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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우일 Jun 08. 2016

언어의 바깥을 향하는 혀끝의 향락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 (2016)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에 관한 섣부른 찬사 혹은 비판에 동참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결국 예술은 한 개인의 공감으로부터 시작하고 그것으로 완성된다. 수많은 찬사 혹은 비판의 진동 속에서 시간을 견뎌내는 것이야 말로 작품의 운명이리라.     

  개인적으로 영화 <아가씨>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아가씨 히데코가 살고 있는 저택이다. 동서양의 건축양식이 뒤섞여 있는 집의 모습과 내부의 어둡고 그로테스크한 분위기가 인상적이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들을 접할 때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그는 공간을 잘 활용하고 낯설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전체적으로 명암의 대조가 확연해서 일상적인 공간을 비밀스럽게 만든다. 이러한 분위기를 납득시키는 것은 아가씨 히데코의 대사이다. 그녀는 공간이 전체적으로 어두운 이유는 책들이 햇빛을 받으면 부식되기 때문이라고 숙희/관객에게 말한다.

  작위적이지만 그것으로 얻는 효과들은 분명하다. 히데코가 탈출하고 싶을 정도로 외부와 단절된 공간이라는 이미지를 주며 개인의 무의식과 욕망의 민낯을 드러내기 적당한 무대가 마련된다. 이제 무대의 연출은 끝났으니 인물들 각각의 개인적 사연이 공개되어야 한다. 공간 자체가 폐쇄되어 있기 때문에 카메라가 관심을 가질 일이란 사연을 가진 네 사람 사이의 심리 밖에 없다. 갑자기 외부에서 외계인이나 우주선이 출몰할 가능성은 없다. (물론 그것도 무척 흥미롭겠지만.) 그렇다면 인물들을 둘러싼 내적 갈등이 얼마나 미적으로 드러나는가 하는 것이 관객 설득의 관건이 된다.

  영화 <아가씨>의 짧지 않은 런닝타임을 채우고 있는 것은 히데코와 숙희 그리고 백작 사이의 눈빛 혹은 서로의 육체를 더듬는 손들이다. 히데코에게 수작(?)을 부리는 백작을 향해 날카롭게 반응하는 숙희의 눈빛과 어느 사이 그런 숙희를 사랑하게 되어버린 히데코의 표정이 겹쳐지며 단순할 수도 있는 서사의 빈 공간을 채워나간다. 숙희와 백작이 히데코의 재산을 탐하여 사기극을 벌이기로 한 계획을 수정하고 오히려 아가씨를 사랑하게 되거나, 그녀의 탈출 계획에 의해 희생당한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그들의 행동과 계획을 변경하도록 이끈 정서에 대한 설득이 필요하다. 즉 영화 <아가씨>는 서사 구조만이 아니라 히데코와 그녀의 치아를 갈아주는 숙희 사이의 정서적 교감으로 나타나는 섹슈얼한 리비도의 운동에 집중해보는 것도 흥미로워 보인다.  

  박찬욱 감독은 전작 <스토커>에서도 이미지를 통해 인간의 정서를 섹슈얼하게 표현하는 것에 능숙하다는 사실을 보여준 바 있다. 삼촌 찰리와 조카 인디아의 피아노 합주를 둘 사이의 섹슈얼한 성애로 연출하는 장면이나, 머뭇거리며 걷는 거미의 움직임을 인디아의 내면에 자리 잡은 리비도의 운동과 연결시키는 카메라의 시선이 그것을 증명한다. 이에 반해 영화 <아가씨>에서 화제가 되는 히데코와 숙희의 섹스 씬은 상징적이거나 감각적인 이미지들로 우회하지 않고 감독의 생각을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래서 전작 <스토커>의 난해함과 비교해 영화 <아가씨>는 대중적이다. (물론 이것에 대한 가치 평가는 호불호로 나뉠 수가 있다.)

  개인적으로 히데코와 숙희 사이의 성애는 남성이 도달할 수 없는 여성적 향락의 표지로 읽힌다. 이것은 분명 박찬욱 감독 개인의 상상력에 의해 연출된 이미지임을 넘어서지 못한다. 하지만 영화 <아가씨>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여성적 향락의 ‘재현’이 아니라면 우리는 일차적으로 텍스트 내부 관계 내의 기호로 읽을 필요가 있다.   

  영화 <아가씨>의 어두운 분위기를 지배하는 것은 히데코의 후견으로 등장하는 이모부 코우즈키이다. 그는 친일인사이며 관음증까지 지니고 있다. 간단히 말해 관음증은 ‘훔쳐보기’의 욕망이고 훔쳐보기의 구조는 자신의 희열(喜悅)을 타자에게서 찾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코우즈키의 내면을 구성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욕망을 모방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는 현실에 없는 책 속의 욕망을 자기 것으로 하고 싶어 하며, 히데코의 밀어(密語)를 들으며 상상을 펼치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자신의 희열을 구성하고자 한다. 이 같은 코우즈키의 관음증은 조선 사람임에도 일본인이 되고자 하는 욕망의 구조와 형식상 일치한다. 그가 일본인이 되기 위해선 타자(일본)의 인정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도달할 수 없는 것을 욕망한다.

