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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우일 Jun 28. 2016

분노는 불온한가?

-영화 <앵그리버드 더 무비> (2016)

  일상적으로 ‘분노’는 ‘악’한 것 혹은 관리되고 통제되어야 하는 감정으로 생각되고는 한다. 그 이유는 인간관계의 ‘안정성’을 위해 우리는 사회화 과정에서 분노를 절제하고 상대방과 ‘소통’하라는 명령에 모두 합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분노는 현대 사회에서 불온한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아마 남몰래 자기 집의 화장실에서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본 사람이라면 안다. 소통은커녕 부당한 갑질에도 분노 대신 웃음을 머금어야 하는 순간이 삶의 대부분이라는 것을 말이다. 

  왜 우리는 이처럼 분노를 감추고 자신의 감정을 통제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것은 현대 사회의 경제적 생산 양식의 변화와 무관해보이지 않는다. 과거 근대 시대에는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서 노동자들의 육체적 노동이 필요했고 사업주는 임금을 지불하고 노동력을 구입하였다. 반면 현대 사회는 ‘감정’ 자본주의 시대로 변화하고 있다. 이 사회는 끊임없이 긍정의 자기최면을 요구하며 사람들에게 스스로의 자아를 착취하라고 강요한다. 이러한 감정의 착취는 현대 사회의 노동이 한 개인의 라이프를 관리하는 것으로 초점이 옮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 주요한 사업들은 대중들에게 상품의 사용권을 판매함으로써 서비스를 제공하고 그것의 관리를 노동자들에게 요구하는 형태이다. 노동 형태의 변화는 ‘소통’을 단순한 커뮤니케이션이 아니라 일종의 상품으로 전환시킨다. 즉 소통은 발화자와 수신자 사이의 평등한 관계와 이해를 가져오는 합리적인 의사소통 방식이 아니라 상품화되고 과잉되어 초과된 형태 속에서 노동자의 감정을 착취하는 수단이 된다. 

  과연 지금까지 믿어왔던 것처럼 인간들 사이의 ‘소통’이 사람들 사이의 평등한 관계를 생성하는 것일까?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소통을 강요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과정에서 우리는 부당한 일들에 관해 분노하는 법을 망각하게 되고 있지 않은지 생각하게 된다. 

  영화 <앵그리버드 더 무비> (2016)에서 레드는 자신의 분노를 있는 그대로 표출하는 새이다. 모난 성격과 항상 화가 나있는 표정으로 친구들 사이에서 따돌림을 당한다. 그러한 따돌림이나 조롱이 다시 분노를 발생시킨다. 일종의 악순환인 셈이다. 결국 레드는 법정에서 분노조절장애라는 진단을 받고 치료받아야 하는 환자가 된다. 여기서 ‘분노’라는 개인의 감정은 일종의 사회적 ‘질병’으로 은유된다. 

  병의 은유 속에서 레드는 여전히 삐딱하다. 개선의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던 와중에 피그들이 레드가 살고 있는 섬으로 접근하고 마을 사람들을 화려한 볼거리로 현혹한 다음에 그들이 낳은 알들을 훔쳐서 달아나 버린다. 즉 마을 사람들은 피그들에게 자식을 볼모로 잡힌 셈이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이전부터 레드는 피그들이 수상하다며 마을 사람들에게 경고하지만 사건의 발생을 막지 못한다. 그때 레드는 공황 상태에 빠진 마을 사람들에게 주문한다. 

  “분노하라!”

  분노는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행동을 조직한다. 레드와 함께 피그들이 사는 마을에 찾아가 자신들의 자식들을 보호하고 되찾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비로소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일어난 부당한 현실에 대응하는 힘을 회복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자식들을 구하게 된다. 다시 마을에는 평화가 찾아오고 레드는 평범한 일상적 개인으로 되돌아간다. 

  이때 분노는 단순한 일순간의 폭발이 아니라 레드라는 한 개인의 위상을 그리고 존재의 형식을 변화시키는 힘으로 작동한다. 그의 분노는 단순한 질병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위험을 고발하고 다시 새롭게 질적 변화를 일으키는 잠재성으로 위치된다. 레드의 분노는 마을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불온한 감정이 아니라 조금 낯설고 이질적인 다른 방향의 가능성인 것이다. 분노는 얼마든지 수많은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내고 부당한 일들에 관해 사회적 행동을 촉구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떠올려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항상 시끄러우며 요란스럽다. 그것들이 때로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민주주의는 우스꽝스럽고 소란스러워야 한다. 자신의 분노를 자유롭게 표현할 자유가 있어야 하고 그들의 목소리는 보호받아야 한다. 민주주의란 어디까지나 법적 절차가 아니라 이질적인 것을 얼마나 수용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달리 생각하면 조용한 침묵과 이질적인 것들에 동일성을 강요하던 사회는 얼마나 병들어 있었던가. 독일의 나치가 그랬고 가까운 우리의 현대사도 그랬다. 

  영화 <앵그리버드 더 무비>는 ‘분노’라는 것이 개인의 ‘질병’이나 결함이 아니라 바로 사회적 역학 속에서 바라보면 전복적인 잠재성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우리는 분노의 수용 속에서만 현재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고 다시 낯설게 돌아볼 수 있다. 그럼으로써 사회는 위기 속에서도 지속된다, 바로 영화에서 레드가 보여준 것처럼 말이다. 이질적이고 불온하게 여겨지는 분노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인내하고 품어내는 방식!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가 지닌 혁명성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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