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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우일 Feb 24. 2016

협녀, 칼의 기억이 남긴 것

-박흥식 감독의 <협녀> (2015)

   모두 알고 있겠지만 이안 감독의 <와호장룡> (2001) 이후 무협영화는 이 작품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은 박흥식 감독의 <협녀, 칼의 기억> (2015) 또한 마찬가지이다. 혹자들처럼 이 작품을 <와호장룡>의 아류라고 비판하는 것은 손쉽다. 하지만 우아한 미장센과 더불어 도(道)에 대한 깨달음 그리고 자유와 사랑을 향한 인간 욕망의 복잡성을 표현한 <와호장룡>을 뛰어 넘으라고 요구하는 것은 가혹한 잣대인 것도 사실이다. (물론 그것을 지향해야 하겠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한국에서도 무협영화가 제작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최근까지 김영준 감독의 <비천무> (2000)와 <무영검> (2005), 김성수 감독의 <무사> (2001), 김의석 감독의 <청풍명월> (2003), 이명세 감독의 <형사> (2005) 등등이 제작되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대중들의 평가는 싸늘했고 앞서 영화들은 흥행하지 못했다. 스케일은 커졌지만 내용과 구성이 허술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한국영화에서 무협영화는 흥행에 실패한다는 공식이 성립한 것도 이러한 실패의 반복과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협녀, 칼의 기억> 또한 비슷한 길을 가버렸다. 결국 <협녀, 칼의 기억>은 실패작인 것일까?  


   과거 이명세 감독은 <형사> (2005)라는 작품을 통해 자신만의 스타일이 분명한 아름다운 미장센을 보여주었지만 관객들의 정서적 공감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이후 정확하지는 않지만 한국에서 제작된 무협영화를 본적이 없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마침내 <협녀, 칼의 기억>이 개봉했다.  


   영화를 보기 전까지 크게 기대하지 않았지만 우아한 인물들의 움직임과 화면의 구도 그리고 인물을 감싸고 있는 풍경은 그 자체로 아름다웠다. 칼의 유연한 움직임과 공간이 주는 시각적인 아름다움이 결코 허세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공간의 배경과 사물이 인물의 정서와 분리되지 않고 긴밀히 유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때로 홍이가 휘두르는 칼은 적을 살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싶은 괴로움을 표현하고 있었다. 


   두 시간 동안 <협녀, 칼의 기억>이 뇌리에 전해주는 것은 백성을 위한다는 대의도 또는 배신자에 대한 차가운 복수도 아니다. 그것들은 일종의 위장이고 소재일 뿐이다. (이것을 두고 무협의 정신이 실종되었다고 비판하지만 의협의 정신이 드러난다고 더 좋은 작품인가?) 이 작품은 사건의 디테일이 아니라 감정선의 흐름이 내러티브를 대신한다. 어떠한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가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을 마주한 인물들이 무엇을 느끼는가에 집중한다. 즉 이 영화의 실제적 주인공은 홍이, 덕기, 월소라는 인격화된 인물들이 아니라 감정선과 흐름을 표현하는 공간과 사물들의 움직임이다. 


   두 남녀의 칼이 얽힌다. 맞섬과 긁힘 그리고 미끄러짐이라는 검의 움직임이 시선을 끈다. 두 남녀의 우아하고 부드러운 움직임 속에 칼은 여지없이 옆구리와 팔뚝을 스쳐지나간다. 부드러움 속에 강함이 있고, 그 강함은 부드럽게 사물에 가닿을 뿐이다. 그곳으로 핏물이 신체의 곡률에 따라 흐르고 한없이 무거운 침묵으로 일관하던 궁궐에는 회환을 상장하듯 살포시 눈이 내린다. 궁궐의 처마에는 깊은 어둠이 앉았고 눈이 내리는 중앙에는 두 남녀의 신체의 얽힘만이 선명하다. 몸의 움직임과 색채 대비의 강렬함 속에서 비장한 인물들의 표정은 침묵 속에서 휘몰아치고 있는 내면의 격정을 드러낸다.  


