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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우일 Mar 29. 2020

회귀하는 시간과 목소리

임대형 감독의 영화 <윤희에게> (2019)

이 작품은 현실-환상-현실로 귀환하는 여로의 형식으로 되어있다.

과거 연인이었던 쥰의 편지를 받고 딸과 일본으로 여행을 간 윤희는 막상 쥰과의 만남을 앞두고 망설인다. 이때 윤희가 망설이는 이유는 쥰이 바로 자기 자신의 ‘과거’와의 대면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영화 <윤희에게>의 오프닝 시퀀스가 잿빛 공간을 가르는 열차의 내부 시점인 것은 바로 그것이 윤희의 내재적 삶으로의 인도를 뜻하는 것이리라.
영화에서 일본이라는 장소는 상징적으로 한국이라는 현실과 단절되어 있는 공간이며, 끝없이 눈이 내리며 텅 빈 푸른빛의 바다와 하늘만이 있는 곳이다.  이 일본의 탈색된 풍경은 윤희의 그리움과 죄의식을 의미하는 내면적 상상의 세계이다.
윤희가 여행을 통해 발견한 것은 현실에서 자신을 짓누르고 있던 죄의식이다. 아무도 죄를 짓지 않았지만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벌을 받으며 살아야 했던 지난 삶과의 화해이며 상징적 폭력 때문에 자기 존재를 숨겨야 했던 지난 시간들에 대한 후회이다.
우여곡절 끝에 쥰과 만남을 가진 윤희가 영화 속에서 한 번도 웃지 않다가 마지막에서야 웃음을 보여주는 것은 그녀가 자기의 시간을 더 이상 죄의식 속에 보내는 것이 아니라 긍정하기로 결심했음을 의미한다.
윤희는 지난 자신의 시간을 타자로 인식하고 자기의 현재적 삶에 형벌을 내림으로써 삶을 지속해왔는데 그러한 현실의 삶 속에 남은 것은 무의미한 가족관계 뿐이다.
윤희와 쥰이 서로에게 보낸 편지가 각각 서로에 대해 꿈을 꾼다는 내레이션으로 끝나는 것은, 현실의 억압을 거부하는 비자발적 기억의 시간성에 대한 징후적 목소리이다.
이 비자발적인 시간의 경험은 우리가 억압적 현실로 부터 미끄러지는 삶의 가능성이자 기성의 존재 방식으로 부터 벗어나는 도주로이기도 하다.
그러나 윤희가 다시 돌아온 한국이라는 현실은 여전히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대신 윤희에게는 하나의 희망이 생겼다. 더 이상 자신을 미워하지 않고 앞으로의 시간을 사랑할 것이라는 결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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