사회적 낙오자로 취급받던 용남이 위기 상황 속에서 오히려 가족을 구하는 영웅이 됩니다. 재난이라는 비일상적 상황이 용남의 용기와 재능을 뽐내는 경연장이 되는 것입니다. 


  영화 <액시트>의 기발한 점은 일상적 도시 공간의 구조가 테러로 인한 위기상황에서 탈출하려는 두 청년의 생존을 방해하는 장애물로 다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도시 공간이 거주하는 장소가 아니라 자신들의 안전과 생명을 위해 탈출해야 하는 것으로 역전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도시 공간은 시민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위험한 공간으로 뒤바뀝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우리는 위험이란 확률적으로 통제할 수 있고 관리가 가능한 것처럼 생각하고 바라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에서 일어나는 재난 상황은 확률적 사고방식이 허구의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작품에서 다루어지는 도시 공간은 갑자기 위험 공간으로 그리고 사회적 재난에 취약한 구조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재난이 발생하기 이전 펼쳐졌던 서사에서 용남에게 가족들이 요구하는 것은 취직과 결혼입니다. 취직과 결혼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자연스럽게 도시 공간에 정주하기 위한 과정입니다. 하지만 정주를 요구하는 도시 공간은 오히려 정주가 불가능한 위험 공간으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영화는 테러로 인해 오염된 도시 공간으로부터 용남이 탈출하는 행위를 통해 정주라는 사회적 요구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용남은 기성의 도시 공간을 탈출해 가족들의 인정과 사랑을 획득합니다. 


  액시트(Exit)라는 영화의 제목처럼 이 작품은 일차적으로 테러의 위협에서의 탈출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도시의 물질 공간으로 드러나 있는 기성 사회의 규칙들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화는 기성세대의 관점과 잣대로 판단되고 있는 청년세대의 대표로서 용남이라는 인물을 등장시키고, 그가 재난 상황에서 기지를 발휘해 가족들의 생명을 구하는 모습을 통해 기성세대의 사회적 관점이란 제도화된 관점에 불과하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영화 <액시트>는 용남이 재난 상황을 극복함으로써 다시 일상의 사회적 삶에 복귀한다는 점에서 작품이 지닌 도발적인 메시지가 반감되고 있습니다. 용남은 다시 어머니의 품의 돌아갔으며 후배 의주와 사랑을 통해 일상적 삶에 복귀할 것입니다. 이 작품은 재난의 위기 상황을 극복하는 용남의 모습을 통해 마치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보여주고 있으나 이것은 환상일 뿐입니다. 


  이 작품의 통속적인 의미는 기성세대의 관점에 무능력해 보였던 평범한 백수 청년이 위기 상황을 극복함으로써 자신의 자존감을 회복하고 다시 사회에 복귀한다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 작품에서 재난 그 자체가 용남이라는 평범한 청년을 다시 기성 제도 속에 편입시키기 위한 주요 배경으로 작용할 뿐 그것이 용남이라는 인물이 자신의 정체성을 변모시키는 필연적인 환경적 요소로 기능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상에 복귀한 용남에게 여전히 가족들은 취업을 요구할 것이고 그는 자신을 억압하던 사회적 제도에 속박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일시적인 재난 상황의 극복만으로는 청년세대가 기성세대의 관점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4. 은유로서의 질병 그리고 주체와 타자의 경계 가르기       


  영화 <연가시> (2012)와 <감기> (2013)는 현재 포스트 팬데믹 사회의 일상을 예견하고 있는 것만 같은 작품입니다. 두 작품 모두 전염병으로 인해 사람들이 갑작스럽게 죽어가고 그것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주인공 일행의 모험을 담고 있습니다. 특히 영화 <연가시>는 실제 곤충류에 기생해 숙주로 삼아 자신의 개체를 번식시키는 연가시라는 존재의 특성을 소재로 이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들은 질병이라는 은유가 어떻게 나와 타자를 구분하고 사회적 안전에의 요구에 따라 타자들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질병이라는 은유는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을 환자 그 자체로 보지 못하게 하고 마치 사회 내부를 어지럽히는 이질적인 존재로 인식하도록 합니다. 사회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질병에 걸린 환자들을 무책임하다고 낙인찍거나 혹은 제거해야 할 존재로 바라보도록 합니다. 


