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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우일 Jun 02. 2021

일상과 아이러니의 미학

-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2019)

  찬실이 함께 참여해 제작 중이던 영화의 감독이 갑자기 술자리에서 사망하면서 그녀는 직장을 잃는다. 덕분에 찬실은 호구지책으로 친한 영화배우 소피의 가사도우미로 취직하고 우연히 소피의 프랑스어 과외 선생 김영을 만난다. 단편영화 감독으로 데뷔했으나 생활고로 인해 프랑스어 과외를 하며 살아가고 있는 김영에게 첫눈에 반한 찬실은 자신의 속마음을 그에게 고백하지만 거절의 대답을 듣는다. 직장과 사랑을 잃고 실의에 빠진 찬실은 내적 방황을 시작하고 무슨 일을 하느냐는 자취방 할머니의 질문에 그녀는 영화를 한다는 대답으로 얼버무린다.


  직장과 사랑 그리고 정체성의 문제 어느 하나도 제대로 답하지 못하고 있는 찬실의 일상은 우리들의 평범한 일상과 많은 부분 닮았다. 우리의 일상도 사회적 층위와 타자와의 관계 그리고 정체성의 문제로부터 자유롭기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영화를 통해 확인하는 것은 찬실이 자신을 둘러싼 구체적인 사회적 조건들로부터 단절되는 과정이다. 찬실은 직장을 잃어버림으로써 일상적인 사회적 관계로부터 배제되었고, 연애가 상징하는 타자와의 관계 맺기도 실패했으며, 지금까지 자신을 규정해왔던 영화계의 PD로서의 예술가적 정체성도 흐릿해진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찬실은 현실의 돌파구를 찾을 수 없다. 세 번의 실패는 찬실이 세계로부터 고립되어 있음을 말해주며 그녀에게 사실상 상징적 죽음을 안겨준다.


  현실의 장벽 앞에서 머뭇거리던 찬실의 의식은 갑자기 환상의 세계로 진입하게 된다. 빨래를 하다가 장국영이라는 속옷차림의 인물을 만나게 되는데 그는 바로 찬실의 무의식을 대변한다. 장국영은 찬실만 볼 수 있으며 그녀가 하숙하고 있는 주인집 할머니에게는 그가 보이지 않는다. 찬실의 환상이 영화 속에서 개입하는 순간은 대체로 찬실이 홀로 공터나 자신의 방에 남겨져 있을 때이다. 장국영은 찬실이 자기 자신을 다시 되돌아보도록 위로하는 역할을 맡고 있으며 그녀가 현실에서 잃어버린 꿈과 희망을 상징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처럼 영화는 우리의 평범한 일상을 사실적으로 다루면서도 찬실의 무의식을 대변하는 장국영과 같은 인물의 개입을 통해 사실적으로 연출되는 일상을 뒤틀고자 시도한다. 이 같은 감독의 의도는 장국영이라는 인물이 찬실이 빨래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등장하거나 하숙집으로 돌아가는 길목에서 찬실을 스쳐가는 방식을 통해 그의 존재가 사실인지 환상인지 불명료하게 연출하는 방식으로 구현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영화 속의 환상은 어떤 인물이 꾸는 꿈이나 현실의 차원을 초월하는 다른 시공간 속에서 다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작품은 찬실의 무의식적 환상이 찬실의 일상 공간에 그대로 침투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더 이상한 것은 찬실의 태도이다. 초반부만 하더라도 장국영의 등장에 놀라움을 표현하던 찬실은 다음 만남부터는 그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라거나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즉 찬실이 장국영이라는 존재를 그대로 감각하며 수용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처럼 김초희 감독은 사살과 환상의 경계를 불명료하게 연출함으로써 우리들의 통념과 달리 일상은 사실과 환상의 구분이 불가능한 세계라는 라는 것을 암시한다.  


  이러한 생각을 더 강화해주는 장면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찬실이 갑자기 꺼져버린 전구를 사러 자신의 집에 찾아온 동료들과 함께 길을 나서며 “우리가 믿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이라는 말을 중얼거린다. 이 대사는 어떤 필연성과 인과성이 없이 내뱉어진다는 점에서 영화 밖의 누군가를 향해 지시하는 효과를 주며 이 작품의 주제의식을 그대로 노출한다. 찬실의 마지막 대사가 말해주고 있듯이 무엇인가를 본다는 것은 우리가 보고 싶은 것을 보는 것이며 주관적인 믿음과 욕망에 토대하고 있다.


  이 같은 찬실의 독백이 담고 있는 의미는 영화가 사실적 장면들을 통해 허구를 생산하는 기초원리와 상통한다. 영화의 구성원리가 무엇인가. 카메라에 의해 선택된 장면들을 편집에 의해 배치하고 결합시킴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가상의 흐름을 연속적으로 인식하도록 하는 것에 있다. 다시 말하면 선택된 화면들이 만들어내는 임의적인 가상을 ‘사실’이라고 착각하는 ‘환상’에 토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사실과 환상이 서로를 침범하는 구성의 원리를 영화 는 의도적으로 노출한다. 그리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이전 가상적 통로를 통해 영화의  내러티브 밖으로 탈출하는 시각적 이동의 장면이 구체화된다.