  이처럼 코우즈키가 남녀 사이의 성애가 담긴 고서를 수집하는 것은 부의 탐욕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도달할 수 없는 희열을 획득하려는 행위이다. 그럼 코우즈키가 상상하는 그 희열의 순간은 존재하는가? 그것은 현실에서 얻을 수 없으며 상상될 뿐이고 그 끝은 죽음뿐이다. (실제로 그는 마지막까지 탐하다가 죽는다.) 코우즈키의 딜레마는 언어를 통해 상상적으로 희열의 순간을 떠올릴 수 있을 뿐 현실적으로 도달 불가능한 폐쇄적 순환 상황에 놓여있다는 점이다. 반면 히데코와 숙희가 보여주는 성애는 상대적으로 희열의 순간에 완성적으로 도달한다. 무엇보다 팔루스에 대한 집착이 없이 이루어진다. 이것은 기성의 남성적 상징 언어로 포착되지 않는 여성적 향락이 존재할 수 있음을 암시하며 기성의 관습화된 언어에 균열을 발생시킨다. 이렇게 보면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는 팔루스를 중심으로 희열을 얻는 남성적 세계에 대한 일종의 해체이자 희화로 읽을 수 있다. 이러한 남성적 향락의 메커니즘에 대한 부정은 대표적으로 두 장면을 통해 설명될 수 있다.

  첫 번째는 히데코와 숙희가 코우즈키의 책을 물속에 수장하는 장면이다. 이것은 남성의 시선에서 여성의 향락을 왜곡하거나 도구화한 언어들을 부정하는 것이라 해석될 수 있다. 두 번째는 히데코가 백작에게 남긴 편지에서 강제로 성관계를 맺는 것이 여성의 쾌락 향상과 상관없음을 밝히는 대목이다. 두 장면의 공통점은 남성의 시선에서 여성의 향락을 규정지으려 하는 행위가 모두 거짓이며 일종의 환상임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영화 <아가씨>는 전체 삼부로 분할되어 있으며 숙희, 히데코, 백작의 시선으로 나뉘어 사건이 전개된다. 그래서 하나의 사건이 세 인물의 시점 교차에 따라 해석의 여지가 달라진다. 이러한 구성은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 (1950)과 유사하다. <라쇼몽>의 경우 아내, 사무라이, 남편 사이에 얽힌 진실이 각각의 입장에서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 보여주고 후에 나무꾼을 등장시켜 그들의 말이 모두 허구임을 밝힘으로써 진실이란 무엇인지 생각하도록 이끈다. (여기서 나무꾼의 말도 거짓일 가능성이 있다.) 즉, <라쇼몽>의 경우 철저한 구조적 완결성이 도드라진다.

  하지만 영화 <아가씨>의 경우 1부와 2부와 비교해서 3부의 구성이 독특하다. 영화의 1부와 2부는 숙희와 히데코가 같은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가 대비되도록 구성했다면, 3부는 코우즈키의 집을 도망친 이후 세 사람의 갈등을 다룬다. 1부와 2부는 일종의 거울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면, 3부는 1부 및 2부와 대립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1부와 2부는 히데코와 숙희의 연대를 보여준다면, 3부는 그녀들에게 사기를 치던 백작이 희생되는 역전이 발생함으로써 히데코와 숙희가 남성적 세계를 벗어나 승리하는 과정으로 마무리된다. 또한 3부에서 집요하게 자신의 향락을 추구하는 코우즈키나 죽어가는 와중에도 남근만은 지켰다고 안도하는 백작의 태도는 남성적 향락의 양면성과 그 밑에 도사린 거세 불안이 잘 드러난다. 이처럼 영화 <아가씨>에서 남성들은 자신의 쾌락을 향유하는 과정에서 미끄러진다면 여성들은 보다 완전한 희열의 세계를 완성해 나간다.

  마지막으로 이 같은 대비적 구조에서 생각해보아야 할 지점은 영화 <아가씨>에서 두 여성 인물이 대상과 부딪히기보다 세계를 떠나버리는 방식을 택한다는 점이다. 히데코와 숙희는 국적과 계급을 초월하여 연대하고 남성적 세계와의 대결에서 승리하지만 어디론가 떠나버리는 것으로 그친다. 영화는 기성의 남성적 세계에 대한 조롱과 부정을 보여주지만 그것을 내파(內波)하고 있는지에 관해 말하기 어려운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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