  실제 과거 전염병이 발생했을 때 일어났던 사건들을 통해 우리는 현실에서 어떻게 차별이 발생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팬데믹과 관련해 가장 유명한 사건은 흑사병일 것입니다. 흑사병은 배설물을 강이나 길가에 버리면서 생성된 비위생적인 환경 때문에 발병한 것인데 흑사병이 유럽 전역으로 퍼지자 유럽인들 사이에 유대인이 우물에 독을 풀어서 발병했다는 소문이 퍼지게 됩니다. 그로 인해 유럽인들은 유대인을 혐오하게 되었고 급기야 학살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질병의 은유와 사회적 타자에 대한 혐오의 낙인찍기는 역사적으로 지속되어 왔습니다. 


  예컨대 20세기 당시 암에 걸린 환자는 신의 징벌을 받은 것으로 여겨지거나, 20세기 후반 에이즈는 성적 소수자들의 성관계가 일으키는 퇴폐적 향락으로 인해 퍼져나가는 질병인 것처럼 다루어져 왔습니다. 이처럼 각종 질병에 걸린 환자를 향한 낙인은 코로나19로 인해 맞이한 포스트 팬데믹 사회에도 유효합니다. 현재도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전파를 성적 소수자의 탓으로 돌리거나 혹은 코로나19에 전염된 환자들을 무책임한 전파자로 낙인찍는 사례들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질병의 은유에 대한 대중들의 은폐된 무의식을 영화 <연가시>와 <감기>는 극단적인 전염성 질병에 대응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통해 수면으로 올려놓고 있습니다. 두 작품은 은유로서의 질병에서 우리가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지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영화는 <연가시>의 내러티브는 재혁이 자신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평소 재혁은 가족에 대해 특별한 애정이 없었고 자기 삶의 짐으로만 여깁니다, 하지만 어느 날 변종 연가시로 인한 감염병이 확산되고 대통령이 비상사태를 선언하자 비로소 재혁은 가족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휩싸입니다. 변종 연가시를 제거할 수 있다는 치료제를 구하고자 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맙니다. 그러다가 재혁은 굳이 구할 수 없는 치료제를 구하러 다닐 것이 아니라 제약회사에서 배운 화학식에 따라 스스로 만들면 된다는 생각으로 치료제를 개발하면서 변종 연가시로 인한 전염병 사태는 해결됩니다. 


  이 작품은 재혁이 가장으로서 자신의 가족을 지켜냄으로써 자신의 사회적 역할을 재인식하게 되는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즉 가정이라는 공간을 상실할 뻔한 가장 재혁이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의 가정을 지켜내는 것에 성공하는 이야기입니다. 재혁의 개인적인 서사를 따라가면 영화 <연가시>는 상실되었던 가장의 권위가 재난의 위기를 극복함으로써 회복되는 것으로 결말지어지고 있습니다. 


  또한 변종 연가시는 조아제약이라는 회사가 바이러스를 퍼뜨리고 치료제를 빌미로 회사를 국가에 팔아넘김으로써 수익을 창출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변종 연가시는 한국 사회를 좀먹고 있는 무분별한 자본의 욕망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자본의 욕망은 수많은 사람을 자살에 이르게 하고 자칫 국가에 막대한 피해를 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본의 욕망에서 벗어나 재혁이 변종 연가시를 제거할 수 있는 화학식을 대중에게 공개함으로써 자신의 가족과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작품에서 재난이란 소재와 관련해 주목할 점은 질병의 공포를 마주하는 시민들의 태도에 대한 묘사라고 생각합니다. 변종 연가시를 제거할 수 있는 치료제를 향한 사람들의 생존본능은 극단적인 질병의 공포로 인해 다른 사람들을 향한 폭력으로 전환되거나 자기 가족의 안전만을 우선하도록 합니다. 즉 주체와 타자를 구분하고 서로를 향한 적대가 생겨난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이성을 잃지 않고 자기 개인의 윤리를 지키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해 관객들은 성찰하게 됩니다. 


  다음으로 영화 <감기>는 앞의 작품 <연가시>에 비해 더 상황이 극단적입니다. 걸리면 100% 죽음에 이르는 전염병을 막기 위해 정부가 감염자 전원을 생매몰하는 방식을 택하면서 갈등이 벌어집니다. 이 작품에서 국가는 개인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치료제 개발과 그들의 생명을 연장 방안을 고민하는 대신 분당 이외의 지역의 안전을 위해 감염자 전원을 몰살시키기로 하면서 분당 지역 주민들의 감염병 공포가 확산되고 혼란한 상황이 이어집니다. 


