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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우일 Feb 24. 2016

병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준익 감독의 사도 (2015)

   이준익 감독의 <사도> (2015)가 개봉하였다. 이 작품은 익히 알려진 영조와 사도의 갈등 그리고 죽음이라는 역사적 소재를 다룬다. 영화 <사도>가 개봉되기 이전에 같은 소재로 SBS드라마 <비밀의 문>(2015)이 제작된 적이 있으며, <무사백동수> (SBS, 2011)에서도 사도세자의 대의와 죽음을 다룬 바가 있다. 여기서 확실한 것은 사도세자와 영조의 관계를 어떤 방식으로 설정하던 그의 죽음이 결코 낯선 소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된다. 그럼 영화 <사도>를 통해 이준익 감독은 무엇을 말하고자 한 것일까? 
  

   영화 <사도>에서 눈여겨 볼 지점은 영조와 사도의 갈등에 ‘정치’적 측면이 최대한 축소되어 있다는 점이다. 영조가 사도에게 자결을 명하며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이것은 나랏일이 아니고 집안일이다.” 이 순간 영화의 내부에는 하나의 금기가 설정된다. 그 금기의 내용은 영조와 사도세자의 비극을 해석하는 정치적인 프레임을 관객에게 내려놓으라는 명령이다. 왜냐하면 이준익 감독이 영화 <사도>에서 보여주고자 한 것은 영조와 사도라는 두 인물을 둘러싼 역사적 사실의 해석이 아니라 두 사람의 내면과 그것의 정동을 포착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금기는 관객과의 약속으로 작동한다.

 

  사도가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하는 순간 갑론을박하는 대신들의 논의가 오고 가지만 그것은 내러티브의 진행을 끌고 가는 중요한 맥락으로서의 힘을 잃는다. 다만 사도가 점차 영조에게 왕으로서의 자질을 시험받으며 심리적 압박을 느끼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일 뿐이다. 영조가 대신들 앞에서 대놓고 사도를 비난하는 순간 그의 자괴감과 수치심을 포착하기 위한 장치로 작동한다. 그러니까 영화 <사도>에서 정치는 두 부자의 심리를 표면화하기 위한 하나의 도화선이고 장치인 것이다. 역사의 한 장면을 다루지만 ‘정치’가 소거된 세계 속에서 갈등을 만들어 내는 것은 외부가 아닌 인물의 내부일 수밖에 없다. 이미 외부는 축소되거나 봉합되어 버렸기에.  
  

   그렇다면 영화 <사도>에서 사도세자가 광증(狂症)을 앓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도가 앓았다는 광증에 대한 사실유무가 아니라 그것의 영화적 활용에 주목할 것.) 오히려 사도세자는 광증을 앓아야만 한다. 아버지의 억압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표출되는 어떤 한 개인의 반항심과 광기 혹은 아비 부정의 서사에 관한 심리학적 이론을 가져오지 않아도 누구나 공감할 정도의 정신적 고통이면 된다. 영화를 추동하는 리비도(Libido)적 에너지가 외부로 퍼져나갈 수 없다면, 닫힌 내면의 고통이 지속적으로 커져가는 운동 그 자체가 정점에 이르러 파국(破局)에 이르는 이미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사도세자의 광증은 이준익 감독 스스로 외부적 가능성을 닫았으므로 필연적으로 도달하는 어떤 한계의 지점이다. 이것은 영화가 선택하고 도입한 ‘병’이다. 
 

   조금 단순화하면 한 개인에게 작용하는 억압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존재한다. 억압에 적응하던가, 혹은 타락하던가. 그렇지만 영화 <사도>는 사도세자에게 타락 이외에는 다른 가능성을 보여줄 수 없다. 사도세자는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하기 때문에 광증을 앓다가 예정된 죽음을 맞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사도의 시간은 ‘완료’의 형태를 취한다. 그것은 새로운 가능성의 생성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확증된 죽음에 대한 지식을 확인하는 과정으로 종결된다. 이런 맥락에서 과격한 표현일지 모르지만 사도는 좀비와 다를 바가 없다. 사도라는 개체는 살아있는 죽음의 물화(物化)이다. 그가 영화의 오프닝과 후반부에 반복적으로 ‘관(棺)’에서 등장하고 다시 뒤주라는 ‘관’으로 돌아가는 것은 이러한 그의 운명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죽어있으나 살아있는 존재이고, 살아있으나 죽어있는 사도세자의 실체란 좀비 그 자체이다. 적어도 이준익 감독의 사도는 세자로서 실패했으며, 존경받는 아버지와 지아비도 되지 못했고, 더욱이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한 자식으로써, 어떤 세계의 의미화 방식으로도 포획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오로지 사도세자는 사라지고 글로 새겨진 이름만 남는다. 역설적인 것은 죽임당한 사도의 기표는 떠돌며 영조가 만들어놓은 ‘무대’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사도는 영조의 세계 속에 포섭될 수 없는 오염된 대상이다. 

