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기 감독 <어느 날> (2017)
거리에 한 남자가 서 있다. 그의 표정에서 슬픔이 묻어난다. 서 있는 그를 중심으로 무심히 달리는 자동차와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래, 결국 슬픔은 혼자 견뎌야 하는 것이지. 이런 생각이 들었을 때 편집된 화면으로 한 여인의 장례식 장면이 이어진다. 아마도 남자의 슬픔에는 여인의 죽음과 관련된 것 같다. 장례식이 끝나고 남자는 혼자 집에서 식탁 위에 담배를 올려놓고 불을 붙인다. 바로 죽은 여인은 그의 아내이다.
보험회사에서 근무하는 이강수는 어느 때와 다름없이 출근하고 일을 한다. 그의 슬픔과 관계없이 일상은 달라진 것이 없다. 그가 아내가 없는 집에서 느끼는 외로움 그리고 죄책감 등은 사적인 일에 불과하다. 회사의 누구도 그에게 위로를 건네지 않고 그 일에 관해 묻지 않는다. 보험회사에서 특별조사반 일을 하는 이강수는 얼마 전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환자 단미소의 보험 업무를 담당하게 된다. 보험회사에서는 빨리 보호자와 합의를 하고 사건을 종결짓고 싶어 한다. 언제 깨어날지도 모르는 환자에게 들어가는 보험비와 더불어 자신들의 회사 고객에게 피해가 돌아가지 않도록 하려는 목적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보험회사라는 곳은 인간의 삶을 기획하고 예측하며 삶을 물적 가치로 환원하는 장소이다. 보험회사는 인간의 삶에 예측할 수 없게 끼어드는 사건과 사고들에 대비하여, 그것들에 의한 피해를 보험료로 환원하기 때문이다. 이강수를 보험회사 직원으로 설정한 것은 그가 경험하고 느끼는 죽음과 그 죽음을 다루는 자본의 관점을 대비시킨다는 점에서 효과적이다. 이강수가 처음 단미소의 병실을 방문했을 때 그에게 단미소의 죽음은 계산되어 액수로 환산해야 할 대상에 불과했다. 그의 직업이 그것이니까.
이강수가 익히 마주했을 다양한 죽음의 양상들과 달리 그에게 실제 아내의 죽음이 닥쳐왔을 때 그에게 죽음은 다른 의미가 되었다. 그가 예전처럼 휴대폰을 꺼내 병실에서 인공호흡기에 의존하고 있는 단미소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려 할 때, 멈칫 그녀에게서 아내의 환영을 본다. 멍든 주사바늘 자국과 말라가는 몸 그리고 생기를 잃어버린 입술을 떠올린다. 그는 문뜩 휴대폰으로 환자를 찍는 일에 불편을 느낀다. 사소한 장면이지만 그에게 어떤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는 단절의 신호이다.
그 신호와 함께 침대에 누워있는 단미소와 닮은 한 여자를 만난다. 그는 아마도 그녀를 쌍둥이 자매 정도로 여겼을 것이다. 후에 밝혀지지만 그녀의 정체는 단미소의 영혼이고 그녀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점이다. 그녀와의 만남은 그의 일상에 작은 균열을 발생시킨다. 그녀를 통해 그는 죽어가던 아내와 곁을 지키던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된다.
영화는 단미소의 만남이 주었던 그의 내면적 충격과 균열을 크리스탈 이미지를 활용하여 표현한다. 양쪽 벽면에서 거울을 마주보도록 붙여놓으면 그 사이 공간을 중심으로 무한하고 겹겹이 분할된 가상의 공간이 생성된다. 그것은 카메라 내부에 층을 만들어 깊이를 보여주는 것을 넘어서 이강수의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 겹겹이 쌓여있는 그의 복잡한 내면을 상징적으로 묘사해준다. 아내의 죽음이 가져다준 충격은 그의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단절을 가져왔고 그렇기에 단미소를 의식적으로 부정하지만 그녀는 그의 의식의 범주를 넘어서 무의식의 세계에 침입한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를 규정하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가까이는 신이라는 존재도 있고, 자유를 향해 진보하는 역사의 법칙도 있다. 우리는 정신으로부터 자유롭다고 믿지만 그리고 분명 물적으로 생성된 유적 존재이지만 동시에 세상을 해석하는 관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방미소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녀와 대화를 시작한 이후 이강수는 과거의 일상적 삶으로부터 단절하기 시작한다.
