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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우일 Feb 23. 2016

유동하는 세계, 액체의 시간

-김봉주 감독의 영화 < 더 폰> (2015)

   김봉주 감독의 영화 <더 폰>(2015)은 누가 나의 아내를 살해했는가에 대한 물음으로 시작한다. 오프닝 이후 초반부는 아내가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하는 과정을 관객들에게 보여준다. 물론 아내가 살해당했다는 사건이 일어났지만 범행의 동기와 범인이 누구인지는 미궁 속에 빠진다. 사건이 일어났지만 그 사건의 진실을 알아차릴 수 있는 단서가 없다. 아내가 죽었고 더 이상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단서조차 찾을 수 없다면 이쯤에서 끝나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제 사건의 실마리를 풀 수 있는 단서가 제공되어야 한다. 영화<더 폰>이 관심을 끄는 이유는 사건 해결의 단서가 ‘현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있다는 점 때문이다. 현재의 시간에서 찾을 수 없는 사건의 단서들이 초우주적인 힘에 의해 일 년 전 죽은 아내에게 전화가 걸려오면서 드러나기 시작한다. 사건의 단서이자 증거는 바로 주인공 고동호의 죽은 아내이다.  
 

  죽은 아내에게 전화가 걸려온다는 일이 현실적으로 가능한가에 대한 물음은 우선 묻어두자. 이 전화 한 통을 받기 위해 고동호의 아내는 죽어야 했으므로, 그래도 영화는 개연성을 위해 하나의 장치를 마련해두었다. 갑작스러운 태양폭발로 인해 시간왜곡이 일어나고 세계의 질서가 뒤엉키면서 이상한 일들이 일어난다. 덕분에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로 이어지는 선조적인 시간의 흐름은 해체된다. 이제 과거는 이렇게 표현되어야 하겠다. ‘현재로서의 과거’라고. 과거는 ‘완료’된 것에서 ‘지속’가능한 것으로 전환된다. 과거와 현재는 동시적으로 관계한다. 


 

  영화는 고동호에게 하나의 미션을 던져준다. 그는 휴대폰 하나를 붙잡고 아내의 죽음을 막아야 하고 뒤엉킨 사건들을 해결해야 한다. 이전까지 영화를 지속시키는 동력은 “누가 왜 고동호의 아내를 살해했는가.”라는 물음이었다. 일반적으로 추리서사는 어떠한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범인이 남긴 단서를 통해서 현상 속에 있는 본질로 접근해가는 이성적인 탐색의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근대적인 서사 양식이다. 이것은 고정되고 질서화된 어떤 본질이 있다는 전제에 토대한다. 그러므로 추리 서사에서 의심은 언제나 확실성을 향하여 운동한다. 물론 영화 <더 폰>에서도 사건의 단서는 주어진다. 다만 그것은 과거에 있으며, 증거가 살아있는 아내이므로 사건의 본질과 현상은 끊임없이 유동적으로 변화한다. 즉 근대적인 추리 서사의 구조는 영화 <더 폰>의 내부에서 해체된다. 
 

   아내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고 고동호는 아내가 범인에 의해 살해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이 말의 진실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가는 과정에 자동차 접촉사고가 있을 것이라고 예언하지만 아내는 믿지 않는다. 그런데 아내는 업무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실제로 자동차 접촉사고를 당하고 이것으로 인해 고동호의 현재는 영향을 받는다. 아내가 살해당하기전 남긴 자동차의 앞 범퍼의 접촉사고 흔적이 측면으로 이동한다. 이제 과거와 현재는 서로가 상호적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 장면의 일차적 의미는 고정된 사건의 본질이나 현상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고, 이차적 의미는 과거에 따라서 현재와 다른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영화 <더 폰>의 세계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중첩된 ‘지금’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제 영화는 질문을 바꾼다. “누가 왜 고동호의 아내를 살해했는가.”라는 물음에서 “어떻게 아내를 죽음의 운명으로부터 구원할 것인가?”로 말이다. 왜냐하면 유동적인 시간 속에서 원인과 결과는 고정적이지 않으며 언제든 뒤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건의 본질은 누가 무슨 이유로 아내를 죽였는가라는 ‘진실의 규명’이 아니라 ‘미래의 전환’으로 옮겨진다. 이 순간 영화 <더 폰>은 추리물의 외형을 취하다가 서스펜스 스릴러로 옮겨간다. 영화는 아내의 예정된 죽음의 운명을 지연시킨다. 즉 영화 <더 폰>이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상상력이란 어떤 면에서 단순하다. 끊임없이 아내의 죽음과 붕괴된 가정이라는 실재와 대면하는 것을 지연시키는 과정에 다름이 아니다. 범인으로 구체화된 외부의 침입 혹은 위협으로 부터의 쫓김이 긴장을 유발시킨다. 
 