 


   이준익 감독의 <사도>가 인상적인 부분은 더 이상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외부의 세계로 나아갈 수 없고 동시에 내부로만 수렴할 수 없는 자의 고통을 섬세하게 미적으로 드러냈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도의 내면을 왜 감독이 그토록 섬세하게 다루었는지에 대한 동시대적인 해석의 몫은 관객에게 돌아간다. 언제나 영화는 수용자의 해석에 열려있으니까 말이다. 동시에 필자도 작가이자 관객이므로 하나의 해석을 제안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쯤에서 영화의 결말에 등장하는 정조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이준익 감독의 기획에 있어서 정조라는 인물의 등장은 당위적이다. 내러티브가 진행됨에 따라 영화는 영조와 사도세자의 역사적 비극이 아니라 보편적인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이 되어버린다. 이 순간 영조와 정조 사이에는 정치 혹은 역사적 이해관계는 사라져버리고,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오해’라는 인간적 차원의 문제로 수렴되어 버린다. 이제 영화는 스스로가 만들어낸 둘 사이의 오해를 봉합하는 일이 남는다. 이준익 감독은 정조라는 매개를 통해서 사도를 정조의 아버지로 고정시킨다. 이를 통해 영조와 사도 사이의 화해를 시도한다.  
  

   과연 이러한 화해에 우리는 동의할 수 있을까? 만약 이 영화에서 현대적인 그리고 동시대적인 맥락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일차적으로 어떠한 문제적 상황의 해결이 외부가 아닌 한 개인의 내면 문제의 차원에서 다루어진다는 점이다. 애초에 이 영화는 다른 외부적 조건의 개입 가능성을 누락시킨다. 그리고 사도와 영조의 갈등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오해’라는 인간적 차원으로 옮겨지면서 정조의 등장에 합리성을 부여한다. 정조가 등장함으로써 둘 사이의 오해를 바로잡고 상실된 사도의 자리를 기꺼이 복원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영화는 정조를 통해 사도와 영조의 화해를 말하지만 사실상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고,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려함으로써 조선이라는 세계의 질서가 붕괴되었음을 드러내지 않았는가. 약 두 시간 동안 사도와 영조 사이의 갈등을 통해 관객들이 보았던 것은 실상 조선이라는 세계의 붕괴 아니었던가? 무엇보다 영조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다. 뒤주에서 사도를 꺼내어 아버지로서 친자식을 잃은 슬픔을 토로할 뿐, 자신의 언행과 행위가 가져온 파국에 대한 반성대신 아들에 대한 극진한 아비의 사랑이 긴 내레이션으로 이어질 뿐이다. 즉 조선이라는 세계는 붕괴되었고, 아버지는 전혀 자신을 반성적으로 뒤돌아보지 않았으며, 사도는 어디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획득하지 못하고 파국에 이른다. 이런 상황에서 정조라는 인물은 스스로 관객에게 말을 거는 영화적 텍스트에 끼어든 휴머니즘이란 어떤 의도의 산물일 것이다.       

   영화 <사도>가 관객에게 말하고자 했던 것은 사도와 영조의 화해이겠지만 그것을 말하기 위해서는 조선으로 상징되는 세계의 붕괴를 말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사도>는 문제적이고 흥미로운 작품이다. 결국 영화 <사도>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말하는 과정에서 조선으로 상징되는 세계의 붕괴와 정치적 변화의 가능성이 소거된 상황과 병든 내면으로 세계를 앓는 주체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현실과 연루된다. 이것이 연루인 것은 영화 <사도>는 어디까지나 현실의 ‘반영’이 아니라 텍스트에 끼어든 현실의 흔적 혹은 음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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