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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우일 Jan 27. 2018

기억의 서사에서 광장의 현실로

-장준환 감독의 영화 <1987> (2017)

  영화 <1987>은 고(故) 박종철 사건을 모티프로 해서 당시의 시대상을 재현한 작품입니다.  근거리에 있는 과거사를 재현하면서도 숨도 쉬지 못할  긴장감을 형성하는 힘이 있는 작품이었어요. 짧은 시간 동안 1987년에 일어난 사건들을 적절하게 연결해내는 감독의 연출력에 놀랐습니다. 1987년 폭압적인 정치와 민주적인 선거절차를 무시하는 전두환 정권의 횡포에 희생되는 무고한 시민들의 모습에서 부패한 권력에 대한 분노를 그리고 전횡을 일삼는 정부에 저항하는 시민사회의 힘과 저력에 대해서 전율을 느꼈습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몇몇의 개인이 아닙니다. 굳이 찾자면 저항의 의지가 예측하지 못한 다양한 접속의 형태들을 생산하는 과정 자체가 아닐까 싶습니다. 1987년 서울대생 박종철의 죽음이라는 우연한 사건이 운동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계기가 됩니다. 그 운동은 같은 시공간 속에 있지만 이질적인 위치와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인물들 사이를 연결하는 연결고리가 됩니다. 예측할 수 없는 연결들은 주인 없는 네트워크를 형성합니다. 그것은 공동체이지만 형상이 없는 그러나 실재하는 네트워크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의 정부 기관 속에도 네트워크는  실재하며 작동한다는 것입니다. 우연한 사건에서 시작된 운동의 흐름이 전혀 다른 삶의 방식 속에 놓인 인물들 사이의 자율적인 선택과 연결에 의해 얽혀져나가고 영화의 말미에 구체적인 권력의 형태를 지닌 힘으로 발산되어 나타납니다. 이때 힘은 조직화된 형태가 아니라 웅크리다가 일어나는 형상입니다.


  저는 영화에서 연희라는 캐릭터가 지닌 힘에 주목합니다. 그 이유는 연희라는 캐릭터가 기타 남성 인물들과 달리 살아있는 권력을 두려워하는 보통 시민의 모습에 더 가깝기 때문입니다. 연희는 친구를 만나러 나간 자리에서 대학생들이 주도하는 시위에 휘말려 연세대 선배 이한열을 만나게 됩니다. 그 이후 연희는 이한열의 권유로 만화동아리 모임에 참석했다가 1980년 5.18 광주의 진실을 목격합니다.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뛰쳐나간 연희는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며 부정하지만, 곧 부정했던 현실은 자신의 삶의 실존을 위협하며 실재하는 것이 되어 다가옵니다. 시대적 상징물로써 등장하는 MYMY카세트는 엄혹한 현실을 부정하고 취향의 세계에 자신을 옭아매놓았던 연희의 무의식을 보여주는 기호는 아닐까요?

  하지만 연희의 삼촌이 남영동으로 끌려가고 자신의 삶을 위협하게 되었을 때 그것은 도피할 수 없는 현실로 다가옵니다. 연희의 일상적 삶은 붕괴 위기를 맞지요. 모든 것이 끝나고 그녀의 말처럼 세상은 변화하지 않은 것인가 싶은 순간입니다. 그때 그녀에게 선배 이한열이 다가옵니다. 그의 위로와 도움으로 연희는 일상적 삶의 감각에서 다른 삶의 경계로 나아가는 힘을 얻게 되지요.  


  한 인간이 변화하는 이 순간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습관적이고 일상적인 감각의 경계를 넘어 외부로 나아갈 때 비로소 새로운 것을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즉 경험한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생산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수영을 배우기 위해서는 물속으로 뛰어들어야 하는 이치와 같습니다. 물에 뛰어든 자만이 비로소 수영을 배울 수 있지요. 물속에서만 팔과 다리의 움직임과 각도 그리고 물살을 가르는 몸의 형태 등등을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습니다. 물로 뛰어드는 ‘경험’이 우리를 변화시키고 새로운 감각의 형태로 생산된 힘을 신체에 각인합니다. 우리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은 분석적 지성의 한계를 넘어 외부로 나아가는 운동을 생산하고 내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다음으로 영화 <1987>을 현재의 시점에서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에 관해 생각해봅니다. 영화는 타이틀의 제목처럼 1987년이라는 특정한 시공간의 현실을 재현하고 있습니다. 왜 1987년일까요? 1987년이라는 시간은 과거이지요. 현시점에서 영화를 통해 재현되고 있지만 과거입니다. 그렇다고 영화에서 재현되는 1987년이 과거 그날의 1987년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영화 속의 1987년이라는 시간은 과거이면서 동시에 당시의 과거는 아닌 그러면서도 과거의 기억이 현재의 순간에 영화의 형태로 현실화하는 시간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정리할 수 있어요. 이것이 영화 <1987>이 지닌 시간성이지요.


