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심우일 Feb 24. 2016

악의 기원과 회귀 사이에서

-장재현 감독의 <검은 사제들> (2015)

장재현 감독의 <검은 사제들> (2015)이 개봉하였다. 파이프 오르간 소리와 함께 울려 퍼지는 배경음악, 전체적으로 어두운 화면의 색채, 그리고 종교적인 상징들이 배치된 공간들은 작품이 다루는 ‘퇴마’라는 소재와 잘 어울린다. 영화 <검은사제들>을 보면 누구나 이런 생각을 떠올릴 것이다. “어딘가 익숙한데?” 이 작품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영화 <엑소시스트>(1973)의 한국판 버전이다. 악령이 깃든 소녀를 구하기 위해 신부들이 구마(驅魔)에 나선다는 설정부터 익숙하다. 이 점은 영화를 전공하거나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럼 영화 <검은 사제들>은 <엑소시스트>의 클리셰인가? 이러한 결론은 단순하고 공허할 뿐이다. 이것보다는 영화 <검은 사제들>은 <엑소시스트>의 서사를 지금의 현재의 어떠한 맥락들과 연결시키고 있는가라고 물을 때 문제는 새로워진다. 이때 영화는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차이를 우리에게 보여줄 것이다. 바로 눈여겨보아야 할 지점은 그 차이들이다. 
 

   영화 <검은 사제들>의 미장센과 시퀀스들 사이의 연결은 매끄럽다. 어색하거나 작위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영화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최부제의 내부로 몰입할 수 있다. 영화는 때로 환시(幻視)를 이용하여 최부제의 과거와 그의 비밀들을 관객에게 누설한다. 그러나 김신부는 최부제가 보는 것을 보지 못한다. 최부제와 함께 환시를 보는 존재는 바로 스크린 밖의 관객뿐이다. 우리가 환시를 통해본 것은 최부제의 죄의식이다. 어린 시절 개에 물려 죽어가던 여동생을 두고 도망쳤던 자신에 대한 죄의식이 불안을 느끼면 여동생의 모습으로 의식 속에 침입한다. 
 

   이 장면은 하나의 중요한 맥락을 텍스트 속에 개입시킨다. 영화 <엑소시스트>에서 신부 메린과 크리스에게 찾아볼 수 없는 불안이란 존재가 끼어있다. 즉 고통 받는 것은 악령이 깃든 소녀만이 아니다. 그녀를 구하기 위해 구마의식을 행하는 김신부와 최부제 또한 앓는다. 김신부는 교단에서 버림받음으로써 그가 말하는 모든 진실은 망상으로 치부된다. 반면 영화 <엑소시스트>는 치유의 서사이다. 악령을 앓고 있는 소녀를 두 신부가 치유하려 노력하고 소녀를 위해 죽음을 택한다는 결말은 두 남자의 믿음에 어떠한 의심도 허락하지 않는다. 숭고한 죽음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영화 <엑소시스트>를 구성하는 명제는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다.”이다. 여기서 잘못된 것은 ‘악령’이라 불리는 소녀의 어떤 해명 불가능한 힘인데 이것은 두 남성에 의해 길들여지고 봉합된다. 
  

   그럼 영화 <검은 사제들>의 경우는 어떠한가. 이 작품에서 치유의 서사는 해체된다. 오히려 김신부와 최부제는 치유의 대변자가 아니라 소녀와 함께 병을 ‘공유’하는 자이다. 김신부의 몸이 서서히 썩어가고 동시에 악령을 대면한 최부제의 몸이 썩어가기 시작한 것으로 시각화된다. 즉 영화 <검은 사제들>에서 소녀가 앓는 악령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옮겨 다니며 전염되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악령 스스로 이천 여명의 몸을 옮겨 다녔다고 고백하지 않았는가.) 이제 영화는 치유의 서사를 넘어선다. 악령은 소녀의 개인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함께 병을 공유하는 자들과 관계한다. 이 순간 작품이 지니고 있는 질문의 층위가 달라진다. 영화 <엑소시스트>가 한 여성의 과잉된 리비도를 억압하고 길들이기 위한 구마라면, <검은 사제들>은 소녀가 앓는 악령은 어디에서 왔는지 묻는 기원의 서사가 된다.  
 

  이제 다시 묻자. ‘악령’은 어디로부터 기원하는가. 영화에서 김신부와 최부제가 반복적으로 악령에게 묻는 질문이 있다. “너는 어디에서 왔느냐!”와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이다. 여기서 악령은 이름도 기원도 알 수 없다. 어떤 해명될 수 없는 것이 실재적으로 근접해 있다는 사실만 우리는 목격할 뿐이다. 이러한 사실은 관객들에게 불안과 긴장을 유발시킨다. 실체를 알 수 없는 막연한 것이 우리의 일상적인 상징계 너머에 가깝게 존재한다는 사실이 주는 두려움 같은 것이다. 김신부와 최부제가 반복적으로 묻는 질문은 결국 “너 누구냐!”라는 물음이며, 악령이라는 실재를 상징계에 기입시키기 위해 ‘호명’하는 순간이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은 실패한다. 