  전염병에 걸린 환자들을 생매몰하기로 결정한 국가의 선택은 앞서 언급했던 질병을 사회의 무질서를 일으키는 대상으로 바라보는 폭력적인 관점을 드러냅니다. 전염병에 걸린 환자들을 사회를 위협하는 적대적 존재로 규정하고 그들을 집단적으로 학살하는 데에 어떠한 윤리적 죄의식을 찾을 수 없는 인간들의 모습은 어떠한 질병보다 무서운 병으로 보입니다. 생매몰되는 환자들을 보고 아직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지구의 문제 제기에 “가만히 나눠도 어차피 죽어.”라고 대답하는 의료진의 대답은 서늘하기만 합니다. 그의 대답에는 어떠한 윤리적 죄책감도 찾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에서 환자들을 생매몰하는 장면은 마치 돼지와 소가 감염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구덩이에 산채로 매몰하는 방식과 같습니다. 즉 일상 속에서 인간들이 전염병에 걸린 동물들에게 하는 방식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 전염병에 걸려 죽지 않고 살아있음에도 구덩이에 매몰되는 인간의 육신은 마치 버려지는 고깃덩어리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즉 인간과 동물들의 차이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입니다. 물론 영화는 인간의 비윤리성을 고발하기 위해 고안된 장면일 겁니다. 


  영화는 도시의 경계를 전염 공간과 비전염 공간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분당이라는 공간은 과거 나치가 유대인을 모아서 학살하기 위해 사용했던 체코의 테레지엔슈타트 수용소와 같습니다. 분당의 시민들은 무책임한 국가의 폭력에 죽을 위기에 처하자 분당과 다른 도시들의 경계인 안전벨트를 넘게 되고 군대의 무차별 총격에 죽임을 당합니다. 비록 이러한 무차별 총격을 지휘한 것은 대통령의 명령을 무시한 국무총리와 한국의 군사지휘권을 가진 미국의 결정이었지만 국가에 의해 전염병에 걸린 시민들은 버림받습니다. 


  이 장면은 미국과 한국의 불균형적 관계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으며 한국의 정치 상황을 비꼬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영화 <감기>는 극단적인 전염병을 소재로 하는 재난 영화이지만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인 것 같습니다. 시민들의 안전과 생명을 위해 국가가 해야 하는 역할에 관해 묻는 것입니다. 미국과 남한의 부패한 정치세력이 편의적으로 잘못된 정치적 결정으로 내림으로써 다수 시민들이 죽음에 처하는 장면들을 통해 미국에 의존적인 한국 정치의 은폐된 민낯을 인식하게 됩니다. 


  우리는 영화 <연가시>와 <감기>를 통해 질병에 걸린 환자들을 바라보는 무의식적인 낙인찍기가 얼마나 폭력적이고 본질을 왜곡하는지에 대해 알 수 있었습니다. 더불어 두 작품은 재난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을 통해 한국 사회의 감춰둔 민낯을 보여줍니다. 생명윤리에 무감각한 자본의 욕망과 미국에 의존적인 한국 정치의 은폐된 진실을 표면화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재난이라는 소재는 한국 영화 속에서 우리 사회의 감춰둔 다양한 정치적 진실을 드러내는 파국의 상상력을 활성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 작품은 심각하게 전개되는 재난 상황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갑작스럽게 휴머니즘적 결론에 이르고 있습니다. 영화 <연가시>에서 재혁은 자신이 알고 있는 제약회사의 화학식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함으로써 연가시에 전염된 시민들을 구원하고, 영화 <감기>의 경우 인해의 딸이 지닌 항체를 통해 분당 지역에 빠르게 퍼졌던 점염병이 치료되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이처럼 감독의 휴머니즘에 기반한 작품의 종결은 일종의 디스토피아적 세계에 대한 봉합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앞의 작품들 속에 나타나는 봉합 방식은 일종의 패턴화된 경우들이라고 할 수 있으며 파국을 맞이한 세계 이후 새로운 세계의 생성 가능성은 축소되고 있습니다.          