  박흥식 감독의 <협녀, 칼의 기억> (2015)의 마지막 결투신은 인간의 이성이 아닌 감성에 호소하기 위해, 화폭의 가장 자리에 어두운 색을 칠하고 중앙에 사람들의 신체적 움직임의 유동성을 선명하게 강조했던, 17세기 바로크 시대의 낭만주의 화풍의 화면구도를 연상시킨다. 좁은 2차원적인 평면에서 벗어나 카메라를 통해 보다 공간감을 주고, 인물들의 신체는 정중동(靜中動)의 묘리에 따라 일상적이고 고정된 움직임을 벗어나려 한다. 마지막 결투신이 끝나고 카메라는 원경(遠景)에 위치해 눈이 덮인 산을 일종의 산수화처럼 조감하는데, 이를 통해 작품은 이야기보다 감정의 회화적 표현에 더 집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협녀, 칼의 기억>은 무협영화라는 장르의 형식을 빌려오지만 내러티브의 구성은 멜로드라마에 가깝다. 표면적으로 고려 말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대의를 품었던 풍진삼협의 배신자 덕기에게 월소와 홍이가 복수한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복수는 덕기와 월소의 사랑을 막는 장치일 뿐이다. 은원으로 얽힌 둘 사이는 이루어질 수 없지만 둘은 함께 홍이의 손에 죽음을 택함으로써 사랑을 완성한다. 로맨스의 낭만적인 결말이라고 할까? 여기서 홍이의 역할은 덕기와 월소의 사랑의 메신저로서 인격화된 헤르메스이다.  


   덕기와 월소 사이의 어긋나는 사랑은 과정일 뿐 그것은 완성을 지향한다. 우리는 누구나 어른이 되고서야 자신이 사춘기를 지나왔음을 알게 되듯 둘의 사랑은 생이 끝나는 순간에서야 순수한 초월적인 것으로 완성된다. 이때 궁궐의 숭고한 어둠 속에 눈이 내리는 것은 보다 순간의 격정을 보다 회화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의도이다. 이처럼 영화는 풍경이나 사물을 통해 인간의 내면에 대한 묘사에 집중한다. 예컨대 궁으로 향하던 덕기가 돌연 가마를 멈춰 세우고 정자에 좌정하여 차를 끊이며 월소를 떠올리는 장면과 같은 경우이다. 덕소의 내면은 불 위에서 끊는 차를 통해 가시화된다. 차가 끊기 시작하며 퍼지는 소리가 주는 청각적 심상은 덕기가 느끼는 내면의 혼란을 표현해주고, 그를 죽이기 위해 침입한 암살자들의 죽음과 갑자기 쏟아지는 빗물은 그 자체가 가시화된 덕기의 내면 풍경이 된다. 


   작품에서 사랑이라는 관념은 물질을 통해 형체를 얻고 동시에 물질은 관념이 된다. 이 둘 사이에 작용하고 있는 관계는 우리의 상상력이 빚어낸 것이며, 이 관계의 거리를 좁혀가면서 우리는 감각을 일깨우고 정서를 생성한다. 마치 시작(詩作)에 있어서 내 정서를 표현하기 위해 객관적 상관물을 사용하는 것처럼 말이다. 즉 이 작품은 공간과 사물을 통해 시적인 정감을 생성하는 효과를 얻고자 하며, 시간이 지날수록 영화의 내러티브는 흩어져 사라지고, 내면의 감정은 모두 발산되어 마지막 설산의 풍경처럼 허(虛)의 세계에 도달한다. 

 


 

    <협녀, 칼의 기억>을 통해 무협영화 특유의 의협과 비장미를 동반한 액션을 기대한다면 관객들은 어떠한 욕망의 충족도 얻지 못할 것이다. 이 작품은 각 인물들을 둘러싼 내면의 운동 그 자체를 검의 얽힘과 색채의 대비 그리고 공간들의 회화적인 구도를 통해서 드러내고자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내면이라는 관념과 정서의 문제를 일종의 시각적인 형식과 미학이라는 물질의 형태로 나타내고자 했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이 작품은 한없이 지루한 이미지의 집합이 되고 만다.  


   굳이 <협녀, 칼의 기억>에 대한 하나의 변명을 하자면 비록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그렇다고 무의미한 작품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이안 감독의 <와호장룡>이나 왕가위 감독의 <동사서독> (1995)과 장예모의 <연인> (2004)같은 작품이 남긴 흔적들이 보이지만 현재 한국영화에서 보여줄 수 있는 무협의 한 수준을 보여준 것이라 보이기 때문이다. 이후 한국영화에서 무협영화를 볼 수 있을까? 반복되는 흥행 실패를 떠올리면 어렵겠지만 더 인상적인 작품의 탄생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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