  영화 속의 1987년을 현재에 내속(內續)하는 과거라고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영화 속의 1987년이라는 시간은 순수과거이자 기억으로써 지금 현재화됩니다. 우리가 1987년을 다시 기억하는 경험은 단지 1987년의 역사적 현실로부터 어떤 실천적 운동을 요구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1987년의 과거를 다시 기억함으로써 배워야 하는 것은 작금의 현실을 새롭게 감각하는 힘입니다.


  영화에서 필자가 읽어내고 싶은 것은 재현되는 저항적 운동의 구조가 아닙니다. 우리 삶의 부정성을 긍정성으로 변화시키는 저항의 역사입니다. 물질적 자본주의 아래 개인의 사익 추구가 일상이 되어버린 현실에서 영화에 재현되는 1987년은 역사가 되어버린 공적 기억의 형태로 우리 삶의 부정성을 소거하고 긍정성으로 인도하는 저항의 기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국가를 사유화한 부패한 기득권 세력과 자유를 억압하는 폭력적인 사회의 제도적 장치로부터 자신의 시민성을 회복했던 경험과 감각이 공적 기억의 형태로 무의식에 내재되어 있음을 잊지 말라는 것이 영화가 말하고자 한 것은 아닐지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박 처장이라는 인물입니다. 박 처장은 전두환 정권의 폭력적 속성을 대리하는 상징적인 인물이지요. 우리는 박처장을 통해 1987년의 현실이란 바로 남북 분단이라는 역사에 근거함을 알게 됩니다.1987년 전횡의 근원에는 분단의 역사가 놓여있다는 것이지요. 영화가 결말 부분에 이르면 박처장은 연희의 삼촌 한병용에게 김정남이 어디에 있는지 비밀을 털어놓으라고 종용합니다. 그 과정 중에 박 처장의 가족들이 공산당에게 억울한 죽임을 당했음을 밝히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 시퀀스는 전체적 맥락에서 갑작스럽습니다. 하지만 감독에 의해 의도된 장면이지요.  


  왜 병적으로 박처장이 자신의 수하들을 애국자라며 지속적으로 치켜세웠는지 그리고 멸공에 목숨을 걸고 무고한 시민들을 공산주의자로 내몰아 처단했는지 설명해주는 장면입니다. 필자가 보기에 박 처장은 개인의 사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믿는 바를 실천하는 것 같습니다. 그는 자신의 믿음을 충실하게 실천합니다. 그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박 처장의 문제는 자신의 믿음을 의심하지 않는 맹목에 있습니다. 의심하고 방황하지 않는 정신이란 길을 잃고 말지요. 진정한 삶의 방향성은 방황 속에서 구해지는 것이니까요.
 

  영화는 박 처장을 통해 1987년 현실 속에 분단의 기억을 슬그머니 집어넣습니다. 앞서 언급한 바 1987년이라는 과거 현실에 분단의 과거가 기억의 형태로 내속하는 것이지요. 이런 방식으로 사유한다면 작금의 현재는 분단의 기억에서 시작해서 1987년의 과거가 압축되어 한 점으로써 현재화하는 순간이지요. 과거의 기억 전체는 흘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내속하며 현재의 잠재적 근거가 됩니다.  


  끝으로 영화 <1987>은 광장의 혁명이 시작되는 장면에서 끝납니다. 이 장면이 얼마 전까지 촛불과 함께 물결치던 광장의 기억과 오버랩이 되는 것이 우연일까요. 과거의 기억이 현재의 경험으로 연결되는 기묘한 시간의 울림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한 개인과 이익집단이 국가를 사유화하고, 국가 기관의 힘으로 전횡에 반대하는 시민들을 억압하며, 거짓된 여론으로 진실을 조작하는 시대는 과연 과거의 기억으로 머무는지 여러분에게 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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