그녀와 동행하면서 그에게 보이지 않던 관계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허위 진료로 보험사기를 치는 소위 ‘나이롱 환자’였던 사내가 자기 아이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어렵게 생활하고 있는 현실,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시작장애를 안고 태어난 아이를 버린 엄마의 죄책감, 그리고 엄마를 찾아갔다가 두 번 버림받은 단미소의 절망, 살아있는 것이 자신의 남편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라 생각하여 자살한 이강수의 아내, 그가 발견한 삶들은 저마다의 다양한 고통들에 놓여있다.
영화가 중후반에 이를수록 우리는 이강수의 내면에 숨어있는 슬픔을 목격하게 된다. 아내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으로 그의 내면은 황폐하다. 겉으로 억눌린 그의 슬픔은 단미소와의 대화와 그들의 주변을 가득 채우는 풍경들로 전해진다. 영화를 감상하는 일이란 카메라 속의 주인공과 스크린을 바라보는 관객과의 보이지 않는 연결고리를 찾는 일인데, 우리는 이강수의 억눌렸던 슬픔과 아내에 대한 죄책감을 그들을 둘러싼 풍경 속에서 발견하게 된다.
예컨대 구름 낀 하늘 그리고 노을이 지는 저녁과 어스름의 태양 및 어둠과 밝음이 교차하는 바다의 풍경은 이강수와 단미소가 나누는 대화의 바깥을 응시하도록 한다. 그리고 그들의 언어가 포획하지 못한 미끄러진 언어들 바깥으로 어떤 정서를 창조한다. 점차 영화는 언어 바깥에 존재하는 사물들을 통해 완성된다. 인물들의 언어의 외부에서 그들의 소통을 완성시켜나가는 이미지와 소리들 그리고 사물의 배치들이 나타난다.
영화 <어느 날>은 보는 것과 경험의 차이를 강조하는 데 이것은 대상과 소통하는 방식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중요한 요소이다. 사물을 눈으로만 보는 일은 표면만 인식하는 일이 되기 쉽다. 누군가의 손을 마주잡고 피부에 새겨진 상처를 읽어내는 일이야 말로 조금이라도 타인을 이해하는 일이 될 것이다. 사랑하는 연인에게 “사랑한다.”라고 말하는 일보다, 그녀의 눈물 젖은 뺨을 닦아주고 손을 잡아주는 일이 그녀에게 자신의 마음을 더 뜨겁게 전달하는 일인 것처럼 말이다.
반면 이강수는 아내에게 자신의 진실된 마음을 전달하지 못했다. 오히려 아내의 자살은 그에게 죄책감을 안겨주었을 뿐이다. 영화의 오프닝에서 그가 아내의 장례식장에 가지 못한 이유는 첫째 그녀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 둘째 그녀의 죽음을 어쩌면 자신이 바랐는지도 모른다는 죄책감 때문이다. 아내의 병이 악화되며 성격이 변해갈수록 자신이 그녀의 죽음을 바랐던 것은 아닐까 하는 죄책감이 그의 내면을 짓누른다.
단미소가 교통사고를 당한 진실을 찾는 것을 시작으로 둘의 동행이 시작된 이후 바다로 여행을 온 이강수는 단미소의 얼굴에서 죽은 아내를 발견한다. 단미소가 이강수의 아내로 변화하는 장면은 언뜻 이해가 되지 않지만 단미소라는 인물이 이강수의 무의식과 연결된 인물이라는 것을 떠올리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어쩌면 이강수가 보았던 단미소는 식물인간 상태로 누워있는 그녀의 영혼이 아니라 그녀에게 투영한 일종의 자기의식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단미소의 형상으로 존재하다가 그가 아내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화해하면서 자기의식 내부로 되돌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그가 의식적으로 피했던 아내의 작업실에 들어가는 장면을 통해 그의 내적 갈등이 해소되었음이 확실해진다는 점이다.
영화 <어느 날>은 아내의 죽음으로 인해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게 된 한 남자의 일상을 들여다본 영화이다. 단미소라는 귀신은 이강수의 내면의 불안과 결함을 드러내고 스스로의 내면을 관객들에게 고백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이며, 한 남자가 귀신과 교감한다는 설정은 참신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아내의 죽음을 애도하는 한 남자의 슬픔을 서정적으로 풀어나가는 과정은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이토록 진부한 슬픔이 바로 우리들이 직면한 진실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