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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우일 Mar 18. 2018

그래도 삶은 지속한다  

-임순례 감독의 영화 <리틀 포레스트> (2018)

  작년 10월 중순 무렵 서울에서 학업을 지속하던 나는 돌연 모든 것을 멈추고 무작정 고향으로 내려왔다. 수중의 삼 원이 조금 넘는 돈과 옷 몇 벌 그리고 십 년간 모은 책이 당시 나의 전 재산이었다. 부모님이 살고 계신 고향집으로 들어가기에는 모은 책들이 많았기에 지인들에게 나눠주거나 끈으로 묶어 밖에 내다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의 기억을 평생 나는 잊지 못할 것 같다. 나의 내면에 맺힌 자신에 대한 미안함 그리고 책망의 기억을.

  나의 서울 생활은 여름날의 곰팡이로 기억된다. 옛집을 리모델링한 자취방이었는데 문제는 창문 밖으로 담벼락을 바로 마주보고 있어서 통풍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방은 지하실처럼 서늘했고 여름이면 젖은 벽지 표면으로 푸르스름한 곰팡이가 피었다. 그렇게 약 오 년을 살았다. 난 두 해를 넘긴 이후부터 겨울이면 기관지염을 앓았다. 지금도 날이 추워지면 마른기침을 습관적으로 내뱉고는 한다.

  시인으로 등단하는 꿈을 시작으로 학업에 젊음을 바쳤고 대학원 박사 과정을 수료하였다. 졸업 논문만을 남겨둔 상태로 직장에 출근해 일을 했다. 직장이라고 하지만 대학에서 비정규직 강사 혹은 보습학원 강사로 일했다. 친구들이 여느 직장의 대리 혹은 과장 직함을 달고  있을 무렵 늦은 사회 진출로 서른 초중반의 나이에 아직도 사회 초년생의 딱지를 붙이고 있었다. 대학 강의는 방학이면 수업이 없었고 그래서 수입이 없었다. 그렇게 약 이 년을 보낸 이후에는 일을 구하지 못했다. 이후 지인을 통해 시작한 보습학원은 잦은 시험으로 쉬는 날에도 출근해 무임금 노동을 해야만 했다.

  나는 정작 하고 싶은 일은 하지 못했고 다른 사람의 돈벌이 수단이 되어 있었다. 숨이 막히던 찰나였다. 예상치 못하게 집 안의 가정 형편이 급격히 나빠지면서 경제적 어려움은 가속화되었고 지금 당장 월세를 내지 못할까봐 전전긍긍하던 삶의 벼랑에 있었다. 그때 “내가 아닌 도대체 누구를 위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물음이 떠올랐다. 정신적 압박만큼 몸은 고지혈증과 지방간 그리고 고혈압 등등 폭발 직전까지 망가졌다. 병원의 의사는 한마디를 했다. “이러다가 죽어요.” 얼마 후에 직장을 그만두고 서울 살림을 정리했다.

  고향에 돌아온 이후 난 수입이 없었다. 나이 서른 중반 강의 경력 밖에 없는 나를 고용해줄 회사는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글을 쓰고 읽는 것이 전부였다. 여전히 관성처럼 무엇인가를 보고 생각이 떠오르면 몸이 먼저 반응한다. 그러다가 동네 편의점에서 일을 하면서 새벽 무렵 글을 쓰거나 진열된 상품을 판매한다. 오 원이 조금 넘는 돈으로 각종 생활요금을 결제하면 수중에는 이십 만원이 남는데 지출에 신경을 쓰지 않으면 조금 모자라기도 한다.

  그런 형편에 사치인지 모르지만 동네 친구 녀석과 영화관을 갔다. 심야 영화라서 객석은 비어 있었고 술에 취한 친구는 내 뒷좌석에서 반쯤은 몽롱한 얼굴로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그 친구와 함께 보았던 작품은 임순례 감독의 <리틀 포레스트>이다. 이 작품은 주인공 혜원이 서울에서 고시 생활을 하다가 시험에서 떨어지고 고향에 돌아와 겪는 일 년의 생활을 관찰한 작품이다. 영화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시간의 순행에 따라 변화하는 시골 마을의 풍경과 그 내부에서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의 생활양식을 보여준다.

  이 영화의 카메라는 서사적 갈등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오히려 무관심하다고 할까. 도시와 농촌의 대비적 구도를 설정하고 자기 삶의 방향을 찾아서 집을 떠난 혜원모와 혜원의 그리움을 그려내는 것이 서사의 전체이다. 대부분의 상영시간 동안 영화는 혜원이 일을 하고 요리하다가 먹는 모습으로 채워진다. 첫 시퀀스의 내레이션에서 자신이 허기졌다고 말하는 혜원의 목소리와 함께 시작한 영화는 말 그대로 허기를 채워가는 과정에 집중한다. 그녀는 자신을 낙오자나 패배자로 규정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이 삶의 허기 속에 있다는 말로 상황을 설명한다. 여기서 허기는 일종의 상징으로써 혜원이 자신의 현재적 상황을 일시적인 삶의 양태로 인식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허기를 채우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무엇을 해야 할까? 우선 잘 먹어야 한다. 먹는 행위는 그 자체로 자신의 생명을 보전하고 지속시키는 가장 근원적인 요소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먹는 행위는 개인적이고 본능적이며 물질적인 순간이다. 어쩌면 인간이라는 존재를 설명하는 방식 중에서 먹는 것을 두고 사유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의 근원적인 방식이지 않을까? 식사하는 시간은 우리의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는 인간의 이미지가 사라지는 순간이다. 우리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동식물과 평등해지는 시간, ‘나’라는 개체를 지속시키기 위해 충동적 욕구가 보전되는 시간이다. 즉 ‘나’라는 존재를 위해 향유되는 순수한 시간이자, 개체를 지속시키고 보존하는 힘 그 자체가 바로 먹는 행위이다.