  5. 유토피아가 아닌 헤테로토피아로      


  지금까지 우리는 기차 공간, 도시 공간, 경계와 비경계의 공간을 중심으로 몇몇 재난 영화에 나타나는 정치성을 살펴보았습니다. 각각의 재난 영화들은 묵시적인 상상력을 통해 현실의 불균형을 유도하고 이를 통해 그동안 은폐되어 있던 인간의 감춰진 욕망과 기성 정치와 사회 제도의 비합리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파국이라는 묵시론적 상상력은 세계의 바깥을 지향합니다. 주어진 현실의 바깥을 사유함으로써 새로운 정치적 가능성을 관객들이 응시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즉 재난 영화의 정치성은 묵시론적 세계관을 통해 현실이 지닌 부정성의 표출함으로써 현실에 대한 알레고리로 기능하는 데에서 찾아진다. 


  재난 영화가 보여주는 스크린 속의 디스토피아는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세계의 부조리와 불합리를 드러내는 조건으로 기능한다. 우리는 스크린 속의 디스토피아를 목격하며 지금 세계의 바깥을 지향하게 되며 동시에 세계의 바깥은 비현실로서의 유토피아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유토피아는 언제나 현실을 초월한 비현실로만 존재합니다. 재난 영화에는 디스토피아와 유토피아적 세계의 가능성을 스크린이라는 장소에 이중으로 겹쳐놓고 있습니다. 영화 속의 디스토피아 세계는 현실의 부정성을 드러내는 것이고 유토피아적 세계는 언제나 아직 도래하지 않은 잠재적 가능성으로 남겨집니다. 문제는 유토피아란 영원히 도래하지 않는 가상의 이미지라는 것입니다. 


  예컨대 앞서 영화 <설국열차>에서 파괴된 기차 바깥의 설원은 순수한 도래하지 않은 유토피아적 세계에 대한 잠재적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현실에서 중요한 것은 디스토피아적 현실에 대한 좌절 혹은 유토피아적 이상의 도래가 아닙니다. 철학자 미셸 푸코는 현실에 존재하고 있으나 은폐된 비-장소로서 헤테로토피아에 관해 이야기한 바가 있습니다. 헤테로토피아란 유토피아와 달리 기존의 세계의 패턴에 관계하는 일상의 공간에서 벗어나 있으나 사회적으로 용인되고 암묵적으로 합의된 공간을 의미합니다. 즉 유토피아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형이상학적인 세계라면 헤테로토피아는 현실 안에 존재하면서 유토피아적 기능을 수행하는 현실의 유토피아적인 장소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헤테로토피아적 공간이 지니는 혁명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헤테로토피아는 유토피아와 같은 가상이 아니라 현실 속에 암묵적으로 합의된 상태로 존재하는 실재의 세계입니다. 바로 이러한 지점은 유토피아와 헤테로토피아를 구분하는 중요한 차이입니다. 유토피아는 현실 부정의 장소로서 기능하나 구체적 형태를 지니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현실에 존재하는 헤테로토피아는 유토피아적 이상의 구체적인 현실화의 가능성을 의미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재난 영화에 나타나는 디스토피아적 세계를 통해 우리가 인식해야 하는 것은 헤테로토피아적 세계의 창조 가능성입니다. 세계의 바깥이라는 유토피아가 사유의 출발이 아니라 세계 내의 존재로서 주체 자신의 내적 윤리를 현실화는 의지가 사유의 출발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 현실이 과거 누군가 꿈꾸던 공간의 현실화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현실 세계의 변화와 창조 가능성을 긍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유는 여기서 시작합니다.




미주

1) “한자어로 ‘파국(破局)’은 깨어지는 판이라는 뜻이다. 이 한자어가 환기하는 이미지는 마치 지진 같은 것, 평온한 일상의 판에 갑자스레 찾아온 진동과 균열, 이로 인해 더 이상 과거의 삶이 가능하지 않은, 혹은 모두의 절멸로 향하는 전례 없는 위기의 형국이다. …… 마치 ‘혁명(revolution)’이라는 단어가 빙그르르 돌아가면서 뒤집히는 ‘역전(逆轉)’의 모양에서 유래했듯, ‘파국’ 역시 현재의 체제가 완벽히 깨어짐으로써 마련되는 어떤 잠재적인 역전의 계기를 품고 있다. ‘파국’은 끝과 종말을 부르는 미증유(未曾有)의 대참사를 일컫기도 하지만, 동시에 기존의 질서가 갑자스레 전복됨으로써 생겨나는 새로운 시공간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파국’은 언제나 끝이면서 시작인, 절망이면서 희망인, 디스토피아면서 유토피아인, 독이면서 약인 이중성을 가진다.” (문강형준, 『파국의 지형학』, 자음과 모음, 2011, 11면.)     


2) “사뮬라크르는 흉내낼 대상이 없는 이미지이며, 이 원본 없는 이미지가 그 자체로서 현실을 대체하고 현실은 이 이미지에 의해서 지배받게 되므로 오히려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것이다. 가장 쉽게는 우리가 시뮬라크르를 생각할 때, 현대의 전쟁을 생각하면 쉬울 것이다. 미사일 발사는 화면이라는 컴퓨터로 보면서 하지 실제 미사일의 움직임을 육안으로 보면서 하지 않는다. 이때 시뮬라크르인 화면상의 미사일 궤도는 실제 탄의 궤도일 것이며, 나아가 실제 탄이 목표에 맞았는지 맞지 않았는지는 이제 중요치 않게 되어버렸다. 결귝 시뮬라크르는 실제보다 더 실제적인 것이다. …… 시뮬라시옹은 시뮬라크르의 동사적 의미로 <시뮬라크르 하기>이다.” (장 보드리야르, 『시뮬라시옹』, 하태환 옮김, 민음사, 2001, 9-10면, 각주 1번을 참조.)     


3) “알레고리는 표면적으로는 인물과 행위와 배경 등 통사적인 이야기의 요소들을 다 갖추고 있는 이야기인 동시에 그 이야기 배후에 정신적, 도덕적, 또는 역사적 의미가 전개되는 뚜렷한 이중 구조를 가진 작품이다. 따라서 구체적인 심상의 전개와 동시에 추상적 의미의 층이 그 배후에 동반되는 것이 의식되도록 쓰여진 작품이 알레고리이다. 즉 알레고리는 A를 말하면서 B를 말하는 것으로, B의 의미가 작가가 의도하는 글의 목적이 된다.” (홍순애, 「알레고리의 의미와 구조화 방식」, 『한국근대문학과 알레고리』, 제이앤씨, 2009, 31면.     

4) “내가 생명관리정치를 통해 의미하고자 했던 바는 인구로서 구성된 살아있는 사람들의 총체에 고유한 현상들, 즉, 건강, 위생, 출생률, 수명, 인종 등의 현상들을 통해 통치실천에 제기되어온 문제들을 18세기 아래 합리화하고자 시도한 방식이다.” (미셸 푸코,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콜레주드 프랑스 강의 1979-79년』, 심세광 외 옮김, 난장, 2012, 435면.)     


5) 후지타 나오야는 대중예술에 나타나는 좀비의 형상을 사회학적으로 분석하며 사회적 타자들을 좀비화시켜서 표현하는 것이 지닌 정치적 선전의 위험을 지적하고 인정하고 있다. “실제로 존재하는 민족이나 집단을 ‘좀비로 그리는’것은 확실히, ‘죽여도 좋은’, ‘지저분한’, ‘한심한 집단’과 같은 이미지를 그 집단에 부여하는 프로파간다로 기능할 위험이 있습니다.” (후지타 나오야, 『좀비 사회학』, 신정우 옮김, 요다, 2018, 73면.)     

 

6) “영락물(좀비)은 단지 청결하지 않거나 건강하지 않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영락물은 ”정체성, 시스템, 질서를 뒤흔드는 것. 경계와 위치와 법칙들을 무시하는 것, 사이-존재, 모호한 것, 혼하되는 것“이다. 이것은 짐승의 육식성과 인간의 신체, 살아 움직이는 생과 부패하고 무기력한 사의 결합인 좀비의 존재가 가지는 근본적인 특징이다. 경계가 사라진 곳은 불안과 공포를 증폭시키는 장소이지만, 동시에 새로운 창조를 가능하게 하는 장소이다. 그러나 좀비라는 비/존재가 담고 있는 무경계성은 그러한 창조의 계기를 허락하지 않는다. 움직이는 시체로서의 좀비, 뇌가 없는 좀비는 사유의 불가능성을 표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강형준, 앞의 책, 41-42면.)     