   영화는 서사적 차원에서 악령의 기원을 감추지만 카메라 형식적 차원에서 모두에게 목격된다. 바흐의 성스러운 음악과 함께 카메라는 구마의식이 행해지는 소녀의 집 밖 풍경을 훑는다. 여기에는 어떤 필연적 맥락은 없다. 구마의식이 준비되는 과정은 생략되고 카메라는 구마의식이 거행되는 장소의 바깥에 시선을 던진다. 카메라의 시선에 포착된 것은 저녁의 도시 풍경이다. 일상의 바쁜 사람들이 스쳐지나가고,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도심의 풍경들이 아름답게 보인다. 높이 솟아있는 건물들과 레온 사인의 불빛들 그러다가 카메라는 하강해서 도심의 뒷골목들을 보여준다. 밝은 조명 뒤에 숨겨진 누추함을 마주하는 순간이다. 그리고 다시 카메라는 구마의식이 거행되는 장소로 회귀한다. 카메라의 이동과 회귀의 운동은 소녀의 깃든 악령이 일상적 세계와 연루된 것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마치 세상의 부정성이 소녀의 신체에 응축되어있다는 듯이 말이다. 
 

   여기에 확신을 더해주는 것은 소녀의 몸에 깃든 악령이 빠져나와 옮겨진 돼지를 품고 최부제가 한강에 뛰어드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예수가 귀신들린 자를 치유하는 과정에서 돼지에 귀신을 옮겨 스스로 강물에 뛰어들게 했던 성경의 모티프를 차용했다. 이때 한강은 악령을 정화의 공간이지만 동시에 악령이 되돌아가는 공간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이중적이다. 착각하지 않아야 하는 부분은 악령이 소멸된 것이 아니라 원래 있던 곳으로 회귀한 것이라는 점이다. 김신부와 최부제가 하는 일은 악령을 소멸시키는 일이 아니라 소녀의 몸속에 불시착한 악령을 몰아내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 보내는 일이다. 그러므로 악령은 한강의 물결 속으로 다시 말해 자신의 기원으로 회귀한다. 
 

   한강이 지니고 있는 상징적 맥락을 고려한다면, 소녀의 몸에 깃든 악령이란 한국의 역사에 스며있는 부정성에 대한 알레고리일 것이다. 그것은 감추거나 해소되어 사라지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영화 <검은 사제들>은 소녀의 몸에 깃든 악령을 제의과정을 통해 제거함으로써 세상의 부정성을 정화시키고자 한다. 하지만 문제는 악령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봉합되는 것이라는 점이다. 악령으로 막연하게 제시되는 부정성은 반복적으로 되돌아오고 다시 되돌아가는 끝없는 순환 속에 놓인다. 이미 마르크스가 역사는 한 번은 비극으로 다시 한 번은 희극으로 반복된다고 하였던 바, 그 부정성은 소멸되지 않으며 우리가 목격하고 경험해야 하는 미래의 시간에 열려있다. 이런 점에서 영화 <검은 사제들>은 역사의 부정성과의 대면을 상상적으로 지연하는 과정이다. 
 


   이제 문제는 “피할 수 없는 악령과 마주할 용기를 지닐 수 있는가”로 넘어간다. 구마의 과정에서 김신부는 악령으로부터 조력자인 최부제의 정체를 감추기 위해서 장소의 중간에 선을 긋는다. 공간을 구분 짓는 선으로 인해 최부제는 눈앞에서 사건을 목격하면서도 분리된다. 그는 선을 넘어 개입하지 않는 관찰하는 자의 자리에 머문다. 그런 그가 충동적으로 선을 넘어서는 순간 악령에게 정체를 발각당하고 관찰자의 자리에 머물 수 없게 된다. 악령에게 목격된 두려움에 도망치던 최부제가 환시를 통해 죽은 동생의 곁에서 울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 그는 비로소 자기 자신과 대면할 수 있는 용기를 얻는다. 이 장면은 사건 속에서 주체가 출현하는 순간이다. 최부제는 소녀가 악령에 의해 죽어가는 사건을 마주하고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존재를 거는 순간 비로소 ‘사건적 주체’가 된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영화 <검은 사제들>이 던지는 질문은 무겁다. 한 소녀가 죽어가는 상황에서 그녀를 구하기 위해 당신의 존재를 걸 수 있는지 묻는다.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최부제가 서 있던 자리의 어딘가를 겉돌게 된다. 이렇게 영화 <검은 사제들>이 유발하는 불안과 불편함은 영화의 괴기스러운 이미지 때문이 아니라 작품이 던지는 질문에서 유래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유동하는 세계, 액체의 시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