  이 과정을 통해 영화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마도 삶을 규정하는 시간성에 대해 말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영화는 혜원의 일상을 통해 도시적 삶을 규정하는 자본주의적 시간 기계로부터 벗어난 삶의 속도와 리듬을 보여준다. 혜원이 맛있게 요리하고 먹는 모습이야 말로 자신의 삶을 충실히 지속시키는 의지이자 삶을 향유하는 구체적인 시간 이미지라고 읽힌다. 음식의 색채와 맛과 그리고 향기 더 나아가서 음식들의 온기와 으스러짐이라는 촉각은 어떠한 언어로 설명되지 못하는 감각적이고 일회적인 시간의 속성을 드러낸다. 밤에 마시는 막걸리의 취기와 서늘한 밤풍경의 시간은 다시 반복되지 않는 경험으로 혜원의 기억 속에 우정과 함께 남겨질 것이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는 도시와 농촌의 삶을 대비적으로 다루지만 시골의 삶을 이상화하고 있지 않다. 시골의 현실적인 황폐함이 드러나지 않기에 현실적이지 않다는 비판은 무의미하다. 영화는 애초에 현실과 연루되지만 현실은 아니니까.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이미지들이 만들어내는 의미론이지 영화적 배경과 현실 사이의 동일성이 아니다. 또한 이 작품을 ‘힐링’ 드라마로 규정하는 것에 반대한다. 이 같은 규정은 ‘힐링’이라는 단어가 주는 치유 기능에 영화의 이미지 모두를 귀속시키기 때문이다.

  오히려 영화는 도시와 다른 낯선 장소에서 자신만의 시간적 의미를 채워나가는 방식, 그리고 그것들이 우리의 감각과 정서에 끼치는 이미지와 풍경들에 관심이 더 많은 것 같다. 낯선 삶을 감각하기 그리고 이질적인 리듬과 시간에 몸을 맡기고 기성의 리듬으로부터 탈주하기. 일종의 새로운 삶의 시간성으로서 리토르넬로(rirornello)를 보여주고자 한 것이 아닐까. 시계 속의 초침처럼 시간이란 양적으로 분할되어 물질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 질적인 순수한 강도로 향유되어야 할 순간들의 이어짐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기를 바란 것이리라.

  필자는 영화 속에서 혜원이 직접 요리하고 밥을 먹는 과정에 열심인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예능에서 보았던 익숙함의 정서와는 거리가 멀다. 자신의 내재적 삶을 채우는 시간들의 강도에 성실하게 반응하고 감각하기를 보여주는 이미지들로 읽고자 한다. 왜냐하면 그녀의 먹는 행위는 내레이션을 통해 작은 미시적 사물로부터 사려 깊음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삶이란 일상의 이미지 속에 감춰진 사물들의 미열들을 감각하고 삶의 내부로 수용하여 조직하는 힘이다. 혜원이 말하는 허기란 모든 것을 물질로 환원하는 자본주의적 삶의 공허일 것이다. 바로 허기는 삶을 기르며 조직하는 힘의 상실이다. 키우고 다시 버무리다가 수용하는 삶의 과정이 혜원이 보여주는 노동과 섭식을 위한 요리의 원리와 무엇이 다른가. 토마토처럼 싱싱하던 순간과 무참히 버려지는 때는 누구에게나 있다. 그리고 다시 버려진 싹이 올라 붉은 과실을 드러내는 시간도 올 것이다. 다만 지나간 모든 순간이 자신에게 성실한 시간이었는지의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혜원이 보낸 일 년이라는 시간은 과거-시간을 돌아보며 자신의 시간들에 성실하게 응답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영화에서 혜원이 어렸을 적부터 엄마가 가르쳐준 레시피를 통해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는 과정은 자연스럽다.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것은 현재를 이루는 과거 전체를 돌아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작품에서 수돗물에 혜원이 양배추를 씻던 와중에 불쑥 비자발적으로 솟아나는 엄마의 기억은 혜원의 내부에 존재하지만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잠재적 가능성이자 순수기억이다. 그녀와 밀접하지만 잊고 있었던 내재적 삶의 기호이다. 혜원의 기억에서 솟아난 엄마의 이미지가 중요한 이유는 자발적 기억이나 지성의 여과를 거치지 않은 그녀만의 의미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무심하게 보였지만 사려 깊었던 엄마의 보살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순간 그녀의 삶은 기존과 다른 방향성을 지니게 된다.  

  삶이란 언제나 과정 중에 있고 내가 생각한 결과가 아닐 수도 있다. 산다는 것은 여전히 우연의 연속이며 끊임없는 시간의 분화 과정 속에 있다. 우리는 이것을 생명 혹은 삶이라고 부른다. 내가 생각한 삶만이 정답은 아니며 그렇다고 내가 생각한 삶의 방향이 오답인 것도 아니다. 무수한 접속과 만남들 속에 ‘나’라는 개체는 열려 있으며 각각의 양태로 삶은 지속될 뿐이다. 도시와 농촌의 삶은 대립되는 것이 아니며 반복되는 삶의 이질적 양상일 뿐이다. 우리가 세계를 살아가는 동안 언제 어느 곳에서나 슬픔은 존재한다. 그러나 단 하나 우리가 무한히 긍정할 수 있는 원리가 있다면 그럼에도 삶은 여전히 지속한다는 것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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