   이제 고정된 질서는 없다. 얼마든지 그것은 바꿀 수 있다. 과거를 변화시킴으로써 현재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확신만 있으면 된다. 영화 <더 폰>이 지속적으로 관객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본질은 사후적(事後的)으로 구성된 효과라는 것이다. 본질은 과거와 현재 사이의 관계를 통해 의미가 있다고 판단된 어떤 고정점이다. 이러한 유동하는 세계의 질서 속에서의 미래란 불안하다. 그 불안은 가족이란 범주에까지 침입한다. (영화 속에서는 가정을 위협하는 범인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끝없이 유동하고 범람하는 세계 속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은 개인과 가족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보면 범인으로부터 고동호가 가장으로서 자신을 구하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孤軍奮鬪)하는 과정은 설득력을 가진다.  


 

   액체화된 시간의 불안한 미래에 대한 해결책으로 <더 폰>이 제시하는 것은 아버지의 권위를 회복하는 일이다. 예컨대 수학여행을 간 딸이 엄마에게 전화를 걸고 무책임한 아버지를 비난할 때, 아내는 반대로 아버지는 가족을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확신시킨다. 즉 아버지에 대한 어떤 외설의 시도가 차단된다. 아버지가 가족을 사랑한다는 사실은 의심할 수 없는 일이다. 끊임없이 유동하고 범람하는 세계 속에서 유일하게 확실한 것은 아버지는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아니 그렇게 믿어야 한다. 이것을 믿지 않는 일은 ‘죽음’이라는 대가로 돌아온다,) 우리는 고동호가 자신의 아내를 살리기 위해 어떠한 위기에 봉착했는지 보았다. 즉 아버지의 권위는 범인으로 상징되는 외부의 위협과 침입을 막기 위해서 유지되고 지켜져야 한다. 그것의 외설적인 측면(딸의 불만의 형식으로 제기되는 아버지의 무책임)을 폭로하는 것은 오히려 더 큰 위협을 불러온다.  
 

   영화가 결말에 도달하면 고동호는 자신의 딸을 인질로 잡고 있는 범인과 대결을 벌인다. 그가 아내를 죽인 범인이 누구인지 밝힐 수 있는 증거를 가지고 경찰서에서 급히 되돌아오는 곳은 바로 자신의 집이다. (영화는 아버지가 집을 나가는 것으로 시작해서 다시 귀환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영화는 딸을 구하려는 고동호의 싸움과 범인의 손에 목이 졸려 죽어가는 아내의 모습을 교차 편집한다. 고동호는 위기에 처한 딸을 구하려 노력하지만 결국 범인이 휘두른 칼에 찔려 죽어간다. 도래한 파국(破局)의 시간, 어디선가 기적이 일어난다. 죽어가던 고동호는 아내의 목을 조르고 있는 범인의 뒤통수를 내려치는 과거 자신의 모습을 보며 잠에서 깨어난다. 그가 눈을 떴을 때 모든 것은 일상으로 되돌아왔고 아내는 살아있다. 
 

  이제 모든 갈등은 해결된 것일까? 기뻐하는 것도 잠시 갑자기 불길함을 전해주는 한 통의 전화가 다시 걸려온다. 이것은 일종의 의도된 경고일 것이다. 이 전화는 고동호가 획득한 안정과 평화라는 것이 일시적인 것임을 환기한다. 영화 <더 폰>은 유동적인 세계 속에서 일상화된 현대인의 불안을 스릴러의 형식으로 재현했다는 동시대적 맥락을 지니지만 그 해결책이 아버지의 권위를 복권시키는 방식을 취한다는 점에서 고민을 남긴다. (세계의 불안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이 범인의 칼에 찔려 죽어가는 아버지의 선의 밖에 없다니 이것이야 말로 비극적이다.) 그럼에도 영화에서 획득한 가정의 안정이란 일시적인 환상일 뿐이다, 여전히 세계는 불안하고 그 위협이 지속되고 있음을 고동호에게 걸려온 한 통의 전화가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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