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선 감독의 영화 <잠> (2023)
잉마르 베리만 감독의 영화 <거울을 통해 어렴풋이> (1961)는 그의 대표작으로 정신증을 앓는 딸과 가족들의 이야기를 통해 종교란 무엇인지 질문을 던지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딸은 종교적 광신으로 정신증을 앓고 있다. 그녀는 거미의 모습을 한 신이 자신을 만나러 올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영화에서 가족들의 보호를 받던 딸은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가 그토록 기다리던 신을 영접한다. 물론 그 신의 모습은 딸에게만 보인다.
딸이 아버지에게 거미의 모습을 한 신이 자신을 찾아왔다고 말할 때 갑자기 옷장의 문이 슬며시 열린다. 이때 슬며시 열린 문은 딸의 광신을 확신으로 바꾸는 사건이지만 그것을 목격한 아버지와 가족들은 우연히 옷장의 문이 열린 것에 불과하다. 영화는 질문한다. 과연 이때 열린 옷장의 문은 딸의 말처럼 거미 모습을 한 신이 계시처럼 강림한 것인가? 아니면 그녀의 종교적 광신을 강화하는 우연적 사건에 불과한가? 중요한 것은 어떤 우연한 사건이 누군가에게는 믿음의 증거로 작동하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무의미한 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유재선 감독의 영화 <잠> (2023)은 앞의 잉마르 베리만 감독의 영화와 겹쳐 보인다. 영화는 몽유병을 앓는 남편과 출산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신경증을 앓던 아내가 남편에게 아래층 할아버지의 영혼이 빙의되었다고 믿는 과정을 보여준다. 점차 불안을 불러오는 신경증이 정도가 심해져 정신증으로 옮겨가고 그 모습을 관객들은 지켜보며 그녀의 광신에 숨을 죽인다. 남편이 잠이 든 사이에 굿을 벌이더니, 이제는 아래층 할아버지의 딸을 납치한 후 할아버지 귀신에게 얼른 남편에게서 떨어지라고 협박한다.
그 협박이 통했는지 아내의 눈에 남편의 몸에서 할아버지의 영혼이 베란다의 문을 열고 빠져나가는 모습이 보인다. 이 장면은 그녀의 믿음처럼 할아버지의 영혼이 남편의 몸에 빙의했다는 사실의 증거일까? 아니면 그녀의 광신적 환상에 불과한 것일까? 그 진실을 알 수 없는 결말은 믿음의 이중성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삶의 억압적 환경에서 믿음은 고난을 이겨내는 내면의 긍정적인 힘으로 작용할 수 있지만 동시에 믿음은 다른 대상과의 타협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그 믿음을 공유하지 않은 타인에게 폭력을 가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러한 믿음의 이중성을 역사적 사실로 목격한 바 있다. 믿음은 다시 말해 이념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우리 인류에서 무수한 폭력과 전쟁을 낳았는지 목격해 오지 않았나. 우리는 어떤 사건의 진실에 관해 쉽게 확증편향 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기사, 원하는 사건들을 수집해 그 정보의 필연성을 구조화함으로써 자신이 원하는 진실만을 진실이라고 믿는다. 문제는 이 경우 우리가 반박할 새로운 정보를 제공한다고 하여도 그 믿음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나머지의 정보들은 그저 조작되거나 거짓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믿음의 문제를 정신분석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속지 않는 자가 속는다.”라는 명제로 압축한다. 즉, 자신이 속지 않는다고 믿는 자는 이미 속고 있다는 것이다. 동시에 “방황하는 자가 속지 않는다.”라고도 말한다. 이런 점에서 역설적으로 믿음에는 의심과 회의가 필요하다. 회의하지 않는 믿음은 광신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유재선 감독의 영화 <잠>은 잉마르 베리만 감독의 종교적 물음을 한국적 상황에 맞게 다시 묻고 있는 작품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