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심우일 Jan 21. 2024

필력이란 무엇인가?

-조르조 아감벤의 『불과 글』 (2016)


조르조 아감벤의 『불과 글』 (2016)은 문학의 역사에 관한 흥미로운 통찰을 보여주는 것 같다. 이 책은 우리가 현재 인식하고 있는 문학이 ‘불’로 상징되는 신비주의와 서서히 멀어지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아감벤은 이러한 불과 문학의 관계를 “글이 있는 곳에 불은 꺼져 있고 신비가 있는 곳에 서사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다. 


“신비가 망각된 상처가 바로 문학 장르이고, 비극, 애가, 송가, 희극 등은 언어가 ‘불’과 더 이상 소통할 수 없음을 한탄하며 눈물을 흘리는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상처를 오늘날의 작가들은 발견할 줄 모른다. 장님이나 귀머거리처럼 겉을면서 현대 작가들은 언어의 심연에서 들려오는 신음 소리를 듣지 못하고 언어를 하나의 순수한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고 믿는다.”


-「불과 글」 중


앞의 인용에서 불의 상실에 대한 아감벤의 비판적 시선은 지금의 현실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문학이 불을 상실했다는 그의 비판적 시선은 무수한 이야기에 노출된 현대 사회에서 이야기를 만드는 공식에 의해 양산되는 서사물들에 대한 비판으로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형식을 도구와 법칙으로 만들어버리는 방식, 그러니까 어떠한 문학적 형식이 불의 신비를 상실하고, 공식이 되어버리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 등이 느껴진다. 


아감벤은 마음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송가를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은 작가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작가가 어떤 양식에 통달하면, 그 안에 불의 신비는 부재하게 되는데, 그럼에도 그 양식의 완강함을 뚫고 은밀한 흔들림으로 어떤 전율이 흘러넘쳐야 한다. 바로 그것이 작가의 필력이다. 필력이 있다는 것, 완벽한 양식으로 불의 신비를 끄면서도, 역설적으로 그 안에서 신비가 흘러넘치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정말 앞으로 아감벤이 말한 필력을 갖춘 작가를 만날 수 있을까? 기대해 본다. 그리고 나에게 지금까지 읽은 소설책에서 아감벤이 말한 신비를 느끼게 해준 작품을 떠올려본다. 개인적으로 조세희 선생의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과 윤흥길의 『장마』 그리고 최인훈의 『광장』 최근에는 한강의 『소년이 온다』 인 것 같다. 물론 짧은 독서 범위에서 당장 생각나는 작품들의 제목을 적은 것이다. 아마 각각의 불은 혜안을 가진 독자라면 누구나 나름 그 마음에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삶도 아감벤이 말한 불과 글의 관계와 같다. 삶의 일상을 채우는 지루한 반복되는 노동 속에서 우리는 불의 열망을 잃어가지만 그 안에서 불을 찾아야 한다. 삶의 의미는 논리적 지성으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과정 속에서 불의 감각을 체화하는 데에서 찾아진다고 생각한다. 문학은 언제나 가능성이다. 내 불의 열망을 살려낼 불쏘시개다.

매거진의 이전글 어린왕자와 죽음이라는 해방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