  이러한 장면 이동을 통해 영화의 시공간은 세 가지 의미 층위로 분화된다. 첫 번째 의미의 층위는 영화 내부의 시공간(찬실의 개인적인 서사가 진행되는 시공간), 두 번째 층위는 영화의 외화(外化)된 시공간(찬실의 서사 밖에 존재하는 다른 차원의 영화적 시공간/관객으로서 장국영의 시선과 겹침), 세 번째 층위는 현실의 시공간(영화를 관람하고 있는 실제 관객의 시공간)이다. 이러한 시공간의 분화는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가 영화 텍스트의 외부에 위치하는 메타적 시선을 노출한다는 맥락에서 객관적이고 반성적인 성찰의 시점을 작품 내부에 내포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한 장면을 분석해보자. 찬실의 일상은 갑자기 카메라의 이동과 함께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며 극장 공간으로 화면이 전환되는데 그곳에 앉아있는 관객이 장국영이라는 사실은 사실적으로 연출된 찬실의 일상마저도 영화의 허구적 산물임을 관객들에게 드러낸다. 그로 인해 영화에 등장하는 장국영이라는 인물의 의미의 층위는 복합적으로 변화한다.


  영화 내부의 시공간에서 장국영은 찬실의 무의식을 대변하는 인물이라면, 영화의 외화된 시공간에서 장국영은 영화의 내러티브를 구성하는 과정에 참여하고 있는 능동적 관객으로 읽을 수 있으며, 현실의 시공간에서 바라보면 지금까지 영화의 내러티브에서 본 것은 찬실의 이야기일 수도 있으나 동시에 장국영의 시선에 의해 포착(해석)된 찬실의 일상에 관한 영화일 수도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바로 영화 내부에 메타적 시선들이 중첩되면서 어떤 것을 객관적인 것이라고 보아야 하는지 혹은 사실이라고 보아야 하는지에 관한 의문 그 자체가 발생한다. 즉 김초희 감독은 현실과 가상의 경계에서 줄타기를 하며 의미가 미끄러지는 기표의 연쇄 속에서 유희한다.    


  일반적으로 서사 문학에서 아이러니(irony)란 현실에 패배당한 이념이 현실의 승리란 궁극적인 승리가 될 수 없으며, 새로운 이념에 의해 동요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내적 형식으로 규정된다. 간단히 말하면 환멸적 세계의 경험을 통해 주인공이나 독자에게 자기 각성을 불러일으키는 서사 구조를 말한다. 또한 기법적인 차원에서 아이러니란 서로 역설적이고 대립적인 이미지들의 병치를 통해 발생하는 극적 효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앞의 내용들을 종합하면 아이러니는 어떤 모순 혹은 대립되는 변증법적 이미지의 충돌을 통해 새로운 사유를 발생시키는 구조 및 형식 혹은 효과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 같은 아이러니 기법을 활용해 김초희 감독은 자신의 영화에 독특한 정서를 형성하고 있다. 이 작품의 타이틀 「찬실이는 복도 많지」라는 제목과 영화에서 찬실이 처한 상황이 대조적이라는 것만 보아도 이 작품은 아이러니적 효과를 의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상황적 아이러니란 어떤 인물의 상황과 그의 발언이 불일치할 때 발생하는데 이 작품에서 찬실의 상황과 그녀의 행동들이 빚어내는 명랑함이 부조화를 일으키고 있다.


  찬실이 직장을 잃고 난 이후 구직 활동에 실패하고 연애를 통해 상실감을 극복하고자 하지만 그마저도 실패하는 상황은 암울하다. 그럼에도 영화 속 찬실의 일상은 마냥 암울하게 보이지 않는데 그 이유는 찬실이라는 인물의 행동들이나 태도가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명랑하기 때문이다. 찬실이 직장을 잃고 직장 동료 배우의 가사도우미로 취직하게 되거나 회식자리에서 영화감독이 갑자기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황당한 경험 그리고 맥락 없이 전개되는 연애담은 어떤 필연적인 관계가 아니라 즉흥적으로 보여서 황당하기까지 하다.  


  또한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의도적으로 주관적 이미지와 객관적 이미지의 충돌을 통해 우리 지각 경험의 통일성을 전복시키며 관객들로 하여금 성찰적으로 자신의 일상을 재인식하게 하도록 유도한다. 간단히 말해 영화 속에서 연쇄되는 이미지들의 틈새를 의도적으로 노출함으로써 지금보는 것이 영화적 환영임을 관객들에게 자각시킨다.


  예컨대 영화의 화면 전환 과정에서 갑작스러운 사물을 향한 근접 촬영을 통해 관객들이 보고 있는 화면이 객관화된 가상임을 관객들에게 의도적으로 노출시킨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 일상은 객관적 이미지와 주관적 이미지 사이에서 낯설어지며 영화적 디제시스 세계가 전복되는 지각 경험을 하게 된다. 이로써 우리의 일상적 지각 경험의 통일성은 의심의 대상이 되고 영화를 통해 경험되는 이중화된 지각 경험은 관객들에게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대한 사유의 생산을 촉발시킨다.


  이렇게 우리는 김초희 감독의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가 보여주는 아이러니적 요소들을 살펴보았다. 분명한 것은 인물이 처한 상황과 태도 사이의 거리 그리고 내러티브의 즉흥적인 구성 마지막으로 연쇄된 이미지들의 틈새를 노출시키는 방식을 통해 우리의 지각 경험의 이중성을 노출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김초희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평범해 보이는 일상적 생활의 표면과 이면에 숨겨진 무수한 관계들의 복잡성 그 자체이다. 찬실의 표면화된 일상 아래 잠복되어 있는 무수한 관계성들을 깊게 들여다볼 때 우리는 자기 자신의 주체와 세계의 관계 그리고 삶의 방식들을 다시 사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참고문헌      


게오르그 루카치, 루카치 소설의 이론, 반성완 역, 심설당, 1985.     

이정국, 영화에서 아이러니의 종류와 그 활용 실례, 영화연구22, 한국영화학회,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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