7) “지젝은 이데올로기의 허위적인 종언 이후의 ‘그저 그런 삶’을 ‘진정한 삶’과 대비시킨다. ‘그저 그런 삶’은 자신의 삶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소망하는 삶이며, 자신의 기득권이 아무 탈 없이 그대로 자자손손 보존되기를 매주 기도하는 삶이다. 그것의 정치적 버전이 자유민주주의다. 지젝이 보기에 자유 민주주의의 최대 관심사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며,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곧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무마하는 일이다. 그래서 자유민주주의는 무사건의 당이다.” (이현우,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자음과 모음, 2011, 72면.)     


8) “9.11이라는 스펙터클은 자본주의적 상징계에 구멍을 낸 실재의 침입이기도 하다. 그것은 뒤엎어진 판을 다시 정돈하며 그래도 여전히 우리는 현재의 게임을 계속해야 하는지, 현재의 사회적 좌표계를 계속 유지해야 하는지 자문하게 하는 사건이다. 물론 그러한 질문과 대면하는 일은 두렵다. 그것은 마치 폐허가 된 ‘실재의 사막’과 대면하는 일과 같다. 그래서 부정하거나 회피한다. 그럴 때 우리가 주로 동원하는 것이 ‘환상’이다. 공격받은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 대테러전쟁에 나설 수밖에 없다는 믿음이 그러한 환상의 대표적 사례이다. ‘빨간 약(현실)’ 대신에 ‘파란 약(환상)’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현우, 위의 책, 24-25면.)     


9) 송해룡 외, 『위험 사회와 위험 인식 –위험 커뮤니케이션의 갈등 구조』,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14, 39-44면 참조.     


10) 신종락, 「코로나 19와 차별」, 홍덕선 외, 『문학과 예술에서 재난을 말하다』, 산과 글, 2020, 219-220.     


11) “왜 수많은 재난영화나 묵시록은 비인간적이고 무시무시한 재난을 실컷 상상하고 난 다음 마지막에는 고루하고 식상한 휴머니즘을 내세울까. 휴머니즘을 강조하기 위해 재난을 강조하기 위해 재난을 끌어오는 방식은 서사적으로 자명하거나 불가피한 것일까. …… 우리는 우리가 읽는 묵시록 텍스트가 리얼리즘 소설이 아니라 잠재적 ‘꿈 사고’가 명시적인 ‘꿈 내용’으로 응축 · 전치되는 형식화의 과정임을, 즉 이러한 ‘꿈 작업’은 하나의 소망이 서사적 공정(工程)을 통해 어떻게 왜곡되어 충족되는가를 은폐하는 일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복도훈, 「세계의 끝, 끝의 서사 –2000년대 한국 소설에 나타난 재난의 상상력과 그 불만」, 조선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이미지연구소 편, 『폭력 이미지 재난』, 2012, 311-312면.)     


12) 미셸 푸코는 헤테로토피아로서의 공간의 예를 다락방, 목요일 오후 엄마 아빠의 침대, 묘지, 사창가, 휴양촌 등등을 들고 있다. 핵심은 헤테로토피아는 일상의 공간에서 벗어난 것으로 여겨지면서도 현실적 사회에 암묵적으로 합의되어 존재하는 반(反)공간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이 반(反)공간은 존재 그 자체로 현실의 규칙과 제도들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사는 공간에 신화적이고 실제적인 이의제기를 수행하는 이 다른 공간들, 다른 장소들을 대상으로 삼게 될 하나의 과학-나는 분명히 과학(science)이라고 말한다-을 꿈꾼다. 이러한 과학은 유토피아를 연구하지는 않을 것이다. [유토피아라는] 그 이름은 정말로 어떤 장소도 갖지 않는 것을 위해서만 남겨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 과학은 절대로 다른 공간들, 헤토로-토피아들(hetero-topies)을 연구할 것이다. 문제의 그 과학은 필연적으로 ‘헤테로토폴로지(heterotopologies)’라고 불릴 수 있고, 불릴 것이며, 이미 그렇게 불린다.”(미셸 푸코, 『헤테로토피아』, 이상길 옮김, 문학과 지성사, 2